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2017/09 296

[장동면] 일본 징용 끌려가 배 만들었어

일본 징용 끌려가 배 만들었어 ▶ 구술자가 19세에 일본 오사카에 징용 끌려가서 배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당시 장흥에서 50명이 함께 끌려갔다가 해방 후 모두 무사히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일하고 고작 몇 십 원 벌었다고 한다. 나 19살에 일본 징용가고 그랬어. 잽혀 갔어. 거기 사는 이치도라고 있어 그 사람이 있는디 영장이 나와서 가라고 그래서 저 멀리 피신을 했어. 그랬더니 그 자식이 우리 아부지를 보고 징용 보내 버린다고, 아들 안보내면 보낸다고 억장부리는 통에 그래서 일본 갔제. - (일본 어디로 갔어요?) 오사카, 오사카 배 만드는 데. - (배 만드는 일 하셨어요? ) 배 만드는 게 일이지. 그때 인수가이올 그때에 왜 군대 보낼려고 그랬던 모양이여. 그때에 장흥에서 50명이 갔어. 해방 되..

장동면 2017.09.26

[장동면] 옥왕바위에 난 다섯 손가락 자국

옥왕바위에 난 다섯 손가락 자국 ▶ 마을 뒷산을 주민들은 옥녀단자라고 하는데, 부처바위와 용바위를 비롯해 비적재가 있다. 또 옥왕바위가 있는데 바위에 다섯 손가락 자국이 크게 새겨져 있다. 주민들은 어느 거인 장수가 손으로 들어 옮겨 놓았다고 전한다. 우리마을 부락터가 옥녀단자여. 옥녀단자 인디 우리마을 뒤에가 부처모양으로 생긴 부처바위가 있고 그라고 용바위가 있고 그라고 거울 비친 비적재라고 있어. 거울 비적재도 있고 또 옥왕바위가 있어. 옥왕바위가 집채만이나 큰디 거기 현장에 가서 보면은 다섯 손가락 흔적 표시가 지금도 있어. 그랑께 그것이 옛날에 장수가 장사인가 거그 열 개 띠메갖고 와서 옮긴 손가락테 흔적이 있어. 집체만한디 어떻게 손테가 있냐 그말이여. 손테를 보면 누가 끄고 와서 거기다 놔뒀다..

장동면 2017.09.26

[장동면] 앞 재에 나무가 성하면 큰애기들 바람난다

앞 재에 나무가 성하면 큰애기들 바람난다 ▶ 거개마을 앞산이 옥녀단자인데, 마을 앞 재에 나무가 성하면 마을 큰애기들이 바람이 나고 만년동에서는 청년들이 바람이 났다. 그래서 거개마을에서는 나무를 베어내고 만년동에서는 나무를 못 베게 방해하곤 했다. 우리 부락 터는 고터요. 삼한시대 때부터 기록이 있는 고터여. 왜 기록이 있냐면, 우리 부락이 사기를 구웠어. 목포대학교에서 현지답사를 하고 사기를 조사해가고 대학교별로 와서 조사를 몇 번 했어. 우리 마을이 옥녀단자인디, 비척재라고 거울이 있고 용바위가 있고 부처바위가 있어. 그래서 옥녀단자라고 내려오고 있어. 도중에 우리 부락에 절터가 조그만 게 있는디, 거기가 여중이 살고 남중이 살고 그랬는디 절터가 적어서 중도 안 많았어. 빈대 때문에 오래 전에 사람..

장동면 2017.09.26

[장동면] 주마산 지키는 구시

주마산 지키는 구시 ▶ 석교마을 입구에 구시방죽이라고 있는데, 그 곳에 구시를 놓아 도망가려는 주마산을 지키고 주마산 양 옆에 고산사와 용화사를 지어 목동으로 삼았다. 그런데 40여 전 구시방죽의 구시를 석교마을로 옮겼다. 이후 주민 4명이 객사를 하는 등 마을에 재앙이 닥쳤다. 이에 주민들은 제를 올리고 달랬는데 이후 재앙이 가셨다고 한다. 구시에는 늘 빗물이 고여 마르지 않는데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눈병이 낫는다고 한다. 내가 장평 탑동에서 43년 전에 석교마을로 이사를 왔는데, 이사 와서 새마을지도자를 하면서 겪은 일이여. 장흥서 우리 마을 들어오면 장평 미쳐 못가서 구시방죽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약 1km 들어오면 석교부락이여. 부락 뒷산이 주마산인데 말 [마]에 도주할 [주]라고. 그란디 구시방..

