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용산면 54

[용산면] 묵촌의 문방사우와 동백숲

묵촌의 문방사우와 동백숲 ▶ 마을에 부용산 줄기인 필봉(붓), 그 아래 서있는 현암(벼루), 그 앞에 청수리(네개 물줄기), 그리고 따밭(종이 생산)이 있는데 먹이 없어 묵촌이라 이름지었다. 또한 마을 앞에 동백숲을 조성하여 어산 쪽 옹기 구울 때 점등에서 나오는 불빛을 가렸다. 묵촌은 상당하니 오래된 고촌인데. 고촌이라고 인정할라는 것은 그 머야 그 돌로 그 머라그라재, 고인돌. 고인돌 같은 것이 여러반데가 산재해가지고 옛날에 보믄 상당히 오래된 마을이여. 거 인제 기록으로 보먼, 나로 하먼 십대 조부님 [유]짜 할아버지, [유]짜 할아버지가 어산에서. 자기 할아버지가 진사, 진산데 어산에서 묵촌으로 분가를 해서 묵촌을 세웠다. 그란께 그 때 묵촌은 그 양반 비롯해서 그 후로 안씨, 송씨, 이 분들이 ..

용산면 2017.09.25

[용산면] 한국전쟁으로 엇갈린 독립운동가들

한국전쟁으로 엇갈린 독립운동가들 ▶ 장흥지역에도 일제강점기 농민회 사건 등 독립운동이 활발했다. 그 중에는 친일로 변절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해방 공간에 독립운동가들 다수가 좌익에 가담했다. 좌익에 연루된 독립운동가는 보훈 대상에서 제외되고 친일을 했더라도 먼저 죽은 사람은 보훈 대상이 되었다. 대구 고법 판결문 있어. 글로 해서 보훈대상도 되고. 또 그란디 그분들이 나중에 전부 좌익을 했어. 그래갖고 좌익을 해가지고 그 혐의로 해서 감옥에 간 사람들은 원호 대상이 안 되고. 그 중에서 나중에 변절 되야갖고 친일한 양반도 있고 이. 끝까지 주장하다가 잡혀서 한 사람 보훈 대상이 안 되고. 유재승씨라고 그 양반이 수두(首頭-우두머리)고 저그 석동. 그라고 인암 정진수씨라고 그런 양반, 그 두 양반이 ..

용산면 2017.09.25

[용산면] 힘이 장사고 좌익 거물이었던 어산 사람 독립운동가 문병곤

힘이 장사고 좌익 거물이었던 어산 사람 독립운동가 문병곤 ▶ 어산 사람 문병곤씨는 두 사람이 양팔을 붙잡고 서있어도 버티던 장사였다. 해방 후 좌익활동을 했지만 일제강점기 농민회 사건에 연루된 독립운동가로 장흥지역의 거물이었다. 특별히 이 동네 사람들이 모가 안 나요, 모가 안 나갖고. 밤에는 좌익 낮에는 우익.[웃음] 그란디 여기서 인자 좌익 중에서도 거물이. 저 위에 지금 대밭이 없어져버렸는데, 대밭 그 제일 위에 대밭 속에 있는 그 사랑방 식으로 있는디 우리 큰댁인디. 주로 거그서 많이. 아래서 모도 온 성 싶으믄 얼른 대밭 딛고 인자 산으로. 문병곤씨라고 거물이 있었어요. 용산 어산 사람이에요. 어산 사람인디 여그 와서 많이 피했어요. 저 왜정시대 체육 전문 출신. 일본서 유도. 우리가 봤어 어려..

용산면 2017.09.25

[용산면] 대학생 모자만 보아도 순경인 줄 알고 놀라 숨었던 한국전쟁

대학생 모자만 보아도 순경인 줄 알고 놀라 숨었던 한국전쟁 ▶ 한국전쟁 때는 무법천지였다. 지서 주임에게 총살권이 있어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 마을 인심이 좋아 몇날 며칠이고 경찰이 머물면 돼지며 무엇이며 잡아 먹였다. 심지어 마을에서는 멀리 대학생 모자만 보여도 경찰인줄 알고 사람들이 숨었다. 그때 선거가 6·25 든 핸가 그 앞 핸가. 앞 해 그 저 오 뭐 뭔 데이 노동날. 그 그런 거 있그던. 메이데이 그날 습격당했어, 공비들한테. 그 산 속에서 우장 쓰고 나와서 지나가는 차 습격하고. 6·25 인자 직후로 평정이 안 되얐을 때 그때 지서 주임에까지 총살권이 있었거든. 그때 우리가 열두 살, 어려서 들어봤어. 그란디 그때는 교통이 안 좋아. 추럭에서 추럭에다 관산서 인자 그 범인을 실고 장흥..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건너 마을 아가씨들이 보고 바람 난 남근석

