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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읍

[장흥읍] 개울을 베고 자는 곳에 지은 서당, 침계재(枕溪齋)와 침계정(枕溪亭)

장흥문화원 2017. 9. 14. 16:52

 

 

 

개울을 베고 자는 곳에 지은 서당, 침계재(枕溪齋)와 침계정(枕溪亭)

▶ 대반마을에는 개울가에 침계정이란 정자가 있다. 그 자리는 한국전쟁 무렵까지도 아이들이 공부하는 침계재란 서당이 있었다. 서당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정자가 들어섰는데, 침계재의 역사와 뜻을 이어받아 침계정이란 현판을 내다걸었다.

 

 

아 요것을 잉, 비개 침(枕)자 잉, 시내 계(溪)자, 요 자는 집 정(亭)자재? 그란가 저것이 집 [정]잔가? 내가 왜 저것을 했냐 그라면 저거 내가 해 논 거여. 내가 하자네 부락에서 했는디 내가 주동을 해서 했어. 여가 지금 요 냥반[앞에 할머니를 손짓하며] 할아버지제? 시할아버지. 그 냥반이 아까 이 냥반 보고 잠깐 뭔소리를 했는디, 대접장이여, 그전으로 말하면 대접장이 지금으로 말하면 선생님, 한문선생님, 파주 염 씬디. 그전에 일제시대에 여가 삼 칸 집이 있었어 삼칸, 기와집으로. 우리 어려서 장난부리고 깨 벗고 댕길 때. 있는디 방이 두 칸 있고 마루가 요렇게 뺑 돌려서 이렇게 있었어, 기억 자 식으로. 거기서 그때 무엇을 했냐 그라므는 일제시대때 야학, 문맹 퇴치하느라고 가나다라 모르는 사람들 일본말로 가나다라 모르는 사람들 일제시대 공부를 한 자리여. 하다가 해방이 되야부니까 우리 동네 관산, 그 당시에 관산이 현재 장흥 임씨여. 임 [학]자 [선]이라고 이 냥반이 우리 부락을 많이 개발한 양반이여, 그 냥반이. 그 냥반 비가 지금 우리 부락에서 저기 이 아래가 세와져 있는디. 그 냥반이 내가 알기로는 그 파주 염 씨, 저 냥반 시할아버지를 여긋따 대접장으로 모셨제, 좀 갈쳐주시오. 연상이여 훨씬 더. 그래가꼬는 인자 그 냥반이 선생질을 하셔. 그 냥반 별명이 있어. 쩌 아래서 올라오시먼은, 딱 그 한 2~30명 돼 야튼 서재 다닌 사람들이 요만씩한[앉은 자리에서 손을 눈 높이로 들며] 분들이. 쩌 아래서 올라오시먼 난리를 치면 조용해부러. 그 양반이 그렇게 엄해. 그라고 잘 못하먼 여그를[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하며] 들썩들썩 매집니라고 아주 별명이야 회초리, 그런 냥반이여. 그래가꼬 그 냥반 보고 별명이 가시끼리라고 그래 가시끼리. 일제시대에 저 택시 있제 마라자면 가시끼리가 일본말로 택시거든. 택시보고 가시끼리라고 그래 일본말로. 가싯끼리 온다 막 그라면 베락같이 들어와서 책 읽는 시늉을 하제, 매 안 맞을라고. 그렇게 엄한 양반인디. 그렇게 하다다 6·25가 되아갖고, 그라자 여그가 또 작업장이 있어 일제시대에 작업장이 머냐면 이 베틀 짠 거 베틀, 일본놈들 베틀 있거든, 요렇게 함서 요렇게요렇게 한거.[두 팔을 번갈아 위아래로 저으며] 우리 한국은 여서 요렇게 하지마는.[두 팔을 번갈아 옆으로 저으며] 그것을 여그서 인자 젊은 양반들이 와서 배우고 짜고 그랬어, 논 기억지 여가. 