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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소년뱃사공

장흥문화원 2017. 9. 12. 09:47

 

 

 

소년뱃사공
▶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1894년 11월, 장흥 석대들에서는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곳에서 패한 동학군들이 자울재를 넘어 회진쪽으로 와 당시 섬이었던 덕도로 숨어들었다. 당시 작은 섬이었던 그곳은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로 패퇴한 5~600명 동학군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이 15세의 소년뱃사공, 윤성도가 숨어있던 동학군들을 밤 어둠을 틈 타, 1~20명씩 인근 고금, 약산, 금일, 금당 등 가까운 인근 섬으로 모두 피신시켜서 단 한명도 죽은 이가 없게 했다는 이야기다.

 

 

할아버지 성함은 윤자 성자 도, 호적상 그렇게도 불렀고, 우리 부락에서는 윤자 성자 범자로, 이렇게도 불렀고, 우리 족보상에는 윤자 성자 호자로, 이렇게 이름이 3개로 불러왔어요. 할아버지가 제가 어렸을 때 국민학교 다닐 때, 그때 할아버지하고 같이 자면서 옛날 얘기를 쭈욱 많이 들려주셨는데, 그때 얘기가 쩌기 장흥 석대들에서 패전을 하고, 그 쫓겨서 온 것이 회진나루를 건너 갖고 덕도로 피신을 와 갖고, 피란골에서 은거를 한 5~600명, 그런 정도 피신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 인자 피난골을 으째 피란골이라 그랬냐 하면, 그 전에도 관군들이나 순사들이 잡으러 오면은 회진에서 나루를 건너와야 덕도기, 섬이기 때문에 건너올 수가 있는데, 또 그 사공이 큰 역할을 해줬어요. 사공보고 배로 건너가자고 찾으면은 이렇게 자기가 건너가자고 찾은 줄을 알면서도 주막으로 이렇게 피해불고, 그래갖고 숨어서 술 한잔 들고 이라고 있으면서 옆에 사람한테 연락을 해갖고, 그때 이쪽하고 어떠한 연락이 됐냐 하면, 저쪽 회진쪽에서 깃발을 흔든다든지 글 안하면 연기를 피운다든지, 하면은 아 순사들이나 관군들이 지금 덕도를 들올락 하고 있구나, 그러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전부 피신을 한 곳이 피란골이라고 그 피란골이 어떻게 생겼냐 그러면, 이 소나무가 우리가 어려서 가서 보면은 대나무같이 이렇게 가느랗게, 이렇게 된 소나무가 30척 이상 되게 이렇게 쪽쪽 대나무 마냥 이렇게 쪽쪽 뻣어 있어요. 그란디 거가 사람도 포로시 끼어다닐 수 있게 이렇게 빽빽하니 들어서 갖고 있어. 그래 그가 그렇게 나무가 그렇게 울창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숨어있으면 이렇게 좋은 날씨에도 이상하게 안개가 낀다든지. 비가 이렇게 나린다든지, 이상하니 그런 조화가 있어 갖고, 그래서 거가 피신을 하고 그런디, 그래서 그곳에 와서 피신을 할라면 그리 많이 피신을 해요. 그래서 피란골 피란골 그렇게 불렀고, 또 할아버지는 이렇게 큰 풍선을, 지금 같으면 큰 화물선, 짐을 실어 날린 그런 큰 배를, 돛배를 운영을 했는데, 할아버지는 이 저 바람에 대해서 잘 알아요. 가을에는 우리가 보면은 새복참에는 높바람이 붑니다. 그래 계절풍이락 해갖고, 가을에는 높바람이 꼭 불고, 또 여름에는 오후 한 2시 정도 되면은 쩌그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와요. 그러면 그 남풍은 마파람이라고 그런데, 그 바람이 불어와. 그런디 할아버지는 그 계절풍에 대해서 잘 알아. 우리가 낚시를 가 갖고 같이 이렇게, 제가 토요일날이면 저녁에 이렇게 여기서 오후에 늦게 낚시를 떠나요. 그라면 가서 바다에서 자고, 그라고 낚시를 그 뒷날까지 하고, 그라고 그 뒷날까지 하고 인자 돌아오는디, 한 12시 경 넘어서 이라고 딱 보고 있다가 남쪽에서 이렇게 바람이 불어온다, 남풍이 불어 온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바다를 이렇게 보면은 바람이 오는 것을 물결이 이렇게 치기 때문에 파르스르라니 그렇게 보여요. 아 그 바람이 온다, 그러면 이 바람을 이용을 해서 여기 선창을 들어와야 돼. 그래야 노를 안 젓고 바람을 이용해서 들올 수가 있어. 그러니까 아야, 빨리 지금 채비를 해라. 그래갖고 들오고. 또 이렇게 바다에 가서 낚시를 하다가, 이렇게 하늘을 쳐다보고 이라고 있다가, 아야 지금 말이야 곧 비가 오것다. 그러니까 빨리 챙겨갖고 가자. 그라니 집에 오기 전에 비가 와. 그래 할아버지가 일기를 잘 보고, 또 한나는 그때만 해도 시계들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이 달을 보면은 아 오늘은 며칫날인께 달이 어느 정도 떠 갖고 있구나, 그라믄 밤중이다. 아 새복녁이 다 돼 가구나, 아 초저녁이다, 이런 것을 직감적으로 달만 보고도 그냥 저녁에 어느 땐가를 구별을 해요. 그래 달 갖고 그래 구별도 하고…. 또 한나는 아침에 첫닭이, 닭이 울잖아요, 그라믄 닭은 네시 다섯시 이때 되면 초저녁 닭이 울기 때문에 아 지금 말이야 아침 새복닭이 울구나, 그라믄 새복이 다 됐구나, 이럴게 해서 직감적으로 때와 시간과 이런 것을 직감을 그렇게 하고. 