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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장흥읍

[장흥읍] 대반마을 풍수와 몰곳치 방죽의 유래

장흥문화원 2017. 9. 14. 16:44

 

 

 

대반마을 풍수와 몰곳치 방죽의 유래
▶ 대반마을은 마을 뒤 무수봉, 앞으로 젓대봉이 있어 풍수로 명당자리여서 수많은 풍수 보는 사람들이 찾아왔으나 명당을 찾지 못해 몰곳치라 불렸다.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임씨 후손들이 고약해서 불이 나 집이 전부 소각해버리자 60여 년 전 학선 씨란 분이 마을에도 베풀며 조그만 방죽을 하나 파거라, 하시면서 마을이 골고루 평화롭게 산다.

 

 

으, 유래가 지금 여그 여 비, 비쌓고 있는 저가 저 비요. 비가 효자 일자, 호는 예조곤이고 그 냥반이 임씨요, 시방, 우리 할아버지 10대조. 그란디 여그 터가 이뤄진 재가 삼백 한 육십년 되야. 그러며는 평장 경주 김씨, 덕제 모두 거리 경주 김 씨들이 백년 후에 들어왔어, 여그 여 우리 할아버지 보덤. 그래갖고 그 이 할아버지가 애당초에 살적에는 남밖에 살았거든, 시방 법원자리 거기서 살으시다가…. 여그 산이 무수봉(舞褎峰)이거든, 그러믄 우리나라에서 무수봉이라는 혈맥이 시 군데가 있다요. 충청도가 한 반데 있고 전라북도가 있고 여그 장흥가 있고, 그 무수봉이라는 것이 혈이… 춤출 [무]자 소매 [수]자여. 저 가닥이 시방 그렇게 생겼어. 그라믄 저 건너 저 산이 [뒤를 돌아보며 덕제 앞산을 가리키며] 젓대봉, 피리 [저]자 젓대봉 인디. 덕제 1구하고 우리 마을하고 또랑 한나 갖고 시방 저 1구, 2구 한디, 지역상으로는 10리가 넘어. 왜 저그 저 억불산[뒤를 돌아보며], 억불산 줄행이 조르래니 타고 내려오다가 여그 젓대봉으로 나눠져 가지고 덕제 1구가 생기고, 잉 우리마을은 저리 돌아서 쩌어리 저 기만이 뒤로 강진을 거쳐서 여그 여가 떨어졌어. 그런께 거리상은 여그 몇 메타제만 지역적으로는 십리가 넘어 이 마을이. 그라믄 그래서 이 무수봉이 여그서 떨어져서 생겼거덩. 근께 무수봉이라 허면은 언제든지 맹당 자리가 있다요, 산세로 봐서. 그러니께 여기 이름이 그렇게 참 촌스럽제. 이 마을 이름이 그 전에는 몰고치여, 모르고치 모를 곳시다. 그라믄 자울재 저것이 자울재, 저 건너 자울재라는 재가 자울 [민]자여 민치여 민치, 자울 [민]자. 그때 당시 저런 산세 밑에는 명당이 있다 허고 각 처 풍수지리가 다 다녀가. 그럴 적에 이승이라는 풍수가 여그를 멧자리를 잡을라먼 먼데서 본다드만. 자울재 밑에 저 건네 저가 자울잰디 자울재서 여그를 내려다 보다가 거서 잠이 들었든개비여, 자우르다가. 그래서 자울 [민]자를 거그다 붙였어. 이승 그 박사가 거가 안거서…. 그래갖고 아무리 터를 잡을라고 고 명당자리를, 누구 방빼 밑에가 들어갔는가도 모른다요. 각 풍수들이 안다는 풍수들이 여그 무수봉 산하에는 맹당이 있다 하고 찾으러 댕갰었는디 못찾고 말았어. 근께 돌아감시롱 모를 곳이로구나 하고, 그래서 곳 [처]자를 써 몰곳치 라고 이러코롬 부르거든. 옛날에 그러코럼 부른께 듣기가 안 좋재. 근방에서는 아 몰고치 사람들이라고, 기왕이면은 동네 이름을 놔두고 몰고치 사람들이라고 이런 평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러면은 여그는 분명허니 저 산이 무수봉이요, 우리마을은 대반이라서 큰 [대]자 소반 [반]자여. 밥상이라 해서 소반, 큰 밥상이란 말이여, 큰 잔치상이여. 잔치상에다가 저그는 피리봉이고[뒤를 돌아보고 손으로 가리키며]. 그러믄 기생이 춤을 추는 그 상을 놔두고 노는 장면이여. 그러믄 우리마을이 특이한 재벌가가 없어. 왜 재벌가가 생기면은, 이 대반이라는 것은 소반 [반]자이기 때문에 묵어불면 줄어지재 보태지질 안애. 그렁게 팽장 여기가 배행국이거든, 배행국. 그런께 옛날에는 팽장 앞에다가 간짓대 끄트머리에다 오리를 맨들어서 세워놨거든, 더 고시라고. 그러면은 배도 역시 짐이 차면 까라 안거부러. 그런께는 왠만이 부자되믄 팽장사람 다 떠 부렀어 그 전에. 헌디 우리마을은 그 훌륭한 밥상이 구러지기 전에 다 묵어불 것인가… 그렁게 그대로 자수성가해감시로 그대로 사는디. 아 음식 앞에서 불량한 사람이 없어. 음식 먹고 모도 얘기하고 허기 때민에 우리 마을이 실제 살만한 곳이여. 