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읍

[장흥읍] 인공시절 장동 산골에서 살던 새색시

장흥문화원 2017. 9. 14. 09:58

 

 

 

인공시절 장동 산골에서 살던 새색시
인공시절 장동면 산 속 새색시의 집안은 큰 부자라서 낮에는 경찰들이, 밤에는 반란군들이 많이 찾아와 돈과 이불과 쌀과 먹을 것을 내놓아야 했다. 장동 산골에서 1년을 살고 집을 뜯어와 월평에 다시 짓고 살았다.

 

 

전에 우리 삼대가 살았어 시집 와서, 삼대가. 삼대자네 나 사대 있는 데로 왔어. 조부님이 둘입디다. 함머니는 그 해에 돌아가시고, 봄에 시집 왔는디 열아곱에 시집 왔는디, 함머니는 돌아가시고 할아부지가 두 분이여. 우리 증조함머니는 돌아가시고 나 오든 그해 봄에 돌아가겠다, 돌아가시고. 하네는 두 분이 제겠써. 그래가꼬 전에 그라고 그 냥반들 모시고 살었제. 밥상을, 끄니믄 한 끄니믄 밥을 상 일곱 석을 놔아. 각까이 각까이. 전에는 그러코롬 저금 저금 다 외상을 한께. 외상이여 죄다, 죄다 외상 해. 그랑께 일곱 석을 놓고. 일꾼 서이고, 시집 온께 일꾼들이 서이고. 장동 사고시서 왔는디 징하게 거기서는 참말로 1등 부자였어. 1등 부자였다고 장동면서는. 논밭이 죄다 우리 거. 그라고 일꾼 셋 데리고 그라고 살았어. 그 시쌍을 어쩌고 다 살아났어. 그 조부님 밑에서 다 수확하고 그라고 질쌈을 해도, 우리는 질쌈도 안 하고. 밭이 하다 마난께 동네에서 일봐준 사람들이 순전 우리 집 살대끼 합디다, 순전 살대끼 하고. 저녁이먼 가먼 인자 밥 한 냥판쓱 주고. 밥으로 살았제, 전에는 없는 사람들이, 다. 일을 한 사람들이 딱 아조 시 집이가 우리 집에 삽디다, 일꾼 말고도. 그래가꼬 그 수확을 다 하고 살었제. 그랑께 밥해 묵을 사람도, 내가 인자 처음으로 시집 가논께 인자 우리 함머니가 가운데 함머니가 밥 해묵은 사람 한나 또 세왔써. 하다 거 끄니먼 간풍께. 그래저래 해갖꼬 일꾼 셋 데리고 그 하난 농사 다 짓고 산디. 그 옛날에 인자 또 인공시대에 반란군들이, 그래가꼬 산 속이라고 반란군들이 부자라고 우리 집으로 다 달라들어. 그랑께 저녁이믄 인자 저녁이믄 반란군들이 마당으로 한나 달라들어. 그래가꼬 우리 이불 다 가져가고 시집온 내 이불 다 가져가고. 시 채를 가져갔어, 이불을. 그라고 전에는 시집올 때는 바꾸리 모재비 바꾸리 다 해가꼬 왔제. 거그따 이제 찰밥 해서 퍼주고 순전 그 즛을 하고 살었어. 아조 그란디 인자 아즉이먼 또 인자 장동경찰서에서 인자 또 이장을 불러갖꼬 막 뚜드러, 인자 또 젓겄다고. 그랑께 생전 우리 함머니는 돈봉투를 요로케(두 손을 맞잡으며) 해갖꼬 물팍 밑에다 놓고 살었어. 저녁이먼 물팍 밑에다 놓고 살아. 그래가꼬 해치든 안 했어 반란군들이, 막 아무리 마니 와도 우리집이는 대우를 잘한께 해치든 안 해. 함머니가 봉투를 요렇께 해갖꼬 물팍 밑에 딱 너꼬, 행이라도 새끼들 어차까니. 그래가꼬 따악 반란군 주고. 즈그 해주라는 대로 다 해줬제. 밥 해주라 하믄 밥 해주고, 옷 주라가믄 옷 주고, 이불 주라가믄 이불 주고. 우리 함머니가 보통 함머니가 아녀. 그래가꼬 반란군들이 마당으로 한나쓱 들어서. 그라믄 우리 집서 밥 다해묵고 바꾸리에다 또 퍼가꼬 가고, 산으로 간다고. 그래가꼬 참말로 그런 시상을 어치 안 죽고 살았덩가 몰라, 쩜메쩜메 쩜메 해. 아지게는 아지게는 동 마악 풀어지먼 또 경찰들이 와. 그래가꼬 우리 시 작은 아부지가 순경을 했어. 아 순경을 하자네 이장을 했어, 동네 이장을. 그랑께 인자 이장보텀 막 어플쳐놓고 띠둔디라. 그래 인자 우리 함머니가 잠을 깨부렀어. 둘째 아들인디, 딱 잠을 깨부러 우리 함무니가. 왔따 그래도 그 뒷날은 또 인자 그래도 또 그렇코 돈봉투를 맹그라놓고 돈봉투를 맹그라놓고. 그래갖꼬 우리 함머니 덕으로 자슥들이 까딱없이 잘 살었써라. 하난 자석들이 다 잘 살어. 손자들까장 잘 살어, 손자들까장 다 잘 살어. 그래가꼬 거그 산속이라 거그는 인자 반란군 피한다고 이리 여웠어, 우리 한아부지가. 친정에서도 삼대가 살고 시집을 온께 사대가 제겠고 그랍디다. 그래가꼬 시집 온 동짓달에사 인자 우리 증조한아버지가 도라가겠어. 그래가꼬 그 해 반란군들이, 또 우리 집이 또 성주를 새로 해갖꼬 질 좋아. 그랑께는 반란군들 저녁이먼 인자 웃차다가 인자 모른 놈들이 오먼, 돈봉투 안 가져가고 모른 놈들이 오먼 니 구석지에 불을 질러 인쟈 뭐 삘해가꼬. [한 팔을 높이 들어 흔들며] 그라믄 인자 시 동네가 디림둥, 마임동, 쩌그 저 용상. 그러꼬럼 시 동네가 달라드러 우리 집을 다 껐어. 그래가꼬 그 해 일 년도 나는 거그서 못살고, 일 년도 못살고 동짓달에 그 집을 뜯어가꼬 이 월평으로 이사 왔어라. 봄에 시집 와가꼬 동짓달에 와부렀써, 만날 못살고. 그라고 인자 우리 시아바니는, 시아바니하고 인자 서방님하고는 인자 건산 외가이로 피해 와불고, 건산 우리 외가이로 피해 와불고. 편해 반란군도 없고 순경들도 없고. 시이상 편해 만고에 편해. 조용해. 사구시서는 못 살었었써라우, 반란군들 따문에. 그래가꼬는 지금은 만고에 편하제, 묵고 대학생으로. 그래가꼬 논밭이 만한께 놉을 아무리 댄다고 해도, 새껏도 니아까로 그 놉들이 와서 끄꼬가고. 낮에도 끄고가고 그라고 살었어. 쩌그 어산떡 며느리 친정집가 우리 집서 딱 살어부렀써. 즈그 큰아부지 살었제, 즈그 함머니 우리집이 살었제, 우리 식구여 아조. 시 집 식구가 우리집 식구를 따로 해서 밥 얻어묵을라고. 그래가꼬 저녁이먼 가믄 밥을 한 냥판쓱 줬제, 인자 밥을. 그라먼 그놈 즈그 아즉에 즈그 식구 또 먹고, 또 그 이튼날 또 오고 또 오고 했어. 품싹도 주지라 없는 사람들인디. 쌀도 주고 보리쌀도 주고 그랬제. 우에 껏을 주제 인자. 그라고 인자 또 사부시가치 또 산꼴차기가 쩌어 꼴창에가 시암이 있어갖꼬 그 물을. 친정에서는 생전 부엌 옆에가 시암물 파놓고 산디. 절대 물똥 한 번 안 여봤제. 그랑께 인자 물 여다준 사람이 또 있어. 어산떡 메느리 함머니가 그러고 물을 잘 여다줘. 함머니가 오메오메 물동 안 이고 오믄 못 산디, 그 함머니가 영판 좋소이. 그래가꼬 물을, 우리 집이 온 일만 있으면 즈그 물독으로 길다 우리 집다 비어놓꼬 비어놓꼬. 내가 쌀도 많이 몰래 퍼줬쏘. 즈그 물동이에다 밥도 퍼주고 쌀도 퍼주고. 그로코 에로운 시상을 살었써, 옛날 인공 때는. 그래가꼬 인자 이리 이사와붕께 이러코 편합디다, 예. 글때도 이렇고 편해 머 성가실 맬이 없어, 이리 시집을 와붕께.

