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대덕읍 37

[대덕읍] 처음에는 우리 마을을 새터라고 불렀어

처음에는 우리 마을을 새터라고 불렀어 ▶ 현 대덕 신기마을은 월정, 내동, 초당, 축내, 거정과 함께 신월리 6개 부락 가운데 하나였다. 신월리가 6개 마을의 행정 단위로 나뉘면서 마을 이름이 처음에는 ‘새터’였다가 나중에 한자어인 신기(新基)로 바뀌어서 지금의 신기마을이 된 것이다. 인자 처음에는 우리 부락이 신월리 6개 동에서 각 부락으로, 자연부락으로 이리 나눠졌어요. 그래서 인자 월정, 내동, 초당, 축내, 거정, 신기 그래서 6개 동으로 이렇게 나눠졌는데, 우리 부락이 떨어지면서 ‘새터’라고 불렀어, 인자. 처음에 떨어질 때는 새터라고 불렀는디 그거이 쪼끔 인제 자연부락, 행정으로 이렇게 넘어가면서 인제 신기부락. 그래서 인자 새로울 신(新)자 터 기(基)자를 써서 인자 신기부락으로 칭이 된 거..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마시면 병이 나았던 오성산 약수

마시면 병이 나았던 오성산 약수 ▶ 신리와 오성산 사이에 골짜기가 있는데, 예전에 거기에 약수터가 있었고, 거기서 나는 물이 좋다고 알려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들곤 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논이 들어서 있다. 오성산 앞에가요, 우리 신리하고 사이에, 오성산 앞에가 우리 신리마을하고 사이에 말하자면 골짝이 있어요. 거기에 물이, 약수가 있다고 그랍디다. 나병 환자나 어떤, 지금으로 말하자면 결핵 환자 같으면 그 물을 먹으면 좋다고 해가지고 상당히 거가 약수터가 있었던 모양이여. 그래갖고 우리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아마 거기서, 오성금 앞에 집이 몇 가구가 있었어요, 우리 알기에도 있었어요. 그라믄 우리 어려서 그 집이 없어지고 그 샘도 없어지고 그랬어요. 그란데 지금은 우리가 ..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연평마을은 바닷배 형국

연평마을은 바닷배 형국 ▶ 예전에 대덕을 ‘번덕’(넓고 평평한 땅)이라 했다. 대덕의 한 마을인 연평마을은 바닷배 형국으로 되어 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줄다리기를 하곤 했다. 전에 들어보믄 여 대덕 보고 번덕이라고 하더란께, 번덕(번덕지? 평야?). 그란데 뭐, 그런 거 알아서 뭐 하게? - [번덕이라고 한 것도 이유가 있어.] 그라제, 이유가 있제. …여그 마을이 저, 배 상국으로 돼갖고 요 동네, 마을이 배 상국이 됐어, 배 상국. - (배 형국. 배 배, 바다 배요? 바다 배 모양으로 생겼어요?) 이이, 그랬다 하더만, 바다…. - [자네는 누가 가르쳐줘서 알았는가?] 아따 그 전에 그라더만, 배 상국으로 됐는께…. 보름날이믄 줄을 당거, 배 상국이라. - (아, 그럼 매년 ..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도깨비랑 아조 큰 실랑이를 했다 하대

도깨비랑 아조 큰 실랑이를 했다 하대 ▶ 구술자가 어릴 적, 동네에 기골도 장대하고 힘도 아주 센 할아버지가 살았다. 어느 날, 이 할아버지가 밤길을 걸어 집으로 오는데 웬 사람(도깨비)이 나타나 씨름을 하자고 해서 큰 실랑이를 벌이다가 허리띠를 끌러서 그이를 묶어놓고 오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어찌 되었나 궁금하여 그 자리를 찾아가봤더니 빗자루 하나가 할아버지의 허리띠에 묶여 있었다고 한다. [웃음] 박우이 즈그 아버지가 속은, 우리 친정 동네요. 내 에려서여, 에려서 에려서…. 저, 신상. 대리, 저 신상. 그란디 그 할아버지가 젊어서 장대하고 겁나 세고 아조(아주) 그 힘도 좋고 그란 할아버지라게. 그란 할아버지여. 그란디 그 할아버지가 밤에 어디를 갔다 온께는 아~조, 어디 뭔 사람이 아조 달라..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정성 들여 소원을 빌던 원무덤재

