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51

[의향편] 동학농민혁명 때 수성군으로 참여하여 장녕성에서 돌아가신 조부님과 증조부님

동학농민혁명 때 수성군으로 참여하여 장녕성에서 돌아가신 조부님과 증조부님 ▶ 증조부님은 장흥동학농민혁명 석대들 전투에서 박헌양 부사와 함께 장녕성을 수성하다 돌아가셨다. 그때 조부님도 수성군으로 함께 돌아가셨다. 그 뒤로 집안이 어려워 할머니가 삯바느질을 해서 겨우 연명했다. 섣달로 해서 12월 5일날 돌아가셨어, 5일날. 그란께 인자 제사를 4일날 모시고 있는데. 아까 얘기 하다시피 동문하고 남문을 인자 방어를 하고 계신디 이 북문으로 요리(마을 옆 산을 가리키며) 북문으로 해서 그냥 성을 점령을 해부러가지고. 그 인자 한 2만 몇 명이 오셔갖고 하니 숫자로 해보들 못하제. 그날 한 날 한 시에 96인이, 박헌양 이하 96인이 싸악 돌아가셔부렀지. - (증조부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어요.) 그란께 오위장..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석대들전투에서 돌아가신 수성군 조부님

석대들전투에서 돌아가신 수성군 조부님 ▶ 조부님은 장녕성을 지키다가 박헌양 부사와 함께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일본군의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나쁜 짓은 일본군이 다 저질렀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들어섰는데 수성군을 모시는 영회당도 관리를 해주면 좋겠다. 그란께 인자 우리 어려서부터 저기 해놔서 그 어르신들은 우리가 뵙지를 못 했지요. 그러고 지금 동학혁명이 난 제가 란이 난 제가 지금 백 년이 넘제 안 했읍닌까요. 그래나서 우리는 말만 들었지 머 현장을 목격 못하고. 그 당시 마지막 장식을 장흥서 했다는, 란, 혁명. 마지막 장식을 장흥서 하기땜에 이 3·1절 만세를 못 불렀 덴가 장흥입니다. 왜 그분 후손들이, 마지막의 석대, 비참하게 아흔여섯 분이서 순직이라고 봐야죠. 저는 순직이다 고 봅니다..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동학농민혁명 때 박헌양 부사 죽음에 조시(弔詩)를 쓴 증조부님

동학농민혁명 때 박헌양 부사 죽음에 조시(弔詩)를 쓴 증조부님 ▶ 증조부님은 한학에 깊이가 있고 큰 서재를 가지신 유림이셨다. 동학농민혁명 때 박헌양 부사의 소집으로 유생들이 모인 대책회의에도 참여했다. 교류가 많았다 부산면 출신 김한섭은 강진에서 동학농민군과의 전투 가운데 사망하였으니 증조부님은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아서 1912년에 돌아가셨다. 큰고모님 말씀만 들었는데 그 조부님이, 고모님한테는 조부님인데. 내 조부님은 서른일곱에 돌아가셨거든요. 일찍 돌아가셔서 그 맥을 잇지를 못했어, 우리 집안에서. 그라고 아버지는 육유재(六有齋 백영직) 돌아가신 백일 후에 태어났고. 그란께 큰고모님만 유일하니 알어, 그 육유재란 분을. 그란디 그 분이 얘기 하실 때 에~ 그 인정을 안 한데 그 부사가 관산 가..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일본군도 토벌대도 꼼작 못하게 한 박쥐약 어르신

일본군도 토벌대도 꼼작 못하게 한 박쥐약 어르신 ▶ 일제강점기 별호가 ‘박 쥐약’이라는 어르신이 있었는데, 늘 쥐약을 품고 다녀서 붙여진 호칭이다. 쥐약을 먹고 죽을 각오로 일제의 단발령에 반발하였다. 또 한국전쟁 중에 토벌대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 5명을 총살시키려고 할 때도 나서서 맨 몸으로 가로막아 주민들을 구명했다고 한다. 어르신 손자가 현재 광주 서예원 원장이다. 그분이 별호가 ‘박 쥐약’이여. 쥐약을 항상 품에다 싸가지고 다녀. 쥐약을 왜 싸고 다니냐면, 옛날 일제 말에 단발령 내렸을 때 머리를 안 깍을라고. 머리를 깍으면 먹고 돌아가실라고. 그랑게 일본사람보고 나쁘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은 양반이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디지던 말던지 하고 머리를 자를 것 인디 그 사람들은 머리를 안 잘라. ..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독립운동가 신출귀몰 임학현

