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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면

[안양면] 동학혁명 때 모래기라 불리며 큰 피해를 입은 모령

장흥문화원 2017. 9. 25. 14:53

 

 

 

동학혁명 때 모래기라 불리며 큰 피해를 입은 모령
▶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려는 관군이 미륵댕이 주막에서 모령을 찾으려고 물으니 수양 밑에 마을이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관군이 잘못알고 수양 아래 조그만 마을인 하양으로 쳐들어가 마을주민들 다수를 학살했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모령마을 사람들도 다수 희생을 당했다.

 

 

동학 때 우리 마을이 어뜨게 해서 피해를 봤냐면은 그 인자 우리 마을을 칠라고 왔어. 오다가 미륵덩이라고 있거든. 장흥하고 안양하고 경계에 미륵덩이 있제, 기산 그 옆에. 거기 와서 주막에 와가지고 모령이라는, 그란께 그때는 동학 때는 모래기락 했어. 모래기가 어디냐 그란께 수양 밑에가 모래기라 그러니까. 수양 밑에가 하양이라는 데가 있죠, 거 쪼그만한 마을 여그 여 저 사장나무 있고. 그 동네가 피해를 무지하게 봐부렀어. 쳤어. 모래기라 한께, 아니 수양 밑에라 하니까. 그르케 피해를 보고. 우리 마을도 동학 때 피해를 봐갖고 마을 이름이 모령이 아니라 모래기라 했어, 모래기. 그라고 수양은 수세, 그라고. 모령은 모래기. 그래가꼬 그 후로 행정구역이 생김시로 모령이라고 이름이 바까졌어. 지금 장흥 가 있는디 고광팔 씨라고 그 할아버지가, 우리로 하면은 징조(증조) 할아버지거든. 광팔 씨가 거가(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지금 올려 있어. 모령리 고광팔. 그라고 우리 5대조 할아버지가 우리 제실에 지금 저 5대조 할아버지를 별도로 인자 제실에 모셨거든. 동학 때 그 냥반도 활동을 해가지고. 그래갖고 비에가 기록이 되아 있어 지금. 이따 가보먼 그 비에가 딱 기록이 나와 있고.

 

 

 

 

 

 

 

                                                    모령마을

 

 

 

 

 

 

 

 

 

자료번호 / 06_12_05_FOT_20161201_KYD_0001
제보자(구술자) / 고영돈(남, 85세, 모령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