정성 들여 소원을 빌던 원무덤재 ▶ 현재 대덕읍내에서 신리로 오는 큰 도로가 있던 자리에 예전에 샛길이 나 있었고, 여기에 ‘원무덤재’가 있었다.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정성 들여 돌을 쌓아놓고 원(願)을 빌고 하면서 돌무덤이 생겨나서 원무덤재로 불렸다고 한다. 다르게 전해지는 말로는 돌아가신 원님을 묻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는데, 지금은 도로가 닦여서 사라지고 없다. 우리의 지금 면 소재지가 옛날에도 현재 대덕읍 소재지, 면 소재지. 읍사무소 있는 데가. 옛날에 길이 나뻐 갖고 샛길이라 안 하요? 지금 현재 신작로가 나고 그 뒤로 인자 포장이 되고 오늘날은 2차선이지만, 다른 데도 그리 됐지만은. 그때에 정상적으로 그 재가, 돌무덤이 있었어요, 한마디로 그 당거리라 하는가요? 그람서 여기서 ..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간이학교도 못 됐던 강습학교

간이학교도 못 됐던 강습학교 ▶ 일제강점기 말엽, 대덕에 국민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없는 학교였다. 그래서 거기에 학생 수가 적어서 ‘강습학교’라고 부르는 작은 부속 학교를 하나 설립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초등학교에 1부생만 있었는데, 해방 즈음에 2부제가 실시되면서 2부생이 생겨났다. 해방 전후하여 이렇듯 2부제 의무교육 체제로 바뀌면서 강습학교는 폐쇄되었다. 인자 국민학교 한나밖에 없제, 여기가. 그때도 일제 말엽이니까 돈 있는 사람이 거기도 들어가고 학생들이 시험 봐서 거그를 들어가요, 모지란께 못 가고. 그래가지고 학교 간 사람이 귀했제, 그때만 해도. 그랬는디 거기다가 학교를 조그맣게 설립을 했어. 그 학교가 인자 간이학교도 못 되고, 급수가. 강습학교라고 그랬제, 강습학..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누에머리 산봉우리 형국을 한 잠두

누에머리 산봉우리 형국을 한 잠두 ▶ 잠두(蠶頭)라는 이름은 이 마을의 대창이라는 데에 있었던 산봉우리가 누에머리 모양을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뉘대빡’, ‘뉘머리’로도 불리는 이곳을 주민들의 지형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도 헐지를 못했는데, 70~80년대 간척지를 막으면서 흙을 팔기 위해 이 봉우리를 헐어버린 후로 그 산과 밭을 팔았던 이들이 모두 죽어버리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잠두(蠶頭)라는 지명은 옛날에는 지형을 따라서 그 마을을 이름도 짓고 모두 그란 것인디, 잠두가 대창이라는 데가 이 산 봉우리가 있었는디, 지금은 간척지하면서 깎아 내려 버렸는디, 봉이 있었어요. 거(기)가 잠두리가 누에 행국(형국)이라, 누에 행국. 거기가 누에머리여. 대창 산이 누에머리여. 그래서 뉘대빡(누..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선창이 크다 하여 대창

선창이 크다 하여 대창 ▶ 일제강점기 때, 대덕읍내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선창이 크다’고 하여 ‘대창(장)’이라 불리는 시장이 서곤 했다. 규모가 큰 장이라 늘 장꾼들로 북적였던 대창(장)은 근처 섬에서 가장 가까운 시장이기도 해서 농사를 짓지 않는 섬사람들이 부족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찾던 곳이었는데, 이후 시행된 간척사업으로 인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3.5키로나 될 거여, 거기가. 그랬는디 거기가 일제 때, 해방 후로까지도 도로가 개설이 안 되고 그럴 때는 이 섬사람들이, 도서 사람들이 식량을… 거기는 농사를 적게 짓지 않아요, 식량이 항상 부족해. 그란께 식량을 육지 와서 갖다 사다 먹어야 쓰는디 도서 사람들이 이 시장이 제일 가까운 데가 대창(大艙)이에요, 대창. 다른 데 저 더 ..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강진군과 장흥군의 군계인 분토마을

