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안양면 29

[안양면] 골치와 은신골, 무지기꼴 계곡물이 합쳐 수문 앞바다로 질게 흐르는 장수(長水)

골치와 은신골, 무지기꼴 계곡물이 합쳐 수문 앞바다로 질게 흐르는 장수(長水) ▶ 장수마을 앞으로는 은신골과 골치, 그리고 무지기꼴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해서 길게 흐른다. 이 물은 수문 앞바다로 흘러들어간다. 그래서 오래 산다고 해서 장수가 아니라 물이 길게 흐른다고 해서 장수다. 어르신들한테 들은 얘기라고는 그 장수라고 이름을 지는 것은. 그 옛날에는 저수지가 없고 하다보니까 여기서 부터서 쩌그 은신골이라고 하는 꼴창이 있어. 꼴창에서 질게 수문 앞바다에까지 내려간다 해서, 물이 질게 내려간다 해서 장수마을이고. 말하자믄 오래 산닥 해서 장수마을이 아니라 이리 물이 질게 내려간닥 해서 장수마을이고. 또 그 골치라고 그 한 계곡이 있고 은신골이라는 계곡이 있고. 또 무지기꼴은 저 신촌마을에서 그 내려간 ..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아름드리 솔숲에서 학들이 뱀을 잡아먹으며 살았던 학송(鶴松)

아름드리 솔숲에서 학들이 뱀을 잡아먹으며 살았던 학송(鶴松) ▶ 어려서 보면 마을 뒷산에 있는 아름드리 솔숲에서 학들이 많이 살았다. 학들은 하얀 뱀도 잡아먹었다. 그래서 학송(鶴松)이라고 부른다. 인자 자세한 내역은 우리도 모르고요. 어르신들한테 얘기를 들어본 바에 의하면은 학송이라는 그 명칭이 학이 많이 살았답니다, 학이. 그래가지고 그전에 인자 내 어려서 보면은 여기가 산이 이런 손에[두 팔을 둥그렇고 넓게 펴서 잡으며] 아람백이 솔이 꽉 찼었어요. 저 그래가지고 거기서 학이, 나 어려서 보면은 학이 많이 엉거 가지고 하얀 뱀도 걍 잡아다 먹고 그냥 거그따가 밑에 떨쳐놓고 그런 것도 있고. 저희 우리 집,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어르신들 말 들어 보면은 구대통 안에서 학이 그 알을 낳아가지고 학이 거..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명지실꼬리 두 개가 들어갈 정도로 깊고 시퍼렀던 비서리 둠벙

명지실꼬리 두 개가 들어갈 정도로 깊고 시퍼렀던 비서리 둠벙 ▶ 마을 앞산에는 비서리 둠벙이 있는데 어찌나 깊었는지 명주 실꼬리 두 개가 들어간다고 했다. 전설에는 비서리 나무가 썩어서 패인 자리가 둠벙이 되었다고 한다. 근께 쩌기[마을 앞 높은 산을 가리키며] 가믄 비슬둠벙이 있어 이승굴이라고 쩌기 들어가면은. 이렇게 둥그렇게 엄청 커요. 그전에는 물이 시퍼라니 엄청 아주 무스와. 그란디 인자 어른들 얘기 들어보먼 머 명지실꼬리가 두 개를 들어가도 땅이 안 닸는 자리 그런 유머가 있었는데. 거가 뭐 비서리 나무가 썩어가지고 패여가지고 거 비슬둠벙이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가꼬 그전에 지금은 이렇게 저수지 막기 전에는 옛날에는 은어도 이짝에 많이 올라오고 그 민물장어가 많이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고기를 잡기 위해 도깨비를 부려서 보를 막은 마천목 장군

고기를 잡기 위해 도깨비를 부려서 보를 막은 마천목 장군 ▶ 마천목 장군은 굉장한 효자였다. 아프신 어머니가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셨는데 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도깨비를 부려서 밤새 보를 막아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지금도 곡성에 가면 도깨비보가 있다. 마천목 장군 할아버지는 회천, 지금 옛날에는 거기가 장흥현이었습니다. 장흥현 안양면이었는데 지금은 보성군 회천면으로 되어요. 회천면 봉강리에 마천목 장군 생가터가 있습니다, 지금도. 생가, 출생하신 그 집터가 지금도 유지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후손이 거기 살고 있는데. 그 위에서 열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서 곡성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곡성 옥과로 이사를 하게 되가지고 거기에서 성장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성장을 해가지고 난중에 출사를 하게..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갈치 뱃속에서 사람 손톱이 나오던 시절