장동면 2017.09.26

[장동면] 선들보에서 나온 항아리 무덤

선들보에서 나온 항아리 무덤 ▶ 약 300여 년 전에 조양들에 농사를 짓기 위해 보성강에 돌로 보를 쌓았는데 쌓기만 하면 터졌다. 그래서 선들이란 아이를 항아리에 넣고 보를 쌓았는데 그 이후로는 보가 잘 터지지 않았다. 그런데 비가 오면 보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나 주민들은 인신공양한 선들이가 우는 것이라 여겼다. 훗날 돌보를 시멘트로 재건할 당시 실제로 돌보 속에서 선들이를 넣었다는 커다란 항아리가 나왔다. - (보성강에 선들보가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 얽힌 이야기 부탁해요.) 질문을 해 야지. - (왜 선들보란 이름이 붙었어요?) 우리도 그걸 자세히 모른디 전설에는 그러대. 항시 보를 막으면 터져불고 터져불고 해서 선들이란 애기를, 애긴가 어른인가 모른데, 애기제. 애기를 독아지에 넣어서 거그다 묻었단 ..

장동면 2017.09.26

[안양면] 골치와 은신골, 무지기꼴 계곡물이 합쳐 수문 앞바다로 질게 흐르는 장수(長水)

골치와 은신골, 무지기꼴 계곡물이 합쳐 수문 앞바다로 질게 흐르는 장수(長水) ▶ 장수마을 앞으로는 은신골과 골치, 그리고 무지기꼴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해서 길게 흐른다. 이 물은 수문 앞바다로 흘러들어간다. 그래서 오래 산다고 해서 장수가 아니라 물이 길게 흐른다고 해서 장수다. 어르신들한테 들은 얘기라고는 그 장수라고 이름을 지는 것은. 그 옛날에는 저수지가 없고 하다보니까 여기서 부터서 쩌그 은신골이라고 하는 꼴창이 있어. 꼴창에서 질게 수문 앞바다에까지 내려간다 해서, 물이 질게 내려간다 해서 장수마을이고. 말하자믄 오래 산닥 해서 장수마을이 아니라 이리 물이 질게 내려간닥 해서 장수마을이고. 또 그 골치라고 그 한 계곡이 있고 은신골이라는 계곡이 있고. 또 무지기꼴은 저 신촌마을에서 그 내려간 ..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아름드리 솔숲에서 학들이 뱀을 잡아먹으며 살았던 학송(鶴松)

아름드리 솔숲에서 학들이 뱀을 잡아먹으며 살았던 학송(鶴松) ▶ 어려서 보면 마을 뒷산에 있는 아름드리 솔숲에서 학들이 많이 살았다. 학들은 하얀 뱀도 잡아먹었다. 그래서 학송(鶴松)이라고 부른다. 인자 자세한 내역은 우리도 모르고요. 어르신들한테 얘기를 들어본 바에 의하면은 학송이라는 그 명칭이 학이 많이 살았답니다, 학이. 그래가지고 그전에 인자 내 어려서 보면은 여기가 산이 이런 손에[두 팔을 둥그렇고 넓게 펴서 잡으며] 아람백이 솔이 꽉 찼었어요. 저 그래가지고 거기서 학이, 나 어려서 보면은 학이 많이 엉거 가지고 하얀 뱀도 걍 잡아다 먹고 그냥 거그따가 밑에 떨쳐놓고 그런 것도 있고. 저희 우리 집,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어르신들 말 들어 보면은 구대통 안에서 학이 그 알을 낳아가지고 학이 거..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명지실꼬리 두 개가 들어갈 정도로 깊고 시퍼렀던 비서리 둠벙