독립운동가 신출귀몰 임학현 ▶ 임학현은 일제강점기 의병(독립운동가)으로 활동하면서 축지법을 쓰는 등 신출귀몰한 것으로 이름을 알렸다. 행방 후 고향마을에 거주하다 한국전이 반발하면서 반란군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훈련을 시키는 등 지원을 했다. 그로 인해 목포교도서에 갇혔으나 연로해 석방되었다 귀향길에 돌아가셨다. 후손이 없고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보상이나 조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조상 중 2형제분이 의병(독립운동)이었는데 하나는 귀자 현자 왜적을 많이 무찌른 양반이여. 이 양반 자손(나로서는 아버님)이 형제간이 4남맨데 아버지가 제일 장남이고 지금으로 계신다고 하면 군수직도 더 했던 양반이제. 그런데 한 양반은 일제 해방 직후에 백오형무소에서 옥사를 하셨고 거가 공동묘지에 모셨다고 하대. 차두를 큰놈..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 ▶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지역에서 야학운동을 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하지만 일제는 판결문에 공산주의 활동을 한 것으로 기재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여 보훈신청을 하는데 너무 애를 먹고 힘들었다. 우리가 어려서 자세한 것은 몰라요. 저 나 11살 먹어서 돌아가셔브러나서 자세한 것은 모르고 그런디. 독립운동을 일찌거니 하셨던가 봅디다. 그래가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36살에 돌아가셨는디요.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랬는디 이 장흥에서 그랑께 유공자 포상도 지금 늦게사 받았어요. 저 진직 알았으믄 일찌거니 받았으믄 애기들 가르친 데도 좀 도움이 되고 그랬을 것이요만은, 늦게사 해갖고는 그 포상을 받았는디. 이 장흥군에서 32명 대표가, 유재성씨 하고 우리 집 아버님 하고 두..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관산항일사건

관산항일사건 ▶ 3·1만세운동 한 달 뒤인 4월 7~8일 이틀간에 걸쳐 관산에서 항일사건이 일어났는데, 일본헌병들이 용산으로 후퇴를 했다가 지원병이 오자 다시 들어와 총으로 진압하고는 주모자들을 검거해서 관련자들이 감옥에 투옥됐다는 이야기다. 그때 항일사건이 일어난 주요 계기는 일인들이 천관산에 밤나무를 심으려고 유독 강제 동원을 심하게 했던 것에 대한 반일감정이 깊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얘긴데, 1910년 한일합방 전후해서 일본 사람들이 그때 우리 면까지 들어와 가지고, 강제동원을 시키는데 뭘 하기로 동원을 시키느냐 그러면 밤 종자를, 밤을 갖고 와 갖고 천관산 좋은 기름진 곳, 밤나무가 잘 될 수 있는 곳에 밤을 심어. 그런데 지금까지도 그 밤나무가 존재하는 곳이 있어. 가마솥 뒤..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김재계 선생과 양영학교

김재계 선생과 양영학교 ▶ 장흥 회진 덕도초교 전신인 명덕학교의 설립과 그 이전의 상황에 관한 이야기다. 천도교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사립학교운동이 한창 일어났던 1925년 무렵에 간이학교로서 양영학교가 만들어졌는데, 김재계 선생이 누군가의 밀고로 감옥에 들어가고, 바로 그러던 무렵에 학교가 폐쇄가 됐다. 당시 학생들은 한 50명 정도 됐는데, 구술자인 한승원 선생의 아버지는 한문선생이었고, 당시 어머니는 유일했던 여학생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분이 우리집 바로 이웃집이여. 내 생가라고 하는 바로 그 옆집에서 김재계 선생이 나고 자랐는데, 그분이 그 아버지도 동학활동을 하고 했지. 그분이 일찍이 서울로 가가지고, 동학 후손들하고 만나고, 손병희하고 만나면서. 동학군에 가담했거나 그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아직도 집 뒤안 대숲에 묻혀있는 항일의병장군 고무래 정(丁)씨의 갑옷

