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민란의 두목이 된 보성군수, 고제량

장흥문화원 2017. 9. 12. 09:09

 

 

 

민란의 두목이 된 보성군수, 고제량
▶ 조선시대 철종 때 보성군수 고제량은 한해가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자 부자 양반들에게 곡식을 빼앗아 나눠준다. 하지만 그래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켜 고제량을 두목으로 추대한다.

 

 

저 집은 인자 물론 300년 전에 왔으니까 300년 전에 집을 짓고 살았죠. 살았는데 무산 할아버지라고 있습니다. 고제량이라고. 그 할아버지께서 인자 보성군수를 했어요. 보성군수를 할 때 그때 한해가 들어가지고 보성, 장흥 요쪽으로 전부 한해가 들어가지고 아주 백성들이 굶어 죽으니까. 그때 당시 시골에 인자 그 양반님네들, 그 분들을 데려다가 좀 내놔라, 그래가꼬 전부 구휼을 해야쓸 것 아니냐, 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원체 세도들이 쎄니까 그 보성 안씨들로 해서 그 세도가 쎄니까 전부 거부를 한 거여요. 이 지역 하급관리 정도야 하는 식으로 거부를 해버리니까, 그 할아버지께서 굉장히 성격이 급하고 단호한 성격이라 그냥 뺏어버린 거예요. 그냥 재물을 뺏어서 다 나나줘 버린 거예요. 그랬다가 인자 어느 시기 됐는데 그래도 그 가난이 해결이 안 되니까 난이 일어난 거죠. 긍께 쪼그만 민란이 일어난 거예요. 민란이 일어났는데 그 할아버지를 두목으로 추대를 해 버린 거예요. 추대를 해버리니까 어쩔 수 없이 인자 그렇지 않아도 그 할아버지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양반들이 별로 곱게 보질 안했는데, 추대를 해버리니까 당연히 추대가 되가지고, 추대가 된 다음에 어쩔 수 없이 관군하고 민군하고 전쟁이 일어난 거죠. 그래서 그 때 당시 관군이 와서 저 집을 불살라버립니다. 그 때 당시 집. 지금 현재 있는 집 우에가 있었습니다. 거그 보믄 빈터가 있습니다. 지금도. 거기에서 있을 때 불을 질러서 요쪽에서는 또 민군이 가서 동헌을 불질러버립니다. 그래서 여기 집하고 동헌하고 같이 전체가 불타고 없어져 버립니다. 그 후로 동헌은 지금 장미아파트 세워진 거가 그전에 농중학교, 학교로 사용을 했는데 그 집을 지금은 팔아불고 없던데, 그 때 거그 동헌은 그 집을 지었었고 여기는 요 집을 내려서 지었어요. 원래 집이 올려서는 못 진다네요, 화재가 나면. 그래 내려지었습니다, 지금. 그래서 내려지은 저 집이 100 한 5~60년 정도 지금 전해져 내려오고 있고. 그러고 나서 그 할아버지께서 인자 관군하고 싸웠을 때 아무래도 관군한테 해볼 수가 없죠. 그래서 밀리다가 결국 다 잽히고 해서 올라갑니다. 그 때가 철종 때죠. 인자 올라가서 옥살이를 합니다. 저 할아버지께서 두 번 옥살이를 합니다. 또 다른 일로도 한번 옥살이를 하고 두 번을 했는데, 대원군이 인자 섭정을 하면서 고종 아들을 내세우고 섭정을 하면서 그거 저 할아버지를 풀어줍니다. 풀어주면서 벼슬을 시키는데 이 사람 성질로 봐서 거기다 내려 보내주면 가만 안 두겄거든요. 그래서 쩌어 함경도 무산으로 보내버립니다. “너는 가서 거기 가서 벼슬을 하면서 숨 좀 고르고 있다가 내려와라.” 그라고 보냅니다. 근디 그 대원군하고 너무 절친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생각해서 그렇게 아마 보낸 것 같아요. 그런데 나중에 할아버지께서 건강도 좀 안 좋고 그래서 벼슬을 사양하고 내려 오셔가지고 장성서 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이 다 그리로 가서 또 뒤를 따른다고 했는데, 그러지 마라 그럴 필요 없다, 그라고 돌려보냈는데 그 뒤로 얼마 안 있다가 동학이 일어난 겁니다. 그 때 동학의 그 뿌리, 쪼그만 뿌리들이 그때 참여했던 그 사람들이 동학에 다시 참여를 했던 것 같에요. 그래서 동학의 시초가 되지 않았는가. 아마 그렇게 해서 사학자들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저는 거기까지는 모르겠구요. 근데 아마 그런 것 같아요.

 

 

 

 


자료번호 / 06_12_01_FOT_20161205_KYC_0002
제보자(구술자) / 고영천(남, 69세, 장흥읍 평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