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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문림편] 백광홍의 관서별곡과 정철의 관동별곡

장흥문화원 2017. 9. 7. 09:31

 

 

 

백광홍의 관서별곡과 정철의 관동별곡
▶ 정철은 백광훈과 친구 사이라 기산에 자주 왔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백광홍의 관서별곡을 접하게 되었다. 한편 백광홍은 장흥으로 귀양 온 신잠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한다. 이후 36살에 요절하기 전 백광홍은 관서별곡을 쓰고 이에 착안해서 정철은 관동별곡을 쓴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과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과는 아주 절친한 친구였어요. 기봉 백광홍(岐峰 白光弘)과는 14살 차이가 나요. 그런데 제가 아까 정여립의 난을 얘기했는데 송강 정철은 몰락한 경기도 양주 쪽 양반이야 잉. 면앙정가(俛仰亭歌)를 쓴 송순(宋純)이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조선시대에 정승을 지내고 낙향해가지고 담양에서 살았던 분이여. 면앙정가, 면앙정을 지어놓고 거기서 면앙정가를 짓고 낮잠을 자는데, 그 밑에 담양에 보가 있대요. 꿈에 오수를 즐겼는데 꿈에 푸른 용이 거기서 후두둑 거리는 것을 꿈을 뀌었다고 그래요. 그래 종을 시켜가지고 거기 좀 가봐라 뭐가 있는가, 그랬더니 18살 묵은 청년이 목욕을 하고 있드라는 거 아냐. 그래 데려와서 그 뿌리를 물어보니까 양반의 후손이거든. 그때까지는 천자문도 제대로 못띠었더라고 그러대. 그래서 송순이 제자를 삼어가지고 10년 동안 갈쳐. 그러고 자기 손자사위를 삼아. 그래서 호남에 와서 그 정말 그 머슴처럼 굴러다닌 사람이 송순을 만나가지고 학문을 접하게 됐고, 호남의 학자들하고 교류를 해요. 그래가지고 옥봉하고도 친해요. 그래가지고 기산을 자주 왔어. 자기가 벼슬길 나가기 전에. 그 옥봉 백광훈하고 친하니까. 14살이 어리니까, 기봉이 35살에 요절하시고 34살에 관서별곡 기행가사를 썼으니까 잉. 아, 이 문집을, 요새로 말하면 일기장을 본거야. 거기 보니까 관서별곡도 있고 그래, 쩌어 기봉의 문집에. 그러니까 그냥 흠뻑 반해 가지고 송강이 기봉 백광홍한테 편지를 보내요. “형님 너무너무 글이 좋습니다. 나 반했습니다.” 요새로 말하면. 편지로 보낸 그 내용이 기봉의 문집에 있어버려. 근데 정씨들 문집에서는 싸악 없애버렸어. 다 빼뿌렀어. 근데 인자 35살에 요절을 하시니까, 25년 후에 벼슬길에 나아가서 송강이 25년 후에 그대로 관서별곡을 본 따가지고 관동별곡을 썼다는 거 아니여.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관동별곡이 가장 매끄러운 문학이었거든. 가장 매끄러운 문학이었단 말이여. 그럼 관서별곡과 관동별곡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 우리 국문학계에서. 그 이유를 한번 따져보잔 말이야. 그 시 한수가 왜 그렇게 중요하냐. 우리의 고전문학은 시조여, 시조. 시조문학이었다 이 말이여. 시조나 을프고 했던 양반들이 소설로 이어지는 중간 가교 역할이 기행가사야. 그 최초의 우리 조선 땅에서 기행가사를 기봉 백광홍이 관서별곡으로 표현했다는 거여. “어명을 받자옵고 행장을 다사리니 칼 하나 뿐이로다.” 칼을, 독일의 구텐바르크 보다도 약 뭐 200년 앞서분다대. 그라믄 그 붓을 칼로 표현한 거야. “귀심이 빠르거니 고향을 생각하랴.” 고향에를 한번 다녀서 가고 싶은데 내가 임금의 어명으로 국가의 일을 보는 사람이 고향생각을 할 수가 있냐. 그러고 인제 임진각에 배 건너 뭐 가다보니까 “개성은 고국이라.” 어 임제(林悌)가 불렀던 뭐 했던 것처럼 지형을 지나면서 지형에 따라서 역사에 얽힌 이야기를 대목대목 을픈 것이 기행가사에요. 관서별곡이에요. 