- (일제시대 때 처녀들 잡아가고 그랬잖아요. 해방되던 해 몇 살이셨나요.)
내가 열아곱에 시집 왔는께 한 열일곱 살이나 그런 일을 젓겄제. 그란다고 일찌거니 열아곱에 여워부렀제, 우리 한아부지가. 둘이나 동네에서 잽혀간 크내기가 둘이나 있었어. 그래가꼬 사구시가 조용하다고 산꼴창이라 조용하다고 거리 여웠어. 그란디 못 살것습디다. 이리 이사옹께 여그서는 그라고 편해. 읍에 가깝다 해도 저녁이면 또 편하고. 우리 참말로 논 멫 백마지기 값 줬소, 우리 함머니가. 생전 돈봉투를 요만치씩 담아가꼬 요그 물팍 밑엣다가 딱 이라고 앙저겠써. 그래가꼬 막 반란군들이 소리 지르고 마당으로 한나가 들어스믄 들스서믄 인자 봉투를 딱딱 주고. 또 인자 쌀 주라가믄 또 저 울 어무니는, 생전 시어마니란 사람 아퍼가꼬 생전 그란디. 행이라도 메느리 우차까 무서와서 저금 제게 방엣다가 딱 놔두고 나오도 못하게 해, 우리 함무니가. 그래가꼬 제게가 인자 가마니 들고 도가지에 쌀 맘대로 퍼가, 저 반란군들이 맘대로 퍼가, 쌀을.그 당시 인자 우리 집이 두 부자이는 건산으로 피난와불고 우리 함머니 나 자그잔 아그들 그러고 있었제. 우리 함머니 고상다께 해겠써. 그래가꼬 우리 작은아부지도 인자 그 피난군 속에 쩌그 월평으로, 월평 전에 저 평화떡 작은 방으로 이사 왔제. 즈그 식구는 옴막 와부렀써. 우리만 인자 함무니하고 아그들하고만 있었어. 그래가꼬 우리 작은아부지가 서둘러서 우리 얼릉 데려갔제, 집을 뜯어가꼬. 험한 시상도 살었어, 참말로. 험하고 험한 시상도 살어.

 

 

 

 

 

 

 

자료번호 / 06_12_01_MPN_20160906_WSS_0001
제보자(구술자) / 위선심(여, 90세, 월평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