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유치면 30

[유치면] 전쟁 통에 아이 잃고도 아픈 줄 몰랐다

전쟁 통에 아이 잃고도 아픈 줄 몰랐다 ▶ 구술자는 한국전쟁 중에 피난살이를 하다 천연두가 돌아 간난아이 쌍둥이를 잃었다. 구술자는 전쟁 중이라 아이들을 잃고도 아픈 줄도 몰랐다고 증언했다. 6·25 때 피난댕긴 그런 얘기밖에 몰라요. 나는 관동서 열아홉 살에 시집가 갖고 스무 살에 쌍둥이를 낳았어요. 피난 다녔어요. 아들 쌍둥이 데꼬 다녔어요. 인자 첫애는 죽어불고. - (왜요?) 피난댕기다 죽어붔죠. 두 명 다 죽어부렀어요. 19살에 애기 낳았고 피난 다녔을 때 둘 다 잃었어요. 추덕손님이 왔어요. 마마. 얼굴이 불피워갖고 천연두가 왔어요. 천연두가 돌았어요. - (사람죽고 그런 걸 목격하셨어요?) 밤에는 산으로 피했다가 낮에는 들어오고 그랬지. 사람 죽는 건 못 봤어요. 애기들만 데꼬 피난만 했지 ..

유치면 2017.11.08

[유치면] 어려서 일본으로 밀항해 성공한 정정옥

어려서 일본으로 밀항해 성공한 정정옥 ▶ 구술자의 당숙뻘 되는 정정옥이란 인물이야기다. 정정옥은 130여 년 전에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송아지 판돈으로 8살에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에서 잔심부름, 구두닦이, 신문배달 등으로 근근이 지내다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후 도요타 자동차의 부품공장을 운영하다 대동아전쟁이 나면서 공장 자리에 아파트를 지워 임대사업으로 자수성가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옛날 남자 한분 그 경력과 생활의 일면을 제가 간단히 얘기하겠습니다. 20년 동안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아들 둘, 형님하고 동생이 있었는데, 형도 남의집살고 동생도 남의집살고, 여덟 살 되어서 남의집살았어. 형이 송아지새끼 한 마리 키워가지고 판돈을 ..

유치면 2017.11.08

[유치면] 인공시절 주민들의 고발로 총살 당한 문씨 일가

인공시절 주민들의 고발로 총살 당한 문씨 일가 ▶ 권세를 누리던 문씨 일가가 인공시절 마을주민들의 고발로 죽임을 당하고 구술자의 아버지도 고초를 겪었다. 구술자는 피난 다니는 와중에 눈을 크게 다쳐 지금은 거의 실명 상태다.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가지고 두드려 패부렀어. 그런 이야기도 해도 돼요? - (누가 그랬다는 거예요?) 그때는 순경들은 우익이고 산사람들은 좌익이라고 그랬어요. 문씨 대종손이라고 문병희라고 문동하라고 하고 다 돌아가셨어. 우리 문씨 중에서 대종손이여. 거가 그랗게 살면서 종손인게 태만하고 청년들한테 조금 한 귀퉁이 하고 그러고 살았어. 그란디 인공이 닥치니까 인제 서기를 놔두고 “유감이 이 사람한테 뭐있냐?” 하면서 다 적잖아요. “난 멍침 맞았다. 난 뭐해서 뭐했다”며 유감없는 사람..

유치면 2017.11.08

[유치면] 옛 어른들 공부하던 책상바위

옛 어른들 공부하던 책상바위 ▶ 소등산 중턱에 책상처럼 생긴 책상바위가 있는데, 옛 어른들이 그곳에서 학문도 익히고 공도 들였다. 여기 인자 제일 높은 산이 있거든요. 그거이 소등산. 거기 올라가믄은 맑은 날은 바다도 보여요. 거기 중간 만큼에나 책상바위가 있어요. 바위가 쭉 뻗어 나와서 납작하니 있어요. 왜 책상바위냐고 하니까, 옛날에 거기서 글 배우고 공들이고 했다고 책상바위라고 했다고 어르신들이 그래요. 생긴 것도 책상처럼 생겼고 이렇게 쭉 산중턱에 뻗어 나가갖고 납작하니 있어요. 자료번호 / 06_12_08_FOT_20161119_MHR_0005 제보자(구술자) / 문학래(남, 80세, 용문마을)