아직도 집 뒤안 대숲에 묻혀있는 항일의병장군 고무래 정(丁)씨의 갑옷 ▶ 고무래 정 씨 항일의병 장군이 살았던 집은 소쿠리 형국인데 분명 부자 터다. 이화학당까지 나온 고모는 할아버지가 대단히 풍채가 좋은 장군이었다고 기억했다. 한 번은 일본군을 피해 보성 회천 정 씨 본가의 항아리 속에 숨었다고도 한다. 지금도 예전 장군이 살았던 집의 뒤안에 장군이 입었던 갑옷이 묻혀있다고 한다. 제가 인제 이 집의 네 번째 주인인데. 어, 이 집터가 거 풍수로 말하먼 여기도 유명한 소쿠리 터라고 그러 드라고요. 결국 소쿠리 터는 소쿠리 어퍼 논 것이지 않습니까, 어퍼나서. 결국 소쿠리라는 것은 머 용도가 물건을 담고 모으는 이제 의미닌까. 여기는 부자 자리 터가 맞는 거 같습니다, 보닌까. 그런데 이제 그때 왔을 때..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천도교로 인해 혼연일체가 되다

천도교로 인해 혼연일체가 되다 ▶ 동학 때, 덕도의 소년뱃사공 윤성도 할아버지의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그분의 개인적 노력도 있었지만, 당시 덕도 주민들 대부분이 믿었던 천도교의 영향이 컸다는 이야기다. 당시 덕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다. 덕도분들이 참, 전부가 그렇게, 그때는 천도교를 다 했는데, 천도교 하신 분들이 거의 가 했어요. 거의 하여튼 안한 사람이 별로 없다시피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라면서 동학혁명군들이 그렇게 쫒겨서 오고 그렇게 피신을 하고 그런다 하더라도 다 숨겨주고 전혀 외부로 발설이 안 되야요. 그것만 본다고 하더라도 이 지역이 얼마나 하여튼 강하게 뭉쳐져 있었으까, 하는 것을 우리가 지금도 짐작할 수가 있고, 또 거기 그렇게 600명이 그렇게 피란골에 있었다 한닥 하더래도..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장흥동학의 최후 석대·월정 전투

장흥동학의 최후 석대·월정 전투 ▶ 장흥 동학의 최후 전투인 석대전투와 월정전투에 대한 기록 그리고 여성 동학도 이소사와 청년 동학도 최동린의 이야기. 장흥 동학의 얘기를 하는데, 특별히 저는 장평 사창장터하고 흑석사거리 얘기에 집중하겠습니다. 우선 흑석사거리는 나주와 화순 쪽의 동학군들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흑석사거리에 모여 가지고 유치 피재를 넘어 오는 세력도 있고 사창장터에 보성 웅치 접주였던 구교철 접주하고 대덕의 이인환 접주가 사창장터로 동학군들을 이끌고 거그서 모이죠. 그때 인원이 1만여 명이 됐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장흥의 벽사역과 장흥부를 함락하기 위해서 항차 그게 인제 병영성과 나주목까지 치러 가는 흐름이 되겠습니다. 흑석사거리는 현재 봉림마을 앞에 있는 봉림주유소가 있고 봉림진료소가 있는..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부용사에서 죽은 동학농민군과 일진회 밀고자

