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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

장흥문화원 2017. 9. 12. 11:53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
▶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지역에서 야학운동을 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하지만 일제는 판결문에 공산주의 활동을 한 것으로 기재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여 보훈신청을 하는데 너무 애를 먹고 힘들었다.

 

 

우리가 어려서 자세한 것은 몰라요. 저 나 11살 먹어서 돌아가셔브러나서 자세한 것은 모르고 그런디. 독립운동을 일찌거니 하셨던가 봅디다. 그래가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36살에 돌아가셨는디요.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랬는디 이 장흥에서 그랑께 유공자 포상도 지금 늦게사 받았어요. 저 진직 알았으믄 일찌거니 받았으믄 애기들 가르친 데도 좀 도움이 되고 그랬을 것이요만은, 늦게사 해갖고는 그 포상을 받았는디. 이 장흥군에서 32명 대표가, 유재성씨 하고 우리 집 아버님 하고 두 냥반들 재판 기록이 있습디다. 그래서 그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 할 때게 공적서를 꾸리락한디 꾸밀 머시기가 없어요. 우리가 전혀 몰라. 어머님도 안 계시지 아버님도 일찌거니 돌아가셔브렀제. 그래서 쩌그 저 장흥 고영환 씨 한테 인자 갔드니 그 양반 말씀이 그래요. “느그 아부지 하고 하기는 같이 열심히 하고 했다마는 그때 어쯔기 비밀을 지켜브렀던지 느그 아버지 뭣 한지를 나도 모르고 나 한 것을 느그 아버지도 몰라야. 그란디 내가 뭣이라 하겄냐.” 그람시로 “포상 신청을 해놔봐라. 그라믄 거 머시기 보훈청에 가서 자기가 말씀을 하실란다”고 그라기는 그랍디다만은. 그때 뿐이제 뭐 애 터지게 가서 말해주겄어요. 그래가지고 그 때게 포상신청을. 그래서 인자 또 위종관 씨라고 있어요. 쩌그 저 원래는 유치인가 장평인가 거그 출신이었던 거입디다만은. 아버지하고 같이 독립운동 하신 냥반이 보성서 저 길의원을 하고 있습디다, 병원을. 의원을 거시기 해가지고. 그래 거기 가서도 얘기를 물어본 께는 그 냥반도 똑 영환 씨 말씀 하시데끼 “느그 아부지 일 나 모르고 내 일 느그 아부지가 몰라야. 그랑께 머이라고 못하겄다.” 그 얘기를 하시더라고. 그래서 그라기 전에 어츠게 되야서 그것을 인자 포상 신청을 하러 갔냐 그라믄. 명함이 왔는디 아부지 포상 신청을 해보라고 명함이 왔드라고요. 그람시로 명함 내용이 본께 유재성 씨한테도 얘기하고 애기들 한테도 얘기하고, 그래서 같이 포상 신청을 해라, 그람시로 왔는디. 주소가 없이 명의도 없이 그냥 명함만 왔어요, 명의도 없이.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걸 모르것드라고요. 그랬는디 그래서 인자 여그 여 유재성 씨 아들한테 갖고 가서 본께는, “아 이것이 머시기 보성서 왔네.” 그라드라고요, 명함이. 일부인을 보고는 보성서 왔네, 그래. 그래서 보성을 또 인자 그래서 쫓아갔어요, 보성을. 그랑께 그 냥반이 그렇게 연락을 해 드립디다. 그래서 포상 신청을 해서. 세상이 참 험합디다. 그래서 포상 신청을 할라고 저 광주독립유공자, 인자 머시기 유공자협횐가 거그를 갔어요, 해볼라고. 가서 본께는 “장흥 용산서 왔소.” 그람시로 얘기를 한께는 그냥 얼굴만 보드니, 너는 누 아들 너는 누 아들, 그렇게 알어블드라고요. 그라믄 그 당시 아버님들하고 그렇게 친면이 두터왔던 사람들 아니요. 얼굴만 보고는 자식들을 알아본디. 그란디 아무리 뒤져도 뒤져봐도 뭐 근거될 서류가 없어요. 목포 형무소에서 징역 산 거, 저 형 받은 것도 없고 거그 형무소에서 산 것 밲에는 기록이 안 되야 있고 없어요. 그랬는디 어디를 인자 본께는 13인 대표 판결문이 나옵디다. 그래갖고 인자 거그서 그래서사 인자 거그서 모든 것을 봤지라우. 봤는디 그 판결문 내용이 전부 저 머시기 아시아 공산당으로 되갖고, 판결문이 전부 공산당으로 해서 판결을 받은 것 밲에 없어요. 전부 그래 갖고 형을 모도 받고 그랬는디. 그래서 그것을 포상 신청을 해볼라고 하니까는 머이라 한고니는, 아무 근거가 서류가 없어서 그 판결문 그놈을 해올라고 대법원을 가서 전부 뛰적여 보고 그놈을 인출해갖고 오니라고 돈이 많이 들었다고, 그 돈을 우리 보고 주라 그래요. 