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안양면

[안양면] 사촌 앞 바다에 수장당한 보도연맹 사람들

장흥문화원 2017. 9. 25. 14:25

 

 

 

사촌 앞 바다에 수장당한 보도연맹 사람들
▶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은 보도연맹 관련 사람들을 두 사람 세 사람씩 엮어가지고 사촌 앞 바다에 수장해 죽였다. 아버지는 인공 시절 반강제적으로 부역을 했는데 수복 후 피신하여 산에 숨어 살다가 경찰의 총을 맞고 숨졌다.

 

 

6월 8일이에요. 6월 7일 날 지금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 다 그 안에 다 잡어 가가지고 경찰서에 가둬놨다가 음력으로 6월 8일 날 저닉에 막 둘이 석 서이 석 엮어가지고. 수원서 그때 그 이양수씨라고, 그 배가 쌀을 실고 부산을 다닌 배가, 그때 배로 해서는 한 100톤 가차이 된 배가 있었어요. 그 배에따 싣고 가서 여 수문 앞 바다에다 전부 기양 빠쳐서 수장시켜 죽여부렀어요. 수장시키고 내가 알기로는 총까지 쏴부렀다는…. 그래가 그에 시체를 찾으러 장흥군 사람들은 전부 우리 부락뿐만 아니라. 우리 부락은 네 사람인데 요새 조금 알아보니까 용산면 풍길 같은 데 쪼그마한 부락에 여덜 분이드만. 장흥경찰서에서 전부 인자 요쪽에다 보도연맹 가입된 사람 전부 수장시켰죠. 그래 시체를 못 찾았어요. 못 찾고 심지어 우리 숙부님도 그 옛날에 복송나무를 깎아가꼬 묘를 썼어요. 지금도 인자 뼈는 없고. 전부다 지금 여 장흥군 사람들은 음력으로 6월 7일 날 제사를 지냅니다. 8일 날 죽었기 때문에 하루 앞당거서. 우리 숙부님은 옛날에 인제 일본 가서도 공부했지만은 젊어서 가셔갖고. 내가 알기로는 고영환씨 초대 국회의원 나올 때 뭐 저 선전부장으로 기용이 되가꼬, 살려준다고 뭐 해가꼬 선전부장도 하고 댕기고. 키꼴하고 참 남자치고는 멋있게 생겼어요. 그리가지고 했는데 지금 내가 그 관계 조금 압니다. 왜 아냐면은요 한 그때 한 상당히 오래됐지요. 그 머이냐 노무현 정권 때 그것을 보도연맹에 가입되가꼬 6·25 사변에 돌아가신 분들을 신고를 하라는 얘기가 있다고. 어떤 모 젊은 사람이 자기 아버지도 그 얘 나놓고 돌도 안 되서 며칠 만에 그 양반 돌아가셨는데. 그 얘가 어디서 듣고 와서 그런 얘기를 해서 내가, 우리 조카 인자 우리 작은아버지는 아들 하나 낳고 돌아가셨는데 그것도 그 동생이 공무원 했어요. 공무원 하고 면에 계장까지 했는디 머리가 인자 아파가지고 죽고 그 아들을 지금 데리고 내가 인자 갔어요. 내가 군청에 가서 물어보니까 중앙에서 나왔다고 두 분이 나왔든마. 그래서 그때 당시 우리 부락 네 사람도 전부 신고를 하고 또 나도 거기에 개입이 돼있어요. 왜 개입이 돼있냐 하면은 저희 아버지는 그때 당시 순천 지금 그 깔대밭 유명한 대대어업조합의 서기로 있었어요. 왜정시대 때 서기로 있었는디 인자 해방과 동시에 여기를 이자 놔두고 집에 다녀로 오다가 우리 그 숙부님 때문에 경찰에 잽혀가지고 한 달 간 인자 유치장 생활을 하고. 여기 와서 인자 부락에서 그때는 뭐 살만했든가 농사도 좀 인자 할아버지가 갖고 있는 거 짓고. 또 뭐 상당히 거 운동신경도 발달… 또 놀기를 좋아해갖고 보성에서 강영옥 씨라고 옛날에는 무당. 그란디 보성 조상현 씨처럼 거 판소리 그 유명하신 분을 그 양반을 모셔다가 여기서 또 부락 젊은 사람들하고 판소리를 배우기도 하고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가. 