유치면 2017.11.08

[유치면] 난을 피해 은신했던 데라 의신마을

난을 피해 은신했던 데라 의신마을 ▶ 지금은 없어진 의신마을은 과거 난을 피해 몸을 숨기고 의지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곳에 암자가 있었는데 현재는 파괴되고 묘가 들어서 있다. 저쪽 끝으로 가믄은 옛날에 거가 암자, 조그만 절이 하나 있었다고 합디다. 그란디 어떻게 옛날 어르신들은 지금 우산각 높이보다 높을란가 모른디 그 돌을 빤듯하게 세워 올렸나 몰라요. 묘가 써져 있나 봐요. 거기까지 가서 석축을 하고 묘를 써 놯다고 하니까. 옛날에 암자 있었는디 절이 파괴돼불고 묘를 거기에 썼다고 어르신들이 그럽디다. 석축을 할 때 돌을 반듯이 세운 것이 그 절을 지을 때 세웠나 봐요. 지금도 묘가 있을 거여요. 근디 그 마을 이름이 의신, 의지할 [의]자 몸 [신]자. 옛날에 피난하기 위해서 거기서 몸을 ..

유치면 2017.11.08

[유치면] 옛 보림사에 대한 기억

옛 보림사에 대한 기억 ▶ 보림사가 전소되기 전 구술자가 본 보림사의 인상을 전했다. 특히 부처들이 노인의 모습을 하고 둘러앉아 있던 절방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옛날에 노인들이 사랑방에서 삐치고 글믄 고개를 틀고 그러잖아요. 그런 형태로 삥 둘러갖고 있는디 한 부처만 그렇게 있어요. 틀어졌다 이거요. 그래서 고개를 휭 돌리고 있는 거제. 참말로 사찰 말할 게 없어요. 제가 댕긴 중에는 그런 사찰이 없어요. 다 소각시켜부러갖고. 그전에만 해도 사천왕은 이렇게 열고 들어가믄은 임신한 부인들은 잘 못 들어갔어요. 까딱하믄 낙태. 왜냐하믄 뭘 잘못했다거나 안 들어 갈 데를 들어가거나 하믄은 사천왕 옆에가 방망이 들고 있어요. 이게 후르르 하니 나와부러요. 그란디 다 소각 되어불고 이루 말할 수 없어요. - (..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보림사 파밭이었던 대삼마을

보림사 파밭이었던 대삼마을 ▶ 대삼마을에는 파밭등이라고 있는데, 보림사를 창건할 때 인부들 반찬용으로 파를 키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용문리가 사학의 다리부락이었어요. 대삼, 내삼, 신삼, 의신 이렇게 저그 갈림길에다 사학의 다리부락이 형성되어갖고 있었어요. 옛날에는 여기를 삼실이라고 했는디 그 후로 마을명을 바꿔가지고 큰 [대]자 석 [삼]자 대삼이라고 썼는 갑디다. 그렇게 명칭을 했는갑디다. 여기가 한 전부해서 60호 정도 형성되어 있었거든요. 근디 6·25 후로 피난 다녀가지고 이후로 나와가지고 다 도시로 모두 가버리고 인자 이 위에 마을도 철거 되야불고 저기 신삼도 철거 되야불고 그래서 인자 몇 집씩밖에 없으니까 철거를 시켜부렀지요. 그렇게 된 사실이고. 원래 인자 여기가 ‘파밭등’이거..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용문의 노송천제 (老松天祭)