강진군과 장흥군의 군계인 분토마을 ▶ 분토(分土)마을은 예전에 지금의 마을 뒷산 쪽에 있던 송촌과 이촌이 차츰 물가로 내려와서 정자나무 세 그루를 심고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장흥군과 강진군의 경계에서 두 군을 나누는 땅이라 하여 ‘분토마을’이라 부른다. 옛날에 우리 마을은 한 500년 전에 송촌과 이촌이라는 데가 있었어요. [산쪽을 가리키며] 저 위에가 송촌이라는 데가 있고, 이촌이라는 데가 있었는디 거기서 살다가 차츰차츰 물갓으로(물가로) 내려와서 정자나무도 심은 데가 한 4~500년, 400년 이상 될 거요, 400년 이상 될 거요. 그 나무가 세 그루가 심어졌는데 그래가지고 여기가 강진군, 장흥군 군계로 되어 있단 말이요. 강진군, 장흥군 군계로 되어 있는디 저기 저 지제거리라..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징한 시상 살었어

징한 시상 살었어 ▶ 스무 살 때 회진 장산에서 이곳 대덕 가학으로 시집왔다. 오기 싫었는데 아버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시집을 와서 보니 방도 없는 골짜기 오두막집이었다. 그 굴 같은 방에 손베틀을 두고 베를 짜라고 해서 베를 짜면서 살았다. 참으로 매운 시집살이였다. 보리방애를 한나 물 붓어갖고 찌근디(찧는데), 시집을 요리 오기 싫은께 막 운께 어디로 달나 부렀어. 그란께는 우리 아부지가 도치(도끼)를 갖고 쫓아오더란 말이여, 억지로 요리 보낼라고. 그래갖고 무서워서 요리 시집왔당께, 억지로. 그래갖고 온께는 황토 골짜기 그 오두막집, [청중들 웃음] 워메워메… 방도 없는 데다가 시집보내갖고… 징한 시상 살었어, 아조. 그 굴방에다 손베틀 짜놓고 베 짜고. 어이구! - [그래도 따숩긴 따숩….] ..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간이학교, 소학교도 못 간 사람들이 공부했던 도장골

간이학교, 소학교도 못 간 사람들이 공부했던 도장골 ▶ 원무덤재가 있던 잠두리 덕촌마을 쪽에서 신월리 쪽으로 가다 보면 도장골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간이학교(2년제 학교)도 못 다니고 소학교(국민학교)도 못 다니던 사람들이 거기서 신식 공부를 했다. 때가 때였던지라 일본글인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그곳에서 가르쳤다. 저, 원무덤재에서 신월 가믄은 그 아주 골이 있어요. 지금은 그 아래가 쪼끄만 암자도 있고. 옛날에는 거가… 학교가, 뭔 학교냐 하면요, 간이학교도 못 댕기고, 그 당시에 소학교도 못 댕기고, 일제시대에 그런 사람들이 한문 서재를 쪼끔 수제해가지고 신식 학을 배우기 위해서, 간이학교도 못 들어가고 소학교도 즉 말하자면 초등학교도 못 들어간 사람이 거기에서 공부를 했어요. 선생이 인자 저 대..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대한민국 복구된께 무서워라 하고 내빼뿌네