건너 마을 아가씨들이 보고 바람 난 남근석 ▶ 남근석 두 개가 마을 앞에 서있었다. 건너편 아가씨들이 바람난다고 한 개는 어디 파묻어버리고 지금은 한 개가 남아있다. 여그 마을 앞에 들오먼은 마을 앞에, 그 전에 마을 앞에가 그 돌이 있어, 돌이 비석 같이 세워진 거. 아마 그 마을, 지금으로 말하믄 정문 같은 그런 형식으로 해서 아마 있었던가 봐요. 근데 지금 보면은 돌이 있는데. 옛날 어른들 말 들어보믄, 우리는 모르제 인자. 근데 어른들 말 들어보믄은, 그 돌이 저 우리 축사 밑에 보면은 돌 이렇게 한나 서갖고 있는 것이 있어요, 입석 같이 서갖고. 이쪽에는 없어져 가지고 이런데. 그 옛날 어른들 말 들어보믄 그런 속설이 있어. 어떻게 있냐 그라믄 그 돌이 남근석이기 때문에 저 건네서 상금, 하금서..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정장은 솥 형국, 척산은 밥주걱 형국

정장은 솥 형국, 척산은 밥주걱 형국 ▶ 정장은 솥 형국이고 척산은 밥주걱 형국이다. 그래서 척산에서 밥을 퍼간다, 생각하고 마을 앞에 솔나무를 많이 심어 척산을 가렸다. 저 앞에[마을 앞 동산을 가리키며] 여 솔대뜽이라는 데가 있어요. 우리도 지금 나무를 심어 가지고 관리 하고 있는데. 그 전에는 마을 입구 막 들어서서 소나무가 이렇게 쭈욱 깊어가지고, 이렇게 쭉 요렇게 들어왔거든요. 그라고 마을이 순전히 아조 산중에 가 있는 마을이 되얐었어. 그란디 그때 당시에 어른들 말 들어보믄 여가 솥 행국이기 때문에. 그니까 척산이라는 데가 척산 주산이 밥 주걱. 밥 주걱 알지요, 밥 푸는 거 인자 이 밥주걱 이런 식으로 되야갖고 있어서 그 형국이. 여그는 솥이고 거그는 밥주걱이기 때문에 쩌어 마을 가리지 않으..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정장(鼎藏)이 아니고 정장(正莊)이여

정장(鼎藏)이 아니고 정장(正莊)이여 ▶ 정장은 형국으로 보면 솥 정, 감출 장을 써서 정장(鼎藏)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용산면 청원계책에 보면 이미 400전 전에 바를 정, 엄숙할 장을 써 정장(正莊)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니, 1932년에 다시 정장(正莊)이라고 쓴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거기 보면은 옛날에 정장이라는 이름이 솥 정(鼎)자 감출 장(藏)자 그래갖고 정장이었다, 이렇게 해갖고 인자 그랬는데. 1932년에 1932년이믄 지금 얼마 안됐거든. 32년이믄 지금 한 80 몇 년 됐것구나. 그 정도 됐는데 그때 행정구역 개편 시에 지금의 정장이라고 이렇게 지금은 바를 정(正)자 흙 토에… 그 장(莊) 자를 쓰고 있는데 정장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걸 1932년에 행정구역 개편 시에 이렇게 동..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유치 빨치산 토벌하러 갔다가 강진, 장흥에서 최초로 전사한 경찰 형님