용문의 노송천제 (老松天祭) ▶ 마을 강가에 노송이 있었는데, 도벌꾼이 노송을 뿌리째 파 간 후 마을에 질병이 창궐하는 등 재앙이 많았다. 이후 주민들이 노송천제를 올려 재앙을 방비했다. 노송천제 풍속은 한국전쟁 이후로 사라졌다. 마을에서 천제를 모셨거든요. 그래서 어째서 천제를 모셨나믄 정월보름날 천제를 모시는니, 요만한 동글동글한 바위에 나무가 나갖고 있는디 그 밑에가 해년마다 대로 말뚝을 해가지고 와상같이 만들어서 거기다 제물을 올려놓고 보름날 닭이 울면 제사를 모셔요. 정월보름날이믄 대나무, 가지나무, 고추대를 피워놓고 액막이를 한다고 해서 했는디 천제 모시는 데서 제사를 모시면은 소리가 나면 그 후에 각 부락에서 또 모셔요. 왜 천제를 모셨는가 하믄 그 옆에 가믄은 이렇게 산 바로 바로 위엔디 ..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용문의 용소와 피재

용문의 용소와 피재 ▶ 보림사 창건 설화의 변형된 형태로, 보림사터가 원래는 소였는데 도사가 소를 메우기 위해 사람들에게 눈병을 퍼뜨린 후 소에 돌은 넣으면 눈병이 나은다는 소문을 내 사람들이 소에 돌을 넣게 했다. 그 과정에서 소에 살던 용이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며 재를 넘어 장평면으로 가면서 꼬리로 산을 내리쳐 계곡이 되고 그곳에 소가 생겼다. 그래서 그 소를 용소라 하고 그 재를 피재라 한다. 절에 아주 전적으로 일생을 바치듯이 한분이 있어요. 모든 사찰을 지을 때에 3천년 역사라고 저도 듣는 풍월이지만은 쏘였다 하대요. 쏘를 메켜가지고 절을 만들었거든요. 소를 어떻게 메켰느냐면 도사님이 전국에다가 국민들한테 눈에티로를 줘붕께 그것이 옛날에는 참 힘든 일이거든요. 거기다가 돌을 한 돌멩이 던지면 ..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말정거장이라 마정마을

말정거장이라 마정마을 ▶ 마정마을은 과거에 말들이 쉬어가는 말정거장이었다. 그래서 마정마을인데, 산골이라 농토가 좁았다. 당시에는 마부들을 위한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 들어본 얘기로, 조양 그쪽으로 고을 원님들이 거주하고 우리 마을은 행정적으로 일보러 온 사람들이 말을 몰고 와서 멈춰놓고 일보고 다시 움직이는 장소라 해서 말정거장, 그래서 마정마을이라고 한 것 같애. - (그런 흔적이 남아있어요?) 없제. - (주막거리였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그 말을 멈추면 쉬어야하니까. - (마을의 장터라는 것도 꽤 크게 열렸을 것 같은데) 그 소리는 못들었어요. 마부들이 술 한 잔 하고 갈수 있는 주막거리 정도. - (마을이 부유했겠어요?) 여기는 유치면에서도 지금은 좀 낫지만은 가난한 동네였어..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산속에 널린 게 시신이었다

산속에 널린 게 시신이었다 ▶ 한국전쟁 막바지에 마을 인근 산속으로 빨치산들이 몰려들어 결전이 일어 났는데, 산에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가 그 뼈를 그냥 주워가기도 하고 마을의 어린 아이들은 버려진 실탄을 가지고 놀다가 사고가 나기도 했다. 6·25전쟁 때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갔어요. 빨갱이들은 몰려있고 경찰들은 잡으러 다니고. 저그 산에가 순전히 시신이 징했다고 해. 널려 있는 게 뼈대였다고 해. 산속이 깊으니까 - (그거를 발굴하고 했나요?) 발굴한 것이 아니라 그 후로 그냥 주워가부렀다고 하대. 시신 뼈대를 다 주워갔대. - (누가요?) 모르제. 땅에 묻혀있었던 실탄도 다 주워갔대. - (실탄이 땅속에서 나왔어요? 지금도 있겠네요.) 그때 그 뒤로도 한 번 수거하느라고 검사 다닌 거..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보림사 채공이 거지도사가 된 사연