넉넉허지는 못해 묵어분게. 그러나 묵기 따문에 배가 부른 께는 배고픈 사람도 없어. 그리 고루 살아 이 마을이. 그러면은 인자 요 냥반이[오른쪽 들녘 비석을 가리키며] 효자 일자 저 할아버지가 남밖에 살다가 이 무수봉 산하에다가 터를 잡자고 요리 앵기고 저그 남밖에 법원자리에는 유씨들을 바깠어 인자 잉. 유씨들이 그리 들어가고 이 냥반이 여그따 나와서… 여그 뒤에가 인자 뒷산 무수봉 밑에가 지금도 파믄 삼백년 전에 기왓장이 나와, 이러크 뚜꺼운 기왓장이. 그면 집터가 현재 쪼끔씩 쪼끔씩 행식으로 있거든. 그래 갖고는 얼마나 이 자손들이 고약했던고. 헌께 고약한디서는 볼 것이 없는 것이여. 사람이 덕을 베풀면 덕을 받을라고 하지 말고 베풀어만 놔두면 되는디. 얼마나 고약했던지 이 모도 자손들이 고약했던고, 이 용산 관산사람들이 요리 갓을 쓰고 댕기들 못했어, 무서와서. 어디 양반 앞에서 갓을 쓰고 지나가냐고, 도세 사람들이 더불어 댕긴디. 관산 용산 대덕 사람들이 강진을 갈라먼 이리로 걸어강께. 그렇게 아조 고약했었어잉. 그렁께 저 건네 쩌그는[왼팔을 들어 가리키며] 저 시방 머냐 야당야 까끔 거가 서재뜽이재. 거가 잉 쩌가[오른팔을 들어 가리키며] 서재뜽. 활뜽이, 간야뜽이 있어 활뜽이 있어. 거가 부하게 삼시롱 시방 방패 [간]자[두 팔로 활 쏘는 시늉을 하며], 활 쏘고 하라는 방패를 거따 세와 놔 두고. 그 등이 방패 [간]자 간야뜽이거든. 그래 갖고 얼마나 뒤시 안 좋았던고 한 해에 불이 나갖고 싸악 소각시켜 부렀어. 요 냥반 막 종 데리고 막 욱씬욱씬 산 판에 불이 나갖고 싸악 태와부렀어. 화재를 딱 당해불고 낭께. 그래갖고 그 후로 메엣 백년이 지난 뒤에사 이 냥반 10대손 자손이 태자 귀자, 학선 씨 그 냥반이 여그다가. 긍께 인자 자손들이 머시 넉넉허니 베풀었어야 덕을 본단 말재, 원차 혹독하니 해 나갔기 때민에 골몰해버렸재, 싸악 골몰해버렸재. 골몰했다가는 인자 다행헌히 학선 씨 그 냥반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 갖고는 태어나 갖고 그 냥반이 원차 내 친척만 할 것이 아니라, 타성이라도 배고픈 사람들 기어코 도와주고 외짐치라도 하다 못해 콩대물이라도 갖다가 배고픈 사람들 먹이고 적선을 하셨재, 그 냥반이. 그래서 우리마을에서 이 아래 들어온디다가 공적비를 한나 세와드리고… 이런 것이 화재가 딱 당해불고 전부 타분 께는 쩌그다가[무수봉 아래를 가리키며] 집을 한나 늦게사 갑오년에 61년 2년 되았네, 여그다가 그 집터에다가 쪼끄만 재각을 한나 지었어. 그때 재 집 [재]자를 부치자네 정자 [정]자를 붙였어. 정자마니로 이 정자 정자 정(亭)자. 그래 갖고 지어갖고 본께, 글치게도 순전 울력으로 인간들이 글쩍에… 열여섯 집이 이 동리에서 살았는디, 여 건너까정 합해서 열여섯 집이 살았는디. 저 집을 갑오년에 질랍시롱 열엿세 날 팔월 열엿세 날 보름날 하래 쉬고 그 이튿 날부텀 울력으로 시작해 인자. 그러면은 문전이 없응께 저 순지 수남 씨랄지 여 덕제 우산냥반 아버지 살아계실 적에도 이런 냥반들이 나무로 전부 기증을 해줬어. 재각 질 적에 하고 이 저저 우게 문 씨 오감 씨 아버님 경관이 조부님이 이 냥반 같은 이가 나무를 지원해서 재각을 지었재. 지어놓고 난께 이 냥반이 문전을 장만하면 저 귀퉁이에다가 쪼그만 거 한 서대지기나 한 60평 가차이 논다랑치가 하나 있어. 그 논다랑치를 사서 거다 방죽을 하나 파거라, 시방 아까 그럼 방죽 유래를 이 애기를 하는 것이여, 방죽을 하나 파거라. 그럴 적에는 요그 요 동네 가운데로 앞으로 산골물 한나 내려와, 산골물이 내려와 쑤욱 내려감시롱. 먹지는 안 해도 전부 손빨래 하고 모도 전부 요로코 전부 해나간디, 가물먼 또 그도 안 내려와. 그랑게 저장을 물을 저장을 해갖고 동네가 화재가 나면 그 불을 끄곳고롬. 전에는 바게쓰로 전부 갖다 날랐거덩 그 전에는 소방대가 어디가 있어. 그런 냥반이요 그렇게 멀리 내다보고 훌륭한 양반이었어. 그래서 방죽의 유래를 시방 내가 얘기해준 것이여.

 

 

 

 

 

 

 

                                                    대반마을

 

 

 

 

 

 

 

 

 

 

 

자료번호 / 06_12_01_FOT_20160628_LTS_0001
제보자(구술자) / 임태삼(남, 81세, 대반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