석대들에서 패전을 해갖고 쩌기 피란골에 그렇게 숨어 있는 동학군들을 할아버지가 한 12이면 10분, 20명이면 20명, 이렇게 해서 쩌기 죽도로 보내라, 그라고 연락을 하면 또 부락에서 그분들을 인솔을 해갖고 그렇게 델꼬 오면은 할아버지는 금당이나 금일이나 쩌기 청산이나 약산이나, 이런데 지리를 잘 알아요. 우리들이 가서 본다 그러면은 언제들이 그 물이 썰물에도 배가 들어가서 접안할 수 있는, 그렇게 물이 깊어.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어따 거시기를 대도 그 배가 이상 없이 되것구나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곳을 이용을 해서 시간과 바람과 그런 것을 이용해서 피신 시키고 피신 시키고 해갖고 그 5~600명 동학군들을 한사람도 낙오를 안 시키고 무사히 하여튼 섬으로 그렇게 피신을 시켰어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그렇게 피신을 시키고도 저희들이 어렸을 때 본다 그러면, 이 육지에 일은 전혀 관심이 없어. 또 말도 그렇게 자주 안 해. 그러면 우리는 그런 것이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만 생각을 했고, 항시 아침밥 자시면 낚시대 들고 메고 하여튼 낚시 채비 하고, 그라고 바다에 가서 살아요. 바다에 안 나간 날은 비오는 날, 글 안 하면 추운 날. 겨울에. 제가 봐서는 일년 중 한달이나 그렇게 될까 말까 해. 날이 비가 으슬거리가 오면은 바다에 나가요. 그러면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이 없었단 말이요. 그러면 지금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으째 그렇게 말씀이 없었고, 바다를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할아버지는 그때 그 충격 때문에 가급적이면 사람들을 피해서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있을라고 하는, 그런 그 정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바다를 밤나 나댕기고 육지에서는 안 살고 그랬지 않느냐 지금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고 생각을 해보며는 그런 것 같아요.
- (할아버지에게서 언제 그런 얘기를 들으셨는지….)
초등학교 다닐 때여. 내가 국민학교를 일제 때라, 그때는 덕도국민학굔데, 아무리 우리가 책을 다 읽고 산수를 어느 정도 해도 안 받아줘요. 한 클라스밲에 안 받아줘. 그런데, 여기가 잠재돼 갖고 있는 아그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래갖고 학교를 들어갈라고 해도 들어갈 수가 없어. 즈그들이 선별을 해갖고 이 아이는 받아들여야 쓰것다 하면은 받아들이는 거여. 해방 돼갖고 이렇게 학생들을 모집을 하니까 1개 클라스는 벌써 한 클라스는 됐는데, 2개 클라스를 더 뽑은 거야. 60명씩 120명을 뽑아. 그래도 학생 수가 있어. 그런다 그러면은 일제 때 얼마나 하여튼 학생들을 그렇게 제지를 하고, 그 한 클라스밖에 안 받었기 때문에, 학교를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냐 말이여. 해 학교 못 다닌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일제 때 어렵게 참 또 먹지도 못하고, 먹을 것이 없어 갖고 굶주리고 참 그 못 먹어서 붓어서 이렇게 부기를, 부어 있는 사람들도 많이 오고. 그래도 우리 부락은 그 때 대덕면에서는 그때 대덕면이니까, 제2차로 잘산 부락이다, 그렇게 소문이 나 갖고 있어요. 왜 그랬냐 그러면 이 앞에 농장을 일제 때 이세옥씨라고 일제 말엽에… 하여튼 부산으로 피신 할 때 갱생원장, 감사원장까지 하신 분이여. 그란디 그분이 면장을 하면서 그래 원을 막었어. 저 앞에 원을. 그래 농토가 생기니까 대덕 도촌이 경지면적이 제일 많하고, 답이. 그라고 장산이 젤 많해. 그러니까 장산이 쪼끔 더 딴 부락보다는 더 잘 살았지. 그러니까 고기 같은 것 잡어 갖고 이고 요리 팔로 많이 왔어요. 그래 인자 이렇게 막 부어있는 사람들이 밥 얻으러 오고. 그래 밥 먹을 수 있는 사람도 밥을 제대로 못 먹어. 그렇게 달라드니까. 미안해서도 못 먹지. 먹고 싶어도 그렇게 일제 때 어려웁게 다 살었어.

 

 

 

 

 

 

 

 

                                                                              소년뱃사공 / 그림 조연희

 

 

 

 

                                                                                                      故 윤성도 옹

 

 

 

 

 

 

자료번호 / 06_12_10_FOT_20161125_YBC_0001
제보자(구술자) / 윤병추(남, 84세, 회진면 장산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