뭐 임제는 그렇게 표현했죠. “인걸은 간데없고 산천은 의고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했듯이 “500년 도읍지를 필마로 드러서니 인걸은 간데없고 산천은 그대로네.” 그런 식으로 역사의 마디마디를 다 을퍼서 함경도 함흥까지를 을퍼 내려온 기행가산데, 그 전에는 그런 기행가사를 쓴 사람이 없었죠. 그럼 기봉은 천재냐. 난 아니다 고 봐요. 기봉 같은 그런 학문의 눈을, 학의 눈을 갖게 해준 사람이 누구냐. 남계 김윤(南溪 金胤) 이라고 하는 양반이 그 장흥 우리 팔문장이 나올 수 있도록 밑거름을 논 훈장이야. 남계 김윤은 기봉의 외사춘 형이야. 외갓동네니까. 남계 김윤이 서당을 열어가지고 자기 8, 7제자들을, 아들까지를 갈쳐. 그래 전부 진사에 합격시킨 뒤에 60살에 가서 마지막에 과거시험 봐가꼬 훈장이 진사가 됐대. 대단한 열정을 가진 훈장이죠 잉. 그래서 한사람의 영향이라는 것이 훌륭한 제자들을 낳게 했다. 근데 그 남계가 가르치다 보니까 기봉이 너무나도 머리가 잘 돌아가고 영리한 거야. 근게 우리 장흥의 복이죠.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선생도 장흥으로 오셔가지고 조대기(釣臺記)를 썼지만. 지금 문화원 조대기 번역했잖아요. 더 우리 장흥이 강진 뭐 다산 정약용 선생, 뭐 뭐 그보다도 엄청난 게, 영천 신잠(靈川 申潛) 선생 길을 앞으로 더 발굴해서 더 펴 나가야돼요. 유배문학이. 영천 신잠이 누구냐면 신숙주의 증손자야. 영천 신잠이 장흥으로 귀양을 와가지고 17년 8개월, 약 18년 동안을 귀양살이를 했어. 그럼 왜 그 양반은 장흥으로 귀향을 왔냐. 그 화순 능주에서 사약 받고 돌아가신 애우가(愛憂歌)를 진, 기묘사화에 연루된 응, 여 그 양반 이름이 누구야. 양평손이 이렇게 나중에 묘 묻어주고 한, 조광조(趙光祖), 조광조. 조광조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가 되가지고 영천 신잠 선생이 28살 젊은 나이에 장흥으로 귀양을 와요. 그래가지고 읍사무소에서 신흥사의 시누대 밭에서 18년을 지냈다고 하니까 그 학자가 장흥으로 와가지고. 신숙주는 6개 국어를 했던 사람이니까 잉, 그 증손자니까 머리가 좋았겠죠. 과거에 급제했던 사람이고. “장흥서 내 허송세월을 할 수 없지 않냐.” 최근에 발견된 게 그 양반이 관산록(冠山錄) 상, 중, 한데 지금 중권은 아직 발견을 못했고. 우리 문화원에서 상권과 하권을 일부 번역 했죠. 거기에 보니까 억불산 부암(婦巖 며느리바위), 부춘정, 보림사. 우리 장흥에 유명한 지역은 전부 다 들어있어. 그분이 장흥 소위 사립학교인 이 서원에서 공부한 사람들, 훌륭한 사람들. 향교는 그때 국립학교니까 대학이니까, 데려다가 제자로 삼아가지고 갈쳤어. 그중에 대표적인 제자가 기봉 백광홍이야. 그분이 장흥서 갈친 거야. 제자로 삼아가지고. 임분(林賁)도 갈쳤고 남계 김윤도 갈쳤는데 남계 김윤 선생이 기봉을 추천한 거야. 그래가지고 기봉이 그 분 밑에서 자알 배워가지고, 나중에 사면복권이 되가지고 태인현감으로 간다고. 그 제자를 데리고 갔어, 기봉을. 얼마나 머리가 좋고 그랬으먼 사랑스러워 데리고 가가지고 학자들을 다 만나게 해줬어. 그래가지고 서울로 갈 때 또 데리고 가. 이율곡(李栗谷)도 만나게 해주고. 나중에 영남관찰사로 갈 때 또 데리고 가. 그래서 전부 요새 서울대학교 학맥을 맺듯이 제자를 위해서 학맥을 다 이어줬어. 영천 신잠이 그런 훌륭한 인물이 나오게끔 했다. 우리 장흥이 참 불행한 것인지. 그 양반이 60살 정도만 살았드라면, 60살 정도만 살았드라면 엄청난 학문의 장을 폈을텐데. 38, 35살에 요절을 하셔버리므로 해서. 아 그래도 그 자료들이 지금 많이 있어요. 기봉 집에. 그게 국문학계에 이제 빛을 봅니다. 아 그래서 그걸 뽄따서 정 송강은 그걸 관동별곡을 짓고 사미인곡도 짓고. 장르가 여덟 문장으로 해서 다 그대로 뽄땄다고 그러잖아요. 우리들이 몽맹했던 거죠. 그 동안에 그런 훌륭한 학문을 빛내지 못했으니까.

 

 

 

 

 

 

기봉집

 

 

 

자료번호 / 06_12_05_FOT_20161201_BKC_0003
제보자(구술자) / 백광철(남, 63세, 안양면 기산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