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장흥읍

[장흥읍] 문화당 서점에서 일어난 일

장흥문화원 2017. 9. 14. 10:22

 

 

 

문화당 서점에서 일어난 일
▶ 서점을 하다보면 책도둑이 많았다. 한번은 유치까지 책도둑(학생)을 잡으러 갔다가 그냥 돌아온 일도 있었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주로 학교선생님들이 단골로 많이 오셔서 사랑방 역할도 했다. 한때는 장흥 10개 읍면에 서점이 모두 있어서 책을 보급했고 심지어 보성, 강진, 영암, 금당, 금일도까지 가마니로 책을 싸 새내끼로 묶어서 지나는 버스로 배달했다.

 

 

6·25때 아버님은 아마 6·25전에 서울을 가셨는가는 모르겠는데 전쟁 중에도 학교가 운영이 되고 교과서가 보급되고 그랬는데. 6·25전쟁 때는 일시적으로 대구 쪽으로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가 이전을 했고, 보급을 할 때는 부산에서 배로 장흥 수문포로 왔다고 그래요. 그래서 수문포에서 책을 가져오시기도 하셨고 그런 와중에 다른 책들을 구할 때는 서울까지 가셔야 되는 고초가 있으셨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오히려 육로보다는 부산에서 배로 오는 게 의외로 빨랐던 것이 6·25전쟁 중에 그런 교육현장의 인연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시에 인제 장흥 안양면 수문포가 꽤나 교류가 많았던, 물동량이 많았던 포구이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런 일이 실지로 있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서점을 하면서 인제 우선 제가 경험했던 것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를 하도록 하고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제. 원래 현재 이 건물 있기 전 서점은 기와집이었어요, 조금 허름한 기와집. 그래서 전면이 서점하고 그 옆에는 양복점도 있었고, 가방점도 있었고 아주 초기에는 서울상회라는 그 과자쩜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유리창문이었는데 새벽에 통금이 있을 때라 4시 넘으면 사람들이 오고 가는데 새벽에 문을 뚜드려서 열어보니까, 한자 하나가 다툼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그 새벽에 옥편을 꼭 봐야 되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서 옥편을 봤더니 한 명은 울고, 엄청 큰 내기를 했던 모양입니다. 한 명은 웃으면서 이겼다고 그래서 그런 것도 서점하는 입장에서는 에피소드 같지만은 또 나름대로 기쁜 일이셨겠죠. 또 그런 일만 있느냐면 한참 학생 수가 많고 그럴 때는 문제가 간혹 책을 이제 훔쳐가는 일도 많았죠. 그래서 신학기가 되면 온 식구들이 함께 책을 파는 일이 허다했는데 그렇더라도 책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많죠. 저도 중학교 때 내 반이 내가 서점 아들인 줄 모르고 책을 훔쳐왔다는 내 친구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시에는 기술과목은 남자, 남학생, 또 가정은 여학생들이 보는 책인데 바삐 훔쳐가다 보니까 남학생이 가정 참고서를 훔쳐가가지고 또 담대하게 바꾸러 온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도 인제 추궁을 하니까 책을 놓고 도망가는 일도 있었고. 또 어떤 경우는 책이 한권인 줄 알았는데 뭉치다 보니까 기왕에 훔쳐갈 거 뭉치째 훔쳐가서 헌책방에 판매를 하려다가 또 이렇게 들킨 적도 있었고. 