부용사에서 죽은 동학농민군과 일진회 밀고자 ▶ 부용산에는 절이 많았다. 그 가운데 부용사는 동학란 때 폐쇄되었다. 1894년 장흥석대들전투 후 농민군 패잔병들이 부용사로 피신하였는데, 그 당시 일진회에 가담한 마을사람이 밀고하여 모두 죽임을 당했다. 옛날에 우리 알기에도 호랑이 물린 사람이 더러 있었죠. 우리 알기에도 저 나들 씨 어머니라고 그 냥반이 저 창고 뒤에 쪼고만 오두막집에 살았는데, 할머니가 어깨를 물려가지고 감고 다니고 그랬어요. 오래 신고(辛苦)했죠, 고생을 많이 했죠. 우리 한 78살, 89살 먹었을 때. 지금 나이가 84지요. 계유생. 이 냥반하고[옆에 한 어르신을 손짓하며] 동갑이죠. 여그 절이 컸는데, 이 부용산에 절이 문헌에 나타난 거는 중대사 석대사 석수암이라고 있어. 석수암은 ..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차동(車洞)마을 학성(鶴城)과 백마타고 동학농민군을 지휘한 여성 이소사

차동(車洞)마을 학성(鶴城)과 백마타고 동학농민군을 지휘한 여성 이소사 ▶ 여성 이소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백마를 타고 농민군을 지휘하며 장흥석대들전투에 참여했다. 차동마을 뒷산에는 학성(鶴城)이 있는데 이곳은 말을 사육하고 조련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말타기를 어려서부터 배워 능수능란하게 탈 수 있는 환경이었다. 추정이지만 아마 이소사는 차동마을 출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이제 역사적인 사료를 가지고 추정한 이야긴데요. 근현대사의 여성운동이랄까. 아주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인물이 장흥에는 이소사라는 동학군을 지휘했던 흰백마를 타고, 그런 역사적인 인물이 나타나는데. 저희도 인제 저희 마을이 차동(車洞)이라는 이유가 마을 지명이 왜 차동일까를 생각해보면, 이 뒤에 보면 마을 뒤에 가보면 쪼..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동학농민혁명 남도장군 이방언과 기구한 가족사

동학농민혁명 남도장군 이방언과 기구한 가족사 ▶ 부유하고 학식 높은 양반이던 이방언 장군은 용산면 월림에서 살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장흥 석대들전투 패배 후 체포되어 장흥 장대에서 아들 성호와 함께 처형되었다. 가족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유품 한 점 남지 않았지만, 피신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던 외동딸의 자식들이 70년대 용산을 찾아와 서로 눈물을 흘렸다. 이방언 장군이 저하고 딱 100살 차이에요. 내가 1938년생인디 그분은 1838년에. 그분이 용산면 묵촌에서 태어났는디 중자 길의 외아들로 태어나셨는데. 젊어서 자기 아버지가 잘 살았기 때문에 학자시고, 자기 아버지 호가 묵암(黙庵)이고. 학자시고 또 집안에서 훈학도 하시고 하는 학자이시고 또 살림도 여유가 있는 부호집안의 아들로서. 지..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남송에 있는 무연고 동학농민군 공동묘지

남송에 있는 무연고 동학농민군 공동묘지 ▶ 1894년 석대들전투에서 패한 후 동학농민군은 자울재 넘어 어산 푸조나무 아래서 쉬었다. 이후 관산 옥산에서 전투가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옥산전투에서 죽은 타지역 동학농민군 천여기의 공동묘지가 남송에 있다. 이제 자세하니 그 내막은 구전하는 거밖에 내막은 모르는디. 동학 때 아마 그 인제 후퇴를 하면서 그 푸조나무 밑에서 후퇴하는 과정에 푸조나무 밑에서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랬단 말이 있더라고. 그때 이제 그러니까 1차는 지금 들어보는 과정이 1차는 석대뜰에서 했고. 석대뜰에서 후퇴하면서 2차 전투가 어디서 벌어지냐 옥산전투. 저그 관산 옥산전투. 거그서 많은 사람이 또 희생이 되얐어. 그랑께 지금 관산에 가며는, 에 그 선재동 쪽으로 올라가는데 남송이..

문림의향 특집 2017.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