갈치 뱃속에서 사람 손톱이 나오던 시절 ▶ 한국전쟁 때 마을이 산속에 있어 밤이면 산사람들이 내려와서 여자들은 고추장, 된장을 퍼가고 남자들은 톱과 곡괭이를 가져갔다. 많은 사람들을 바다에 빠트려 죽였기 때문에 마을 샘에서 아낙들이 갈치 배를 따면 사람 손톱이 나왔다. 6·25는 삽으로 찍어갖고 저 수댓골이라고 수양 뒤에 꼴창, 거그서 삽으로 찍어불고. 그런 사람, 바로 이 동네 두 형제가 자기 큰형님을 바지게로 짊어지고 갔어, 나 어려서 보면. 그래서 무엇인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통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란디. 나중에 크면서 알고 보니까 삽으로 찍어서 주게, 인공 때는. 경찰들이 자응 경찰이 완도, 청산까지 내빼부렀거든, 6·25 때는. 그란께 우리는 그것도 몰랐제마는 나중에사 알았제. 경찰서가 거..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큰물을 피하려 지은 마을이름 월암(月岩), 고당(高堂), 주교(舟橋), 여암(餘岩)

큰물을 피하려 지은 마을이름 월암(月岩), 고당(高堂), 주교(舟橋), 여암(餘岩) ▶ 큰물이 지면 월암은 달바우로 올라가면 살고, 고당은 집이 높아 해를 입지 않는다. 배가 다리를 건너니 주교고 큰물이 지면 여암은 바위만 남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기 보인 저수지가 있는디, 저수지 잠깐 말잔 드릴라고. 이 저수지를 현재 막기로는 아 1962년도에 둠벙이 되았는디, 그 전에 일제강점기 때 막을라고 완전히 터까정 따듬어서 시작을 했어. 그랬는디 그후로 머시 안 맞어가지고 해방이 되고 하닌까는 못 막고 계속 있다가 인자 저수지가 필요하거든. 인자 정부도 나라가 안정이 되고 해방 후로. 하닌까 그래서 물이 잘락고 흉년이 들면 물이 없고. 그닌까 그때 에 1962년도 준공이 되았는디. 그 후로 막..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장흥에서 두 번째로 생긴 백 년 된 지천교회

장흥에서 두 번째로 생긴 백 년 된 지천교회 ▶ 지천교회는 장흥중앙교회 다음으로 생긴 오래된 교회다. 선교사들이 들어와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쳤다. 한국전쟁 인공 시절 폐쇄된 교회에서 인민군 노래도 배웠다. 우리 부락이 기독교 교회 이거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어. 장흥중앙교회 다음으로 설립이 됐다 그래. 그랑께 요것이 한 백 년 전이라고 봐야돼. 아 그랑께 장흥중앙교회 다음으로 지천교회라고 그라드라고. 그랑께 교회를 안 댕긴께 그건 정확히 연도를 잘 모르제. 그건 유구한 역사라고 내가 인자 생각을 해. 인자 누구 오고 쁘리핑 하믄 내가 교회를 내가 추켜들제 인자. 그 당시에 우리 어려서 보믄 선교사들이 또 와서 주둔해갖고 거 말하자먼 전도 활동을 하고, 선교사들이. 인자 그런 것을 내가 잘 알아, 그런 것..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한 마을에서 서로 죽이고 살렸던 한국전쟁