유치 빨치산 토벌하러 갔다가 강진, 장흥에서 최초로 전사한 경찰 형님 ▶ 한국전쟁 전 해방공간에 아버지가 반란군들에게 피살을 당하자 형님은 경찰에 입문한다. 강진 옴천지서에서 근무하며 그 동네 제일 부잣집 딸과 결혼한다. 하지만 전쟁 중에 장모와 아내가 다시 반란군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복수한다고 유치 토벌 작전에 나갔다가 전사한다. 제가 그 6·25를 젂었던 이야기를, 우리 가정이야긴데 좀 말씀드리고 싶어서. 내가 그 지금 유가족이 된 이유가 저 6·25 전에는 이 반란군들이라고 산에 댕긴 사람들, 좌익들. 말하자면 지금으로 말하자면 공산당들이지. 그 사람들이 산에서 굴 파놓고 산 시대였거든요, 6·25 전이여 그때는. 그랬는디 인자 그 분들이 우리집 패망을 시키는 것이. 우리 아버지가 참 그때 당시 변..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밀대, 친일을 해서 먹고 산 사람들

밀대, 친일을 해서 먹고 산 사람들 ▶ 일제강점기 6학년이 되어 해방 되었다. 그 전에 한국말 하면 벌을 주고 창씨개명을 당했다. 그래서 5, 6학년이 되어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 어느 마을이나 밀대, 친일파들이 활약했다. 6학년 된 게 해방 됐어. 일본말 조금 배왔제. 거 자네도 카도 안가 카도. 카도 저 한국말 하믄 카도 뺐어. 카도 저 머시기 여 한국말 하믄. 카도를 딱 나나조가꼬 한나 앞에 스무 장쓱 엄마 쓱인가 나나주고, 한국말 하믄 카드 주라게, 한국말 했다고. 그래가꼬 일본놈들이 그런 짓거리를 했어. 나중에 검사 하믄 제일 없고 떨어진 놈은 한국말 많이 한 놈인께 욕봐, 그놈을. 아 지금 생각하믄 창씨를 개명하고 말이여. 지금 생각하먼 모르고 살었는디 아아, 일본..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고사하면 또 심고 또 심고 누대에 걸쳐 두 그루 정자나무를 심어온 쌍정(雙亭)마을, 접정(接亭)

고사하면 또 심고 또 심고 누대에 걸쳐 두 그루 정자나무를 심어온 쌍정(雙亭)마을, 접정(接亭) ▶ 저드리 들판에 두 그루 정자나무를 심어 아름드리가 되자 쌍정이라고 했다. 저드리 두 그루 정자나무가 죽자 지금 접정 자리에 다시 두 그루를 심었다. 이러한 일이 누대를 걸쳐 진행되었다. 접정마을은 나로 해서 13대조 이청강 선생이란 양반이 계셨어. 그 양반이 손자 시슬, 서이를 나셨는디. 한 분은 어산 상파, 한 분은 묵촌파, 그 한 분은 접정판디 싯짜치나. 그래서 어산서 어서서 하뤼 쉬다가 싯짜치를 행제 저더리 뒷까끔 너무로 해서 저더리로 해서 접정 부근으로 저금을 내셨어. 그래가지고 그 저드리 앞에다가 두 구루 정자를 세웠는디 그 정자가 아람맥이 서너, 인자 아람맥이[두 팔을 둥그렇고 넓게 펼치며] 여..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어인(御印)바우가 있어 인암(印岩)

어인(御印)바우가 있어 인암(印岩) ▶ 마을 산에는 능바우라고 했던 어인바우가 있다. 그래서 마을이름이 인암이 되었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와 매생이를 생산했다고 해서 매산바우도 있다. 당초에는 쩌그 저 머시기 서강 앞으로 서강대가 있었어요, 머시기. 거가 우리 마을이 형성이 돼 갖고 거그서 살았던갭디다. 그란디 거가 이 산중이고 그래가지고는 차근차근 내려온 것이 지금 이 인암으로 왔어요. 그때는 인암이라고도 하고 구명이 능바우라고 했어요. 능바우. 그란디 여기가 여 모탱이가 가면 어인바우라고 바우가 하나 있어요, 바로 여기 가면은. 그란디 꼭 어인 모냥으로 사각으로 돼야 갖고. 그 바우가 옛날부터 전해 온 것이 어인바우 라고 그래가지고. 당초에는 여가 능바우였는디 그래서 어인바우라 해서 ..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를 쳐 생긴 용천폭포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를 쳐 생긴 용천폭포 ▶ 용이 꼬리를 쳐 생긴 용천폭포에는 동우(독그릇)쏘와 독아지쏘, 접시쏘와 구시쏘가 있다. 어렸을 적 여름이면 용천폭포에 올라가 시원한 물속에서 놀았다. 옛날에 용천폭포가 제가 알기로는 어르신들한테 들은 말에 의하믄, 저기 요리 물이 내려오잖에, 이 우게 올라가믄 용수등 이라고 있어요. 거기 바로 앞으로 해서 쩌어 산골로 빠져 나갔어요. 근데 이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그 옛날에 용이 올라가면서 용꼬리가 쳐서 거기가 지형이 낮아요, 용천 폭포가. 지금 숲이 우거져서 그라제. 그란디 거가 낮은디 올라가면서 용꼬리가 쳐서 거가 허물어지니까 낮은 지대로 물이 흐르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 거기가 물이 내려간께 거가 그 낙차 높이가 상당히 높아요. 그래가지고 용천폭포가 되..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호랑이 도편수 이수길(이윤곤)