명지실꼬리 두 개가 들어갈 정도로 깊고 시퍼렀던 비서리 둠벙 ▶ 마을 앞산에는 비서리 둠벙이 있는데 어찌나 깊었는지 명주 실꼬리 두 개가 들어간다고 했다. 전설에는 비서리 나무가 썩어서 패인 자리가 둠벙이 되었다고 한다. 근께 쩌기[마을 앞 높은 산을 가리키며] 가믄 비슬둠벙이 있어 이승굴이라고 쩌기 들어가면은. 이렇게 둥그렇게 엄청 커요. 그전에는 물이 시퍼라니 엄청 아주 무스와. 그란디 인자 어른들 얘기 들어보먼 머 명지실꼬리가 두 개를 들어가도 땅이 안 닸는 자리 그런 유머가 있었는데. 거가 뭐 비서리 나무가 썩어가지고 패여가지고 거 비슬둠벙이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가꼬 그전에 지금은 이렇게 저수지 막기 전에는 옛날에는 은어도 이짝에 많이 올라오고 그 민물장어가 많이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고기를 잡기 위해 도깨비를 부려서 보를 막은 마천목 장군

고기를 잡기 위해 도깨비를 부려서 보를 막은 마천목 장군 ▶ 마천목 장군은 굉장한 효자였다. 아프신 어머니가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셨는데 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도깨비를 부려서 밤새 보를 막아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지금도 곡성에 가면 도깨비보가 있다. 마천목 장군 할아버지는 회천, 지금 옛날에는 거기가 장흥현이었습니다. 장흥현 안양면이었는데 지금은 보성군 회천면으로 되어요. 회천면 봉강리에 마천목 장군 생가터가 있습니다, 지금도. 생가, 출생하신 그 집터가 지금도 유지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후손이 거기 살고 있는데. 그 위에서 열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서 곡성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곡성 옥과로 이사를 하게 되가지고 거기에서 성장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성장을 해가지고 난중에 출사를 하게..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갈치 뱃속에서 사람 손톱이 나오던 시절

갈치 뱃속에서 사람 손톱이 나오던 시절 ▶ 한국전쟁 때 마을이 산속에 있어 밤이면 산사람들이 내려와서 여자들은 고추장, 된장을 퍼가고 남자들은 톱과 곡괭이를 가져갔다. 많은 사람들을 바다에 빠트려 죽였기 때문에 마을 샘에서 아낙들이 갈치 배를 따면 사람 손톱이 나왔다. 6·25는 삽으로 찍어갖고 저 수댓골이라고 수양 뒤에 꼴창, 거그서 삽으로 찍어불고. 그런 사람, 바로 이 동네 두 형제가 자기 큰형님을 바지게로 짊어지고 갔어, 나 어려서 보면. 그래서 무엇인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통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란디. 나중에 크면서 알고 보니까 삽으로 찍어서 주게, 인공 때는. 경찰들이 자응 경찰이 완도, 청산까지 내빼부렀거든, 6·25 때는. 그란께 우리는 그것도 몰랐제마는 나중에사 알았제. 경찰서가 거..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큰물을 피하려 지은 마을이름 월암(月岩), 고당(高堂), 주교(舟橋), 여암(餘岩)

큰물을 피하려 지은 마을이름 월암(月岩), 고당(高堂), 주교(舟橋), 여암(餘岩) ▶ 큰물이 지면 월암은 달바우로 올라가면 살고, 고당은 집이 높아 해를 입지 않는다. 배가 다리를 건너니 주교고 큰물이 지면 여암은 바위만 남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기 보인 저수지가 있는디, 저수지 잠깐 말잔 드릴라고. 이 저수지를 현재 막기로는 아 1962년도에 둠벙이 되았는디, 그 전에 일제강점기 때 막을라고 완전히 터까정 따듬어서 시작을 했어. 그랬는디 그후로 머시 안 맞어가지고 해방이 되고 하닌까는 못 막고 계속 있다가 인자 저수지가 필요하거든. 인자 정부도 나라가 안정이 되고 해방 후로. 하닌까 그래서 물이 잘락고 흉년이 들면 물이 없고. 그닌까 그때 에 1962년도 준공이 되았는디. 그 후로 막..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장흥에서 두 번째로 생긴 백 년 된 지천교회