한 마을에서 서로 죽이고 살렸던 한국전쟁 ▶ 한국전쟁이 나던 해 초등학교 4학년 이었다. 인민군이 내려오기 전 지방 폭도들이 마을사람 여럿을 잡아다 생매장해버렸다. 그러자 수복된 후 학도병들이 마을로 들어와 좌익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잡아다 바닷가에서 곡괭이로 때려 죽였다. 그때 우리가 초등학교 4학년 이었어. 그라닌까 그때 우리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닌까 여름에 인자 6·25, 인자 모 심어놓고 상댕히 자라고 그랬을 땐데. 인자 그 인민군들이 쳐들어온다 그란디 실지 인민군들은 없었어, 안 왔어. 지방 폭도들이여 인자. 그란디 우리가 그 가마니떼기 같은 거, 포대 같은 거 갖고 쩌그 들판 요런 데로 안보이게. 그런 데를 가서 내가 잠자고 들오고 아침이먼. 인자 만약에 와갖고 잡어갔까 무선께. - (초등학교..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곤호리 고기로 젓갈을 만들어 팔았던 곤호리 부대, 지천마을 사람들

곤호리 고기로 젓갈을 만들어 팔았던 곤호리 부대, 지천마을 사람들 ▶ 1938년 간척사업을 하기 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바다여서 거문도에서 고기가 들어왔다. 거문도에서 들어온 곤호리로 젓갈을 만들어 팔았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을 곤호리부대라고 불렀다. 그랑께 1938년경에 그 일본놈들이 간척사업을 했어. 1938년에 그 왜놈들이 간척사업을 해가지고. 그랑께 우리 부락까지 바다여. 그라다봉께 인자 바다가 없어지고 주업이 인자 농토로 변해부렀제, 앞이. 그라기 이전에는 거문도라는 그 섬, 우리하고 교역을 하다시피, 그 고기 이런 것을 갖고와서 우리 부락에서 팔고. 그랑께 주업이 말하자면 어업이었어, 그 당시에. 바다가 인자 우리 부락까지 대있으닌까. 그랑께 섬은 거문도 섬이고. 그래가지고 인자 우리 부락에서 그렇..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구렁이가 집을 떠나자 몰락한 천석궁 부자

구렁이가 집을 떠나자 몰락한 천석궁 부자 ▶ 천석궁 부자가 자기 땅을 내놓지 않아 길을 내려고 산을 파헤치자 구렁이가 피를 흘리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천석궁 부자 집에서도 수많은 구렁이가 집을 떠났는데 이후 가세가 기울었다. 우리 부락에 그 천석궁 부자가 있었어, 한나가. 그런디 왜 그 사람을 내가 인자 모멸감을 느끼냐 그라믄. 우리 부락 앞으로 이 풍암서 요리 지천으로 돌아서 용산으로 빠지께끔 돼야있어. 지적도 상으로. 그라고 지금도 그렇게 지도가 돼 있는디. 자기 땅이여, 천석을 받았은께, 맨 즈그 땅이여. 그때는 해변이닌까 육지가 조금 있는 것은 다 자기 땅이여. 그랑께 우리 부락사람들이 다 종이여, 자기 종. 그랑께 소작을 한다고 봐야제, 그 사람 꺼를. 그래서 그 사람이 왜 망했느냐, 인자..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해창곡식창고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

해창곡식창고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 ▶ 해창에는 창고가 두 개 있었는데 한국전쟁이 나자 양곡을 다 쟁여놓고 지켰다. 하지만 반란군들이 쳐 들어와서 아버지와 친구, 그리고 청년까지 세 사람이 학살당했다. 지금은 남해고속도로가 생겨서 선박이 운영을 안 하니까 거의 폐촌이 되어 버렸다. 창고 두 개였었어요, 원래는. 그런데 이 6·25 사변 후로 일사후퇴 때. 51년도 1월 8일 날이 일사후툅니다. 압록강까지 갔다가 뒤에 후퇴할 띡에. 그랑께 공산당이 밀려오니께 다시 양곡을 다아 쟁에놨어요, 한나도 갖다 안 뺏길라고. 그런디 음력으로는 섣달 스무날인데 양력으로는 1월 며친 날, 확실히는 모르겄습니다마는 이 공산당이 여그를 방어할라고 쳐들어왔어요. 그란디 그때 안양파출소에서 나오고 학생도, 나도 그때 학생이었습니..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뱀장어 잡는 법을 새롭게 개발했던 고흥 사람