자꾸 인제 훔친 이야기만 하는데 제가 겪은 걸로는 이제 장기간 책을 그렇게 보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까 이렇게 와서 훔쳐가는 사람이 있어서 아버님께서 한번은 저를 그 학생 집으로 보냈어요. 지금 유치 어딘데. 그런데 유치까지 갔어도 제가 그 집은 차마 못 들어가겄드라고요. 그래서 유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버스로 바로 그 차 타고 돌아왔더니 아버님께서는, 너는 집에를 못 들어갔을 것이다, 그라고 마시드라고요. 그런 일도 있었는데, 그런 일은 그 당시도 심각한 일은 아니고 지금 생각해도 서점이 겪는 에피소드로 여겨집니다. 그런 일은 실은 비일비재했으니까요. 또 서점이 가장 무서운 게 물하고 불이예요. 그런데 인제 어느 해인가는 엄청난 비가 와가지고 교과서가 물에 잠겼어요. 그래서 그 교과서를 전부 우리 탐진강 아래다, 탐진강이 그 때는 전부 굵은 자갈로 굵은 돌로 다 돼있었는데 저희 식구뿐 아니고 주변사람들 모두 탐진강 전체에 책들을 다 말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책이 다 보급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에 교과서 보급을 대구 쪽에서 했던 것으로, 저 어릴 땐데 기억을 해요.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책을 모아서 교과서니까 그래서 보내서, 당시에는 어떤 책이던지 영산포역으로 기차로 배달돼서 영산포에서 화물로 장흥까지 오던 시댄데 장흥에서 용달차로, 트럭으로 영산포역에 가서 여기저기 온 교과서를 실어가지고 와서 보급했던 적도 있고요. 이제 어쩌면 큰 비가 오면 건물이나 가옥이 부실했기 때문에 비니루가 됐건 가마니가 됐건 해서 비 안 맞게 하는 게 아주 큰일이었습니다. 당시에 학생 수만 정확치는 않지만 2만여 명에게 보급하는 일은 어쩌든 쉬운 일은 아니었죠. 지금 인제 살아계신 분도 있고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고 그랬는데, 주로 인제 서점이라는 것은 당시에 요즘도 마찬가집니다만 학교하고 밀접 될 수밖에 없고 또 학교 선생님들께서는 서점을 또 가까이 하는 게 마땅했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꽤 많이 오셨어요. 우선 그런 중에 계신 우리 교장선생님은 은퇴하셨고 또 향교 정교까지 하셨던 김재열 선생님이 생존해 계신 분 중에 대표적이시고, 또 관산가면 소정 선생님이라고 계셔요. 지금 청소년수련관장 하시는 분 시아버님 되시는데, 이영송 교장선생님 아버님 되시죠. 소정 선생님께서도 어떤 특별한 직위는 갖고 있지 않았지만 항상 서점에 들리셔가지고 이 책 저 책 뒤져가면서 책과 가까이 하셨던 분이시고. 또 한문 글씨를 잘 쓰셨던 서예가 분들이 몇 분 계셨는데, 저희 집 뒤 안방이건 마루건 또 이 건물이 완공된 뒤로는 2층에 공간이 있는데 거기에서 하루종일 붓글씨를 쓰시면서 오신 분들. 또 지인들 불르셔가지고 글씨를 많이 써주셨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분이 장평중학교 교장선생님 하셨던 만취 최일환 선생님이라고 계셔요. 그 분 글씨는 지금도 장흥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지금. 인제 그런 분들은 근 하루 종일 집에서 붓글씨를 이분 저분에게 써주셨던 것인데, 그런 분들이 자주 왕래를 하셨고. 어쩌든 또 이제 독특한 분들도 계십니다. 고서적을 주로 탐닉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런 분들은 아버님 모르게, 또는 저 있을 때도 저 모르게 오래된 책들을 자꾸 어영부영 가져가신 분들도 많이 계셨는데. 아마 그런 책들이 지금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면 상당히 역사적인 자료가, 판매된 책들 중에 자료가 될 거예요. 뭐 5환짜리 10환짜리 이렇게 화폐개혁 되기 전 책들도 꽤 있었다고 보이는데. 그리고 일제 때 발간됐던 교과서랄지 그런 책들은 장흥의 책을 아꼈던 누구누구한테는 반드시 있으리라고 봅니다, 저도. 