우리 보고 내놔라. 그래서 인제 내가 하는 얘기가, 그 냥반이 자기가 저 명예나 영달을 위해서 한 거 아니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희생을 했는디, 어째서 흑흑 눈물이 나불락하요. [눈물을 흘리며] 그래서 어째서 후손들이 돈을 내놔야 긍께, 돈을 내놔야 한다 그래. 어뜨케 부에가 인자 나든지 “순 도둑놈들이라고, 당신들 보니까 아부지하고도 그렇게 친면이 있고 그랬는디 그 후손들이 뭐 그 내놓냐, 그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못 내놓것다.” 그라고 하고 난께 쩌 거그 저 머시기 협회 회장님이 “이리 오씨요, 이리 오씨요.” 그러드라고. “다른 것은 고사 간에 판결문이나 복사를 해갖고 가시요.” 그 얘길 하드라고요.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하는데 필요하니까 해갖고 가라고. 그랑께 봉균 씨가 저 재성 씨 아들이 “저 지금 대한민국이 반공을 국시로 하고 있는디 본께 맨 공산당 아니요. 그란디 이 자식들이라도 보믄 할아버지 공산당 했다고 학 것 아니요. 그랑께 안 할라우.” 그랑께 “지금 거 머시기 유관순 씨도 공산당, 그때 독립운동 하신 양반들이 공산당 아닌 냥반들이 어디가 있다냐고, 전부 공산당으로 해서 일본놈들이 죄명을 지어서 한 것인께 해가쑈.“ 그란 것을 안 하고 그냥 와브렀어요. 그때만 했어도 자식들 갈치고 한디 도움이 좀 되얐을 것이요, 저 포상을 받고 그랬으믄. 그란 거인디 그냥 와브렀어요. 와불고 안했드니, 몰겄소 한 10여 년 지냈을 것이요. 그때게 전두환씨 대통령 할 때요. 그랑께 독립유공자들 발굴을 하라고 이렇게 다녔든 거입디다. 그란디 우리는 전혀 몰랐어요. 그런디 장흥 고영국 씨가 연락을 했드라고요. 와서 포상 신청을 하믄 쓰겄다고. 그래갖고는 기별이 있길래 가서 본께, 그때 그 판결문이 와서 있어요. 그래가지고는 그 판결문을 인자 갖고 가서 복사를 해갖고는, 내가 세 부를 복사를 했어요. 복사를 해갖고 유재성 씨 집이 한 부 주고, 쩌그 관산 가믄 위종관씨 집이 또 한 냥반이 있어요, 우리 일간디. 그 집이 한 부를 해서 줌스로, 거그는 같이 해서 포상 신청을 해보세, 그래갖고 내가 오락해갖고는. 인자 항렬로 치믄 내가 아제가 되고 인자 조가 항렬이고. 그래서 오락해갖고는 공적 서류를 뀌며갖고 갔어요. 그래갖고 공적 서류를 뀌며갖고 간 것이, 공적 서류가 뭐 다른 것이 있을 것이요. 저 머시기 판결문 갖고만 했제. 그랬더니 보훈청에서 서류가 빠꾸가 와브렀어요. 그래갖고 와보라고 그래서 갔더니, “공적 서류를 뀌미란 것이 판결문에 없는 것을 알기 위해서 공적 서류를 뀌미란 거인디 판결문대로 되야갖고, 이것이 되겄소, 안 되겄소.“ 그람시로 안된다 그래요. 그래서 ”생각해 보씨요. 본인이 계신다거나 부모님들이 계시면 한디 아무리 알아봐야 알아볼 디가 없습디다. 아버님들 하고 같이 한 분들도 이렇게 비밀을 어찌게 지켰던지 여영 모른닥하고. 그러니 이거 공적 서류 뀌밀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판결문대로 의지해서 했소.“ 그랑께는 그래야고, 그라고는 그거를 받아줍디다. 그래갖고는 그때게 장흥군에서 너이 했어요. 저 포상 신청을 너이 했는디 둘이는 탈락 되야블고 나하고 우리 집안에 그 2분만 되야서 그때부터 포상 신청을 받어갖고 했어요. 그런디 용산서는 용산서는 그 독립운동 하신 분이 나서서 직접 하신 분이 재성 씨 하고 아버지하고 2분인디, 거그 인자 연관되신 분이 여럿 많습디다. 그때 이 의원 아버지도 거기 연관이 되야갖고 있고.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갖고 그때서 부터서 보상을 좀 받었지요.
-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신가요.)
정 진자 수자예요.
- (정진수. 그 담에 그 판결문에 판결문 보셨다고 했잖아요. 내용이 있을텐데 어떤 독립운동을 했던, 그쪽에서 독립운동이라 표현을 안 하고 뭐라고 표현돼 있을 건데.)

저 지방에 있으면서 머시기 이 평생 야학운동하시면서 머시기하고, 모다 그런 거입디다.
-(야학운동하면서 조직활동을 하고 애들 독립심을 고취
시킨다, 그런 내용이겠구나.)

예 그러지요.

 

 

 

 

 

 

                                                                 인암마을

 

 

 

 

 

자료번호 / 06_12_04_MPN_20161128_JJS_0001
제보자(구술자) / 정종숙(남, 82세, 용산면 인암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