뱀장어 잡는 법을 새롭게 개발했던 고흥 사람 ▶ 장흥에서 일본 사람들이 제일 먼저 들어온 데가 해창이다. 해창 앞 바다에는 실뱀장어가 아주 많았으나 먹을 줄을 몰라 팔지 못했다. 어머니가 일본 사람인 고흥 사람이 와서 카바이트 가스등을 나눠 줘가지고 아주 쉽게 뱀장어를 잡을 수 있었다. 여가 일제 때 회진도 있고 죽청, 수문도 있는디 일본 사람들 제일 몬자 대여섯 가구가 우리 마을로 들어왔어요 여가. 그람 뭐이냐면 이 마을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실뱀장어가 만안 뎁니다. 그거이 많기 따문에 배가 이로끄롬 쪼그만하니 납작한 배가 이런 식으로 된, 요로끔 납작하니 되아가지고 갈쿠 맨이로 여기따 대고 이러케 뜨먼 뱀장어가 올라온 거야. 그럭큼 많에 써거 빠졌어. 그라믄 지금으로부터 한 50년 전에까, 50년..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완도 금당도에서도 고기 잡아 장 보러 왔던 해창포구

완도 금당도에서도 고기 잡아 장 보러 왔던 해창포구 ▶ 해창은 배가 주요 교통수단이던 한 때 멀리 완도 금당도 뿐 아니라 관산 죽청에서도 드나들던 활발한 포구였다. 짐을 실은 트럭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장흥 장을 보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농어, 숭어 등 물고기 천지였다. 그러먼 인제 보면은 그때 당시 머 십 원도 받었고요. 그러믄 여기서 가먼은 풍길, 풍길 그라믄 두암 풍길 이러케 있거든요. 그라고 그 옆에 가먼 남포, 산정 이. 이제 또 여 상발 이, 여기 가먼 또 죽청. 그라먼 이 그때 보면은 요. 인제 죽청 같은 데서 관산읍으로 나가기가 멀고 그러닌까 산길을 타나서. 그라고 여기는 여기 해창은, 왜 이리 오느냐 그 사람들이 와요. 그러믄 장날이면은 배가 차 같이 다니거든요. 화물차가 짐을 실고..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정월 초사흘에 모시는 당제

정월 초사흘에 모시는 당제 ▶ 해창은 예전부터 당제를 모셔왔다. 마을 당집과 당산나무, 그리고 선창과 마을 곳곳에서 모신다. 어느 땐가 삼, 사백년 된 당산나무가 죽어가서 다시 심었는데 지금은 아름드리가 되었다. 지금 그 해창 보믄 당제라고 있거든요, 당제가 있는데. 거기 보면은 에 비석이, 부사들. 거 쇠로 돼있고 쇠 있고 또 석비가 두 개 있고 그 쇠로 된 비석이 두 개 있어. 부사들이, 아마 행적비 같에요. 이 쇠 주물로 해논 것은 아마 일제강점기 당시 그렇게 해서 일본놈들이 했지 않은가. 나머지 두 명은, 그란께 탁본이 될랑가 모르겠습니다마는 말이 이렇게 훼손되부렀어요. 형체는 남아있어요. 형체는 남아있고. 거기는 그 저희들이 당제라고 해가지고 매년 정월 1월 3일이믄 당제를 모셔요. 근데 그 당..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낭구치, 목단(木端)에서 목단(牧丹)으로 바꾼 마을 훈장님들

낭구치, 목단(木端)에서 목단(牧丹)으로 바꾼 마을 훈장님들 ▶ 마을에는 대대로 훌륭한 훈장 선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어르신들이 나무 木, 끝 端을 쓰던 마을 이름을 牧丹으로 고치셨다. 목단이란 마을은 딴디서 부터 여그를 낭구치라고 이 사투리로 그런 말을 했었는디,이 나무 [목]자 끝 [단]짜를 해가지고 목단마을이라고 했었는디. 중년에 우리 마을에 이 어르신들이 서재를 많이 운영하고 그렇게 모도 유식한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었는디. 그 어르신들이 나무 [목]자 끝 [단]짜를 쓴 것보다는 먹일 [목]자 붉을 [단]자를 쓴 것이 더 낫것다 해가지고는 그 글짜를 바깠답니다. 그래서 지금은 현재는 먹일 [목]자 붉을 [단]짜를 쓰고 있습니다. 서당은 그 맨 처음에 그 냥반들이 쩌어 상금서 요리 이사와가지고 산..

안양면 2017.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