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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회진면

[회진면] 원님밥상 동학민요

장흥문화원 2017. 11. 16. 10:16

 

 

 

원님밥상 동학민요
▶ 장흥 회진 덕도 신상리에 살았던 한승원 선생이 어머니에게서 들었다는 노랫말 이야기다. 벽사 원님 밥상에는 콩잎 반찬이 12가지요, 만호 원님 밥상에는 감태 반찬이 열 두가지라’는 내용이 그것. 이 노랫말이 나오게 된 계기는 장흥에 장흥부사, 벽사찰방, 회진만호, 이렇게 세 권력자가 살고 있어서 백성들을 수탈했기 때문에 유독 장흥동학이 성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석대들전투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우리 어머니가 어린시절에 불렀던 동요를 나한테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것은 동학하고 관계가 아주 깊은데,
‘벽사 원님 밥상에는 콩잎 반찬이 12가지요,
만호 원님 밥상에는 감태 반찬이 12가지라.’
만호는 회진, 회진에 만호가 있었어요. 그러고 여기 원도리, 옛날 교도소 자리, 거기에 벽사역이 있었어, 벽사역. 벽사역은 순천에서 해남까지 그 역들, 역승역들이 여덟 개 역이 있는데, 그 여덟 개 역을 거느린 역이 장흥 벽사역이라. 그니까 벽사역이 굉장히 컸지. 그러니까 벽사역의 찰방 원님의 권세가 어떻게나 컸던지, 그렇게 잘 먹고 잘 살어서 콩잎반찬이 12가지 정도니까 얼마만큼 진수성찬을 먹고 살았것어. 그러고 회진 만호는, 만호 벼슬아치가 다스렸던 건데, 그러니까 회진에 만호가 살았으니까 덕도도 그 만호 관할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만호 있고, 벽사원님 있고, 그러고 지금 장흥 법원자리, 법원 경찰서 자리에 부사원님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장흥에는 3마리 호랑이가 살았던 거지. 그 3마리 호랑이가 탐학을 일삼았어. 착취하고, 그랬기 때문에 백성들이 늘 시달리고, 그랬기 때문에 동학세가, 동학이 무성했던 거여. 동학이. 그러니까 강진이라든지 보성이라든지 이런 데에는 1개의 접밖에 없는데, 장흥에는 굉장히 많은 접이 있었다고. 대덕에 이인환접이 있고, 용산에는 이방언접이 있고, 회천에는 구교철접이 있고, 김사겸접이 있고, 이사경접이 있고. 암튼 그렇게 많은 접이 있었어. 그러니까 동학이 굉장히 무성해가지고 동학군들이 일어났을 때 엄청나게 많은 수의 동학군들이 일어났던가 봐요, 그때는. 그러니까 동학군들이 전주로 가서 전봉준과 합세해가지고 공주 우금치까지 올라갔다가 일본군들의 기총소사에 밀려가지고 패망한 다음에 뿔뿔이 흩어졌는데, 장흥으로 운집을 한 거야. 한 3만 명 정도가 운집을 했어요. 그러니까 장흥지방의 동학군들이 워낙 수가 많기 때문에 동학군들을 따라서 외부 동학군들이 몰려들어가지고 그렇게 위세를 부리고, 그래서 이 석대들 전투가 아주 치열하게 그러니까 최후의 횃불이 탔다고 그러죠. 그래서 거기서 워낙 수없이 많은 전사자들이 일어나고, 마찬가지로 일본군들에 의해서 죽고, 그러고 도망쳐가지고 회진이라든지 마량이라든지 이런데서 배 타고 섬으로 전부 다 뿔뿔이 달아나고, 그런 기록들이 있는데, 그래서 지금 석대들에다가 동학군기념관을 만든 거야.

 

 

 

 

 

자료번호 / 06_12_10_FOT_20161201_HSW_0003
제보자(구술자) / 한승원(남, 78세, 신상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