그란디 우리 아버지가 옛날에 말 들어보면 단거리 선수로도 나가고 정구 선수로도 나가고 옛날엔 정구라고 했잖아요, 테니스를. 그래서 했는데 6·25 사변으로 그렇게 되가지고 인자 밀고 내라가지고 수장시켜분 다음에 인민군이 내려왔잖아요. 인민군이 와서 인자 반강제적으로 부역을 시켰죠. 시켜 갖고 얼마 안 있다 9월 달에 수복 됐지 않습니까. 수복되니까 인자 어차피 그 사람들한테 하니까, 엥기먼 죽을줄 알고 인자 피신을 한 거지요. 피신을 했는데 그것이 집으로 다니다가 안 된 께 산이로도 갔다가 하다가. 그때 당시 그 여기 안양면에 유지들이 모도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수를 하면 산다, 해가지고 여기서 사람을 자수하라고 산에도 보낸 사람도 세 사람을 여기 장수뿌락 뒤에서 사살을 해부렀어요, 경찰이.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 집에서는 안 오니까 궁금해 하고 있는디. 그 부락 사람들이 그 뒤에 한 몇 개월 뒤에 나무를 하러 갈라고 보니까 마악 냄새가 나고 이상해서 가보니까 세 사람이 다 총 맞어 갖고 죽어갖고 있었다, 그래서 사촌사람들이다, 그래서 거기서 세 사람을 찾아다가 한 일도 있고. 또 저희 아버지는 골치산이라고 여기 큰산, 보성하고 경계된 산이 있어요. 그 산에서 있다가 자수를 할라고 인자 같이 댕긴 사람이 몇 사람 있었는 갑디다. 가서 내가 알기로는 이 요곡 사람이라 그러는데, “가서 사회 공기를 좀 알아봐라.” 하고 보냈는데 그 사람이 인자 집에 와서 보니까 “너는 여기서 그 사람들을 고발하고 자수를 하면 산다.” 그래가지고 경찰서에다 고발을 했어요. 고발을 해부니까 경찰서에서 나가서 거이 정확하니 있는 데를 아니까 경찰들이 나가서 둘러 싸갖고 인자. 그때 당시 물론 자수를 하락 했는가 안 했는가, 나는 모릅니다. 나는 모르는데 자수를 안 했든가 내삐다가 인자 사살이 됐어요. 그래 인자 우리 집에도 우리 아버지 자가, 인자 이름을 하면서 경찰서에서 구전으로, 우리 할머니들 말입니다. 할머니들이. 이렇게 해서 “골치산 어디에 가면 시체가 있으니까 찾어다 묻어라.” 해가지고. 지금 두 분 다 고인이 됐습니다만은 김중인 씨라고 그 영감님하고, 박재선 씨라고 두 분을 사가지고 가서 인자 우리 할머니들하고 식구들 가갖고 찾아 왔어요. 찾아와가지고 인자 나는 집에가 있는데 그런 얘기를 듣고, 인자 빨리 나와 보라고 그래서 인자 우리 어머님하고 가서 봐 꺼든요, 직접 아버지를. 그런디 뭐 지금도 눈에가 선 합니다만은 이 허리띠 여기를 총을 맞았는데 그 즉시 안 죽고 인자 살아있었든 모양이에요. 그래 양발을 한쪽 벗어가지고 여기를 막었드라고요. 지금도 이냥 사진처럼 눈에가 퍼라 거든요. 인자 그런 세상을 우리들이 살았고 엄청나게 간접적으로 학대도 받고 그랬죠. 지금도 그것이 안 돼서. 그때 당시 노무현 대통령 때 얘기를 했던디 우리 장흥군으로는 연락을 안 했어요.

 

 

 

 

 

 

 

 

 

                                           사촌마을 앞바다

 

 

 

 

 

 

 

 

 

 


자료번호 / 06_12_05_MPN_20160811_SSM_0002
제보자(구술자) / 손성명(남, 77세, 사촌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