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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읍

[장흥읍] 월산재와 연곡서원 성암 선생님

장흥문화원 2017. 9. 14. 09:44

 

 

 

월산재와 연곡서원 성암 선생님
▶ 월평마을 출신 성암 선생님은 연곡서원에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추렴을 해 월평마을에 비를 세웠다. 우리는 마을 서당 월산재에서 글을 배웠다. 하지만 여자들은 편지 쓰고 연애한다고 서당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

 

 

월산재는 옛날에 우리 마을에 서재를 했는데, 마을과 같이 마을 생길 때부터 서재가 있었어요. 그런디 그 서재를 월산재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로고 그 월산재에서 따온 이름이 지금도 월산경로당이라고 월산, 월평마을 경로당을 월산경로당이라고 하지요. 그런디 월산재에서는 거어 선생님이, 성암 선생님이라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장흥에서는 제일로 글 잘하는 그런 유명한 선생님이었어요. 근디 그 냥반은 월산재에서는 서재를 선생님을 안 했고, 월산재는 신식이라서 최근 최근 서재가 월산재지요. 성암 선생님은 연곡서원, 연곡서원에서 서재를 했는데 그 제자들이 추렴을 해가꼬 계를 만들었어요. 그 계가 동강곕니다, 동강계. 동강계라는 계를 만들어 가꼬 그 계를 늘 식리를 해서 키워가지고 여그따 이렇게 비를 세웠지요. 성암 선생님의 고향인디. 거그는 성암 선생님 제자는 우리 마을뿐이 아니라 장흥군에서는 글 잘한다는 냥반들은 거의 성암 선생님 제자라고 볼 수가 있지요. 거가 연곡서원에서 멫 년 간 하였는디는 잘 모르겠는데 상당히 오래했어요. 오래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월산재에서 다섯 철, 철로 해서 그때 일 년을 한 철로 했거든요. 겨울에 가을 끝나고 겨울부터 서재를 해가꼬 정월 언제까지 겨울철을 그 한 철로 해가꼬 서재를 했어요. 저도 그래가꼬 저도 다섯 철을 했슴다. 다섯 철을 월산재 뿐이 아니라 집 널른 집이, 지금 쩌그 평안양반이라고 그 집이 널루와 가꼬 거그서도 하고. 그래가꼬 다섯 철을 해가꼬 맹상은 논어까지 읽었습니다. 논어까지 읽었는데 논어 한나도 한나도. 제일로 처음에 학이시습침은 불엽여로와 그것 밲에 전혀 기억이 안 나고. 인자 놈이 말을 하며는 저것은 어느 책에서 어느 책에 있는 대학에 있는 문자다, 그런 거는 대개 알겠지만은.

- (성암 선생님이 직접 가르치셨나요.)
우리는, 성암 선생님은 아주 높은 냥반들, 지금으로부터 더 높은 냥반들 거 백 살이 훨씬 넘은 냥반들. 그 냥반이 서재를 한지가 백 년이 아마 훨씬 지냈을 거에요. 그래가꼬 100년이 훨씬 넘은 냥반들 그 제자가, 제자가 백 한 오십 살, 백 한 삼사십 살 이렇게 된 냥반들이 그 냥반들이 제자들이여. 나는 그 쩌그 상금에서 백현돈 씨라고 오셔서 겨울철에 여기서 숙식을 하시고. 그라고 인자 다 끝나며는 이쟈 자개 집으로 가셨다가 또 그 이듬해에 그 이듬해에 또 오셔. 식사는 그 선생들 학생들이 공양미가 있고 그 선생님 공양하는 쌀을 별도로 걷어요. 별도로 거더가꼬 그때 동각에서 서재에 거처한 분이 그 밥을 해줬는디 그 마을에 인자 하인이었제. 동각재기라고 그 사람한테, 동각지기. 그란디 그 사람이 머이냐 쌀을 거더가꼬. 가사 인제 일 년 먹을 치, 한 철 먹을 치를 한 납페 한 말 정도, 선생님 한 말 정도를 아마 드렸을 겁니다. 닷 대에서 한 말 정도. 그래가꼬 한 2~30명이, 한 20명 이상. 그래가꼬 공양미라 했는디. 그라고 선생님 인자 거시기 인자 거 지금 말해서 월급이란디, 그것 보고 머라 했으까, 수업료라고 말하고 머라 했으까. 근디 그거슨 또 별도로 거덨죠. 별도로 거더 가꼬, 보통 쌀로 세 가마니 이상 네 가마니 정도 다섯 가마니 정도 이렇게 줬어요. 그래도 큰 벌이죠, 그 냥반은. 보통 노무 집을 살먼은 일 년 살아봐야 쌀 여섯 가마니 밖에 못 받는데, 거 한 철하고 쌀 네 가마니 다섯 가마니 아마 그렇게 됐을 거에요.

- (그때 학생들은 남자만 가르친가요?)
남자만 여자들은 아에. 아 여자들은 글 배우면 못쓴다고 학교를 안 보내부렀써. 학교를 안 보내불고. 내 동생들도 내가 지금 야든 한난께 내 동생이 일흔, 그때 야든 한난디. 동국민학교가 삼 학년 때 우리가 쩌그 연곡서재라고 연곡서재, 아까 그 성암 선생님이 계셨던 그 연곡서재를 이 학년 때 거까지 다녔고만. 그러다가 삼 학년 때 이리 올라왔는디 내 동생. 그란디 아까 그 말이 비켜가부렀는디 여자들은 워채서 안 보냈냐 하며는 여자들이 뭘 알며는 연애 걸고 그런다고 어른들 당최 무식쟁이를 만들어불라고. 혹시 편지 같은 거 볼까미 편지 같은 거 그럴까미 무식쟁이를 만들어불라고 전혀 학교를 안 보내불고 그래 불었어요. 그런 시상이었어.

 

 

 

 

 

 

 

                                                       월평마을 사장나무 아래에서

 

 

 

 

 

 

 

자료번호 / 06_12_01_MPN_20160906_KKS_0003
제보자(구술자) / 김경식(남, 81세, 월평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