보림사 채공이 거지도사가 된 사연 ▶ 보림사에 채공 일을 하던 수원이라는 무식한 사람이 있었는데, 스님의 지시로 300일 기도 끝에 땅속을 들어다 보는 도사가 되었으나, 정작 자신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300일 기도가 헛수고였다고 스님을 원망했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개고기와 막걸리를 먹고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땅속이 들어다 보였다. 그러나 이미 얼굴에 나병 같은 것이 생겨 절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평생 거지도사로 떠돌며 남들 묘자리를 봐주며 문전취식으로 살았다. 제가 어른시절에 어른들한테 자주 들어본 얘긴데, 보림사에 채공 일을 하고 계신분이 계셨다고 해요. 채공이 뭣인고 하믄 절에서 나무 담당하는 직책을 가진 분이에요. 못 배우고 그래놔서 나무나 하는 사람을 옛날에 채공이라고 한다고 해요. 채공하신..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면소재지가 들어서면서 되살아난 원님고을 원등

면소재지가 들어서면서 되살아난 원님고을 원등 ▶ 원등이란 곳에 원님이 살았다고 구전되어 왔는데, 유치면 사무소를 이곳에 이전하면서 사라진 원등마을이 그 이름을 되찾았다. 그때가 인제 2000년이 좀 되기 전, 그때 자응 국회의원이 김옥두 의원일 겁니다. 군수님이 김재종 군수님 그라고 유치면장님이 문상배씨고. 그런 과정에서 댐이 되니까 유치면 소재지를, 아마 자응군이 생긴 이후로 면소재지를 옮긴 것은 그때가 처음 일이고 앞으로 그런 일은 드물지 않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면소재지를 옮기는 데는 우선 면민들이 합당한 장소를 정해야 되는데 그것이 인자 전쟁이 치열했어요. 당초 장흥 군수님이나 장흥군의회에서 생각하기는 암천에다가 면소재지를 옮길라고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그려냐면 그쪽에가 상수원하고 거..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하룻밤 도깨비 공사로 생긴 신풍마을 터

하룻밤 도깨비 공사로 생긴 신풍마을 터 ▶ 신풍마을의 옛 이름이 새터인데, 도깨비가 하룻밤 사이에 하천을 메워 마을 터를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마을을 신풍1구라고 하는데 옛날 어른들은 새터라고 그라다가 다시 신기라 했다가 다시 신풍이 되었어요. 신풍이 다시 1구 2구가되고 분구가 되고 했는데, 신풍 새터 일 때는 신풍이 지금 동쪽서쪽 그랍니다. 그런데 동쪽에가 집이 몇 채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은 안씨, 송씨 그라고 인제 양씨, 이 성씨들이 살았다고 그래요. 그라다가 이조 중엽에 남평 문씨들이 입촌을 하면서 남평 문씨 자자일촌이 되었다가 근래에는 현재 남평 문씨가 거의 떠나고 몇 집이 없습니다. 우리마을이 왜 샛터였나하는 얘기는 옛날에 우리 마을 가운데로 서쪽은 완전히 하천이었다고..

유치면 2017.10.26

[유치면] 당산나무 잘못 건드리면 꼭 죽는다

당산나무 잘못 건드리면 꼭 죽는다 ▶ 신풍마을에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두 차례나 잘못 건드려 거기에 관련된 주민들이 죽었다. 차량 통행에 방행된다고 가지를 잘라 젊은 주민들 여러 명이 죽었다. 또 새마을사업이라고 당산나무 아래를 시멘트로 포장했다가 이번에도 젊은 주민들이 죽었다. 이후로 당산나무에 함부로 손대지 않고 있다. 우리 마을도 당산나무가 두 개가 있어. 그런데 옛날에 그 당산나무 가지를 산삼하는 사람이 차에 걸린다고 짤라부렀다고 그래. 두 그루가 쌍으로 있고 밑에 하천에 한 그루가 있고 세 그루가 있는디 그 두 그루 중에서 한나를 차가 걸린다고 짤라부렀어. 그래갖고 사람이 여남은씩 죽었다고 그래. 그 뒤로 새마을사업이 일어나면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은, 당산나무를 놀기 좋게 한다고 산 나무를 갖다..

유치면 2017.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