그란디 인자 6·25이후로 그거이 없어져 부렀제 인자. 없어 지고 여그따 인자 서재를, 아까 말하다시피 임씨. 요 냥반 집안 양반인디 임학 자 선 그 냥반이, 배울 학자 먼저 선 자제잉. 그 냥반 휘 잔디 그 냥반이 후원을 했어. 저 냥반 시아버지, 공부를 잔 갈쳐줍소 우리동네 젊은 아그들, 후원을 해. 내가 듣기로는 그 당시에 쌀만 도되 주면 돼. 그란디 그 당시에 쩌그 저 문 씨여. 문 씬디 그 냥반하고 멫 냥반이 이러트먼 좀 부자제. 그 냥반이 후원을 해준줄 알고 있어. 보태줘 내 자식은 안다녀도, 이러트먼 그것보고 뭔 비라고 했는가, [찬조금] 찬조금이 아니라 쌀 낸 것 보고. 그놈을 자기들 자식이 안 댕겨도 동네 애기들 갈쳐주라고 협조를 해줘. 이러트믄 쌀 한 되를 했는가, 닷 되를 했는가 그건 모르제 인자, 나는 그렇게 알고 있어. 그 냥반이 두서너 냥반이 된지 알고 있어, 우리 동네서. 그래서 저 냥반 시부가 하시다가 6·25이후로 이후에 까지도 했어 여그서. 그란디 6·25때 요것이 없으게 되아부렀어. 집이 그라고 5·16 이후로 모든 것을 정리를 해부렀제. 그래가꼬 여그를 인자 쓸어볼고 요거 진재가 한 40년, 한 40년 되제, 우산각 요거 진재가. 그래서 내가 저것을[침계정 현판을 가리키며] 왜 세왔냐 그라믄, 그 전에 서재 교육장 일제시대 6·25 해방되아서 교육장으로 썼기 때문에 침계재 라고 하든지, 그런 유래를 맨들아서 여그따 비를 한나 맹글라 그랬어. 여그 여 이 냥반 고인되아부렀는디, 이 냥반 남편하고 이논해서, 그 냥반 이름이 염대준인디. 했는디 저것을 지금 쩌그저 관산 남고등학교 앞에 거가서 저것을 귀해왔어, 저 현판을. 저노무 현판을 쓸라고봉께 내가 머슬 알어 누구없어, 그래 마치 성수, 장흥읍사무소 옆에서 이발소 성수. 성수집에서 이발함시로, 왐마 그라믄 여그 옆에 여 도장 파는 냥반이 잘 써라 그래. 쩌그 저저[다시 현판을 가리키며] 지금 옆에 있구만, 현 뭐이라그럴까? 현판가 머인가? 누구 글씨라고 써졌는가, 요쪽 가에. 현파제. 현파 저 냥반이 누구냐 그라믄 도장 판 냥반이야, 읍사무소 옆에 거 경찰서 올라가는데 좌측에, 도장 판 양반. 여그 여 김선생 문기 쟁인이여. 그래서 저그서 가서 저놈을 받어갖꼬 온께는, 우리동네 누구란 소리…[손을 휘저으며] 요놈 받어다 한다한께는, “에이 요거시 글씬가” 그래. 나는 크게 생각해서 한디 빈정이 팍 상하더라고, 빈정이. 요거슬 땡개부꺼나 어쩌꺼나, 그러나 이미 현판을 사다놨어. 내이짝것 욕 얻어 묵으먼 얻어 묵제 어째야, 그라고는 요놈을 갖다, 쩌그저저 남고 가자믄 지금 장흥신문사 옆에 가믄 요것(현판) 판디가 있어 그 당시에. 그 냥반 이이 고인 되았을꺼이만. 간께는 와따 글씨 좋소, 그래. 그래서 요놈 파다 심었네. 그래서 요것을 달아논 거시여.

 

 

 

 

 

 

 

 

 

                                                                                  침계정 현판

 

 

 

 

 

 

 

 

 

자료번호 / 06_12_01_MPN_20160628_YCN_0001
제보자(구술자) / 윤춘남(남, 82세, 대반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