호랑이 도편수 이수길(이윤곤) ▶ 마을에 살던 이수길씨는 호랑이란 별명이 있었는데, 강진 군동에서 제각을 짓는다고 가서 치목해놓은 목재를 보고 고주 하나가 빠진 것을 발견할 정도로 문화재급 도편수였다. 그 냥반은 본명은 이수길씨고 마을에서 부르는 존함은 윤곤씨라고 불렀어, 이윤곤씨라고. 그란디 우리는 어려서 그런 거 쩌런 거 모르제. 모른디 지금 그 냥반이 살어계시며는 우리 대한민국에 문화재급 목수여 대표적인 목수라고. 왜 그라냐며는 내가 에려서 거기를 비정이라는 데를, 그 냥반이 건축을 해갖고 아주 잘 해놨었어. 그란디 지금은 인제 이대 삼대가 지나다 보니까 지금 믹해 버리고 집도 개축도 안 하고. 그래가꼬 인제 머 가서 보면 쓸모가 없는 그런 데가 되야있는디. 아무튼 그 냥반이 훌륭하신 것이 왜 훌륭..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장원급제한 어산마을 이승(李昇)

장원급제한 어산마을 이승(李昇) ▶ 장원급제한 이승은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산중처사로 여생을 마쳤다. 집터가 한나 좋은 거이 났다 해싸서, 바로 이 우게 대밭 있는 집이. 그 집이 나로 하며는 12대조 할아버지닌까 한 400년, 약 한 400년. 그 할아버지가 어산을 최초로 들어오셔 가지고 그 집터를 잡어서 사시면서. 원래 그 냥반 고향은, 12대조 할아버지 고향은 용산면 금곡이여 하금. 하금에서 어산으로 올라오신거제. 그래갖고 여기서, 전설을 보면 여기서 지금 말하며는 사법고시제, 그 때 과거. 그란디 그 때 과거가 지금 사법고시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고 그라더라고. 왜 어렵냐며는 그 때는 고을마다 향교가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전라남도에도 몇 군데만 향교가 있었다 하드라고. 그란디 2년에 한 번씩 그 ..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신하들이 임금에게 우산을 받치고 있는 형국, 어산(御傘)

신하들이 임금에게 우산을 받치고 있는 형국, 어산(御傘) ▶ 어산의 펼쳐진 뒷산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우산을 받치고 있는 형국으로 마을에서 인물들이 나올 것이다. 그렇지 어산리, 법정단위는 어산린데. 옛날에 지명은 임금 [어]짜, 암행어사라 해서 임금 어(御) 짜고 우산 산(傘) 짜. 그랑께 어뜬 사람들이 이렇게 보며는 뒷 형국이 임금이 우산을 받치고 있는 이런 형국이다, 신하들이 양쪽에서 우산을 받치고 임금은 가운데가 있고 그런 형국이래 여그가. 그래서 언젠가는 이제 모르긴 모른디, 언젠가는 여그서 임금이 나올 것이다, 지명으로 봐서. 그 인제 차츰차츰 뭐가 되야간 것이 어찌 그러냐 하믄. 이 옆에가 인제 교도소 들어왔지, 인자 지명으로 해서. 그런 걸 보며는 여그 이 마을에도 언젠가는 지금 서광이 비치..

용산면 2017.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