그래서 오히려 서점에 있는 것 보다는 그분들이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다행스러운 일로 생각을 합니다. 아버님 계실 때도 이 서점의 법적인 대표는 저희 어머님 김연옥 여사였었습니다. 그래서 어음관리 하고 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사업을 하기 마련인데. 아버님 계실 때야 어머님 친구 분들이 오셔가지고 많은 시간을 노셨겠어요? 그런데 아버님 돌아가신 뒤로는 주변 어머님 친구분들, 또 주변 그 어르신들이 와서 많이 노셨는데. 영락없이 그만큼 아버님 계실 때는 아버님 지인들, 아버님 친지들 이렇게 많이 오셨죠. 그래서 그게 인제 나이 드신 분들이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기 좋은 곳이고 또 서점은 아무래도 사람들 오고 가면서 만나기 쉬운 곳이기 때문에 영락없이 아버님, 어머님이 그렇게 계신 때는 많은 분들이 오셔가지고 정담을 나누셨죠. 그러고 보니까 옛날에는 길 건너편이 고기집이었어요. 석쇠, 연탄불에 석쇠로 해서. 그러니까 지나가는 분들이 자꾸 그 고깃집에서 점심때부터 저녁까지 고기를 구워드시면서 아예 저녁까지 계신 분들. 아버님도 거기서 아주 만취해서 오신 경우도 많고 바로 앞이니까. 그랬던 정감어린 모습도 생각이 납니다. 서점은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장사를 잘 해서 지키는 게 아니고 또 책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유지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지금 제가 만나는 어르신들 중에 장흥에 책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러면 저희 집을 지칭하는 것이니까요. 지금 계신 분들 중에 학교를 다니셨다, 보면 저희 집에서 책을 사보셨달지. 저희 집에서 책을 도매로 했을 때니까 각 읍면에 전부 빠짐없이 서점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서점이 없었던 곳은 10개 읍면 중에는 없어요. 부산도 적지만은 학교 앞 가게에서 서점은 아닌데 판매를 했었고 유치도 판매를 했었고, 장동, 장평은 서점이 서점이라는 이름으로 호남문구사 서점 이렇게 있었으니까. 안양도 학용품가게 겸 서점이 있었고, 용산도 만물상회 해가지고 의외로 가장 큰 역할을 서점이 했었죠. 또 관산 같은 데에는 학생사 이렇게 해가지고 주로 인제 서점하고 문방구 일부, 거의 대부분 문방구, 서점을 같이 했으니까요. 그리고 특히 대덕은 문방구를 취급하지 않는 동화서점이라고 있었습니다. 그분도 대단한 학자셨는데 서점을 경영하였고, 회진도 분면이 되면서도 학용품가게 겸 서점이 있었으니까요. 장흥이 문화당 저희 집에서는 한때 영암, 강진, 보성 그리고 금당, 금일까지도 저희 집에서 책을 가지고 가서 판매를 했습니다. 그래서 칠거리에 서점이 있을 때는 버스터미널이 있을 때에는, 저희 집 앞으로 가는 차를 세워서 보성은 보성대로, 집 앞에 차가 서니까. 지금 집 앞이 국도 1호선이죠, 국도 2호선? 하여간 집 앞 바로 국도였으니까. 그래서 가는 버스, 오는 버스가 다 설 때예요. 그래서 강진 서점들도 집 앞에서 책을 실고. 그 때야 뭐 예쁘게 책을 포장을 한 게 아니고 가마니로 해서 새내끼로 묶을 때였습니다. 책을 많이 가지고 갈 때에는 실랭이가 굉장히 심했죠. 보성의 희망서점, 지금 이름을 보니까 강진도 마찬가지로 심지어는 회진에서 금당, 금일은 여기에서 보급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암도 책을 여기서 좀 가져갔었구요. 그 뒤로는 각 군에 각각 출판사의 대리점들이 다 생겨서 운영이 됐죠. 그런 적이 불과 머 40년 지난일이니까요.

 

 

 

 

 

 


자료번호 / 06_12_01_MPN_20160714_CKS_0002
제보자(구술자) / 최경석(남, 55세, 건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