대한민국 복구된께 무서워라 하고 내빼뿌네 ▶ 한국전쟁 직후 연평마을에도 인민군들이 내려왔다. 마을의 부잣집을 차지하고 살면서 마을 처녀들을 끌고 가기도 했다. 인민군들과 국군들 사이에서 수난을 겪은 주민들은 그 후에 대한민국이 복구됐다는 소식이 들리고 경찰이 들어와도 반길 수가 없었다. - (인민군이 언제 내려와서 어떻게 했어요, 이 마을에.) 언제 온지는 몰른디, 연평 앞에까정 쩌기 저 한질까정 내려왔어. - [인공이 유월달에 밀고 내려왔제.] 내려왔는디 우리 밭에 밭을 매는디, 우리 성님을 딱 삽 하나 주더라고. 꼭괭이 같은디 오글치면 오그라지고 피면 피지고 그라더만, 똑 요만한 것을. - (그걸로 뭐 하셨어요?) 몰라, 우리 큰집 쓰대, 시숙이. 그라더만 어쨌부렀는가 몰라. - (그 인민군들이 그때..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구룡봉 기우제

구룡봉 기우제 ▶ 예전에, 여름 가뭄이 심할 때 천관산 구룡봉에 사람들이 한데 모여 풀을 베어다 쌓아놓고 개를 잡아서 피를 뿌리며 기우제를 지내곤 했다. 그렇게 하고 산을 내려오면 소나기 오는 때가 많았다. 거가 이렇게 아주 둥그라게 성이 아주 높이 쌓졌어. 거기는 올라가보지는 못했어도 그 밑에 가서 그 밑에 가 인자 부노치가 많은께 그런 것을 뜯으러 봄이면…. - (뭐 뜯으러요?) 떡 해 먹는 부노치가 있었어요, 산에가 그렇게 많이 있었어. 그란께 봄만 되면 인자 그런 것을 뜯으러 그라고 친구들이랑 모두… 산이 거(기)가 암산이라고 거가, 암산이라고 여거서 저기 문학관에서 거기 쑤욱 올라가믄 [오른쪽을 가리키며] 요짝에는 봉대, [왼쪽을 가리키며] 요짝에는 구룡봉이거든요. 그란데 인자 문턱바우라고 하는..

대덕읍 2017.09.18

[대덕읍] 배가 뒤집혀 서른한 명이 죽었어

배가 뒤집혀 서른한 명이 죽었어 ▶ 1950년대 초중반 무렵, 완도군 생일도에서 일어난 배 침몰 사고로 서른한 명인가가 사망한 일이 있었다. 면 소재지인 평일도로 고구마를 매상하고 돌아오던 생일도 주민들이 겪은 참사였다. 면이 없었는디…. - (생일도에 면이 없었다고요?) 생일도가 없었어요, 평일도는 있었는디. 이 고구마를 수출(매상)을 하러 갔거든요. 그란께 면으로 인자 고구마를 이렇게 썰어서 몰리(말려) 가지고 그때는 그거 보고 뭐라고 하요? 수출을 하러 가다가 사람이 서른한 명인가 두 명인가 물에서 죽어버렸어요, 배 타고 오다가. 배가 뒤집혀가지고. 그래도 내 형제간은 친정이고, 내 형제간은 아무 죽은 사람이 없었는디, 너무(남의) 사람들이 31명인가 32명인가 죽어버렸어요, 너무 젊은 사람들이. ..

대덕읍 2017.09.18

[대덕읍] 여수가 앉거 있었어

여수가 앉거 있었어 ▶ 구술자가 어릴 때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들과 소를 몰고 좀 높은 산으로 풀을 먹이러 가면 묘 가장자리에 여우가 꼬리를 말고 앉아 있고는 했는데, 아이들이 이만치서 그 여우를 보고 있자면 여우도 소 몰고 간 아이들을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했다. 여수(여우)가 묏, 묏등 갓에가 그라고 앉거 갖고 꼴랑지 훼엑 돌려서 앉거 갖고 있고 그란 거를 봤어, 우리가. 소 뜯기러 가믄, 옛날에 소 뜯기러 가서 산에서, 저어 높은 산에 소 몰고 올라가서 보고 그란디…. - [지금은 여시도 없어.] 여시, 여수라 하더마 그것 보고. 그란디 허한 여수가 그렇게 아야, 묏등 갓에가…. - [여수가 쾍쾍 안 한가?] 잉, 여수가, 여수라 하는디 꼴랑지는, 꼴랑지는 길다란 꼴랑지 똘똘 몰아갖고 딱 꼬불..

대덕읍 2017.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