장흥에서 두 번째로 생긴 백 년 된 지천교회 ▶ 지천교회는 장흥중앙교회 다음으로 생긴 오래된 교회다. 선교사들이 들어와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쳤다. 한국전쟁 인공 시절 폐쇄된 교회에서 인민군 노래도 배웠다. 우리 부락이 기독교 교회 이거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어. 장흥중앙교회 다음으로 설립이 됐다 그래. 그랑께 요것이 한 백 년 전이라고 봐야돼. 아 그랑께 장흥중앙교회 다음으로 지천교회라고 그라드라고. 그랑께 교회를 안 댕긴께 그건 정확히 연도를 잘 모르제. 그건 유구한 역사라고 내가 인자 생각을 해. 인자 누구 오고 쁘리핑 하믄 내가 교회를 내가 추켜들제 인자. 그 당시에 우리 어려서 보믄 선교사들이 또 와서 주둔해갖고 거 말하자먼 전도 활동을 하고, 선교사들이. 인자 그런 것을 내가 잘 알아, 그런 것..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한 마을에서 서로 죽이고 살렸던 한국전쟁

한 마을에서 서로 죽이고 살렸던 한국전쟁 ▶ 한국전쟁이 나던 해 초등학교 4학년 이었다. 인민군이 내려오기 전 지방 폭도들이 마을사람 여럿을 잡아다 생매장해버렸다. 그러자 수복된 후 학도병들이 마을로 들어와 좌익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잡아다 바닷가에서 곡괭이로 때려 죽였다. 그때 우리가 초등학교 4학년 이었어. 그라닌까 그때 우리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닌까 여름에 인자 6·25, 인자 모 심어놓고 상댕히 자라고 그랬을 땐데. 인자 그 인민군들이 쳐들어온다 그란디 실지 인민군들은 없었어, 안 왔어. 지방 폭도들이여 인자. 그란디 우리가 그 가마니떼기 같은 거, 포대 같은 거 갖고 쩌그 들판 요런 데로 안보이게. 그런 데를 가서 내가 잠자고 들오고 아침이먼. 인자 만약에 와갖고 잡어갔까 무선께. - (초등학교..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곤호리 고기로 젓갈을 만들어 팔았던 곤호리 부대, 지천마을 사람들

곤호리 고기로 젓갈을 만들어 팔았던 곤호리 부대, 지천마을 사람들 ▶ 1938년 간척사업을 하기 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바다여서 거문도에서 고기가 들어왔다. 거문도에서 들어온 곤호리로 젓갈을 만들어 팔았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을 곤호리부대라고 불렀다. 그랑께 1938년경에 그 일본놈들이 간척사업을 했어. 1938년에 그 왜놈들이 간척사업을 해가지고. 그랑께 우리 부락까지 바다여. 그라다봉께 인자 바다가 없어지고 주업이 인자 농토로 변해부렀제, 앞이. 그라기 이전에는 거문도라는 그 섬, 우리하고 교역을 하다시피, 그 고기 이런 것을 갖고와서 우리 부락에서 팔고. 그랑께 주업이 말하자면 어업이었어, 그 당시에. 바다가 인자 우리 부락까지 대있으닌까. 그랑께 섬은 거문도 섬이고. 그래가지고 인자 우리 부락에서 그렇..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구렁이가 집을 떠나자 몰락한 천석궁 부자

구렁이가 집을 떠나자 몰락한 천석궁 부자 ▶ 천석궁 부자가 자기 땅을 내놓지 않아 길을 내려고 산을 파헤치자 구렁이가 피를 흘리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천석궁 부자 집에서도 수많은 구렁이가 집을 떠났는데 이후 가세가 기울었다. 우리 부락에 그 천석궁 부자가 있었어, 한나가. 그런디 왜 그 사람을 내가 인자 모멸감을 느끼냐 그라믄. 우리 부락 앞으로 이 풍암서 요리 지천으로 돌아서 용산으로 빠지께끔 돼야있어. 지적도 상으로. 그라고 지금도 그렇게 지도가 돼 있는디. 자기 땅이여, 천석을 받았은께, 맨 즈그 땅이여. 그때는 해변이닌까 육지가 조금 있는 것은 다 자기 땅이여. 그랑께 우리 부락사람들이 다 종이여, 자기 종. 그랑께 소작을 한다고 봐야제, 그 사람 꺼를. 그래서 그 사람이 왜 망했느냐, 인자..

안양면 2017.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