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관산읍

[관산읍] 공예태후 임씨

장흥문화원 2017. 9. 15. 10:59

 

 

 

공예태후 임씨
▶ 장흥이 장흥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 유래에 관한 이야기. 고려 인종 때 태후에 봉해진 공예태후가 이곳 관산 당동마을 출신이라서 당시 영암군 소속 현이었던 장흥을 승격시켜 독립토록 했다는 이야기다. 공예태후는 의종의 황후일 뿐 아니라 의종, 명종, 신종 이렇게 세 왕의 어머니이기도 했다는 이야기와 태어날 당시 꿨던 태몽 등에 관한 이야기다. 또 여장부로 무신정권 시대에 왕들을 지켜 왕위를 안정케 한 이야기도 담고 있다.

 

 

공예태후 임씨는 고려 예종 4년에, 1109년에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에서 중서령 고려 때 중서령이라는 벼슬을 했던 임원우의 둘째딸로 태어났는데, 태후가 태어난 날 밤에 자기 외할아버지가 꿈을 뀌었어. 이위라는 분인데 외자야 이름이. 이위. 외할아버지가. 그 분이 꿈을 뀌니까, 꿈에 황색 깃발이 태후 집 중문에 막 세워져가 있고, 또 그 깃발의 꼬리는 승정전의 지붕 위를 싸고 돌며 휘날리고 있는 것이여. 승정전은 왕궁이여. 외조부가 이런 꿈을 뀌었어. 외할아버지 생각에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어. 꿈에, 그렇게 좋은 꿈이 뀌어지니까. 그렇게 이제 태어난 임씨는 영특하게 자라가지고 열다섯 살에 혼기가 차니까 시집을 가게 됐는데, 누구한테 가게 됐냐 하면 평장사 김인규 아들 지호라는 총각한테 시집을 가게 됐어. 날을 받고 혼삿날이 돼서 지호가 가마 타고 혼례청에 들어서니까, 멀쩡했던 임씨가 혼절을 해 부러. 아파 부러. 혼절해갖고 갑자기 병이 나서 혼절하니까 어떻게 혼례를 치룰 수가 없어. 그래서 이건 후일로 미뤄야지 안 되겠다. 저렇게 혼절해갖고 있는데 어떻게 혼례를 치루겠느냐, 그라고 후일로 미루고 다시 헤어졌어. 태후가 깨어나고 태후 집에서는 하도 이상한 일이다, 해갖고 점을 쳐봤어. 점을 치니까 점쟁이가 하는 말이, 근심할 것이 없소. 이 처녀는 귀하게 태어나서 반드시 왕후가 될 것이오. 그라고 점쟁이가 말을 해. 그러니까 맘을 푹 놨어. 못 쓸 병인지 알았응께. 마음을 푹 놓고 있는데, 이때 마침 인종이, 그때 그 이자겸이가 득세를 한 통에 아주 그 불안한 정국 속에 있다가 거의 안정이 되니까, 수습이 되니까 왕후 간택을 물색하게 됐는데, 이 임씨가 간택이 됐어. 연덕궁주로 맞아들였는데, 인종이 임씨를 궁으로 맞아들인 날 저녁에, 인종 왕이 꿈을 꾸었어. 꿈이 좀 이상하니까, 그 신하 척준경이한테 이야기를 한 거야. 이런 꿈을 꿨는데 해몽을 한 번 해봐라, 이상한 꿈을 꿨다. 그랑께 무슨 꿈을 꿨는데 그래요, 그러니까 인종이 말하기를, 꿈에 임자 닷 되와, 임자는 참깨여, 참깨 닷 대와 항규 서 되를 얻었다. 항규는 해바라기. 해바라기 씨 서 되를 얻었다. 그라고 척준경이한테 꿈 얘기를 하니까 척준경이가 꿈 이야기를 딱 듣고 있더니 임자는 임씨를 뜻한다. 초두 밑에 맞들 임자(字)거든, 임자가. 초두만 띠어 불면 임씨가 돼야. 그랑께 임자란 말은 임씨를 뜻한다. 그런데 임자 다섯 되를 얻었단 것은 임씨가 다섯 아들을 둔단 뜻이다. 분명히 후비가 아들 다섯을 낳을 것이오. 또 황규가 서 되라 한께, 황은 황후 황이오, 황후가 될 황이오. 그라고 규는 임금이 셋 나올 서 되니께 임금이 셋이 거기서 태어날 것이오. 그라고 척준경이 꿈풀이를 해서 줘. 그러니까 아들 다섯에 왕이 셋이 할 것이오, 이라고 꿈풀이를 하니까 왕이 아주 기뻐했다. 대저 인종 5년에 1127년인데, 그때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훗날 18대 의종이 돼야. 그라고 그 아들을 낳았다 해 갖고, 인종 5년에 아들을 낳았는데, 인종 7년에 1129년에 왕비로 승차를 해줘. 연덕궁비에서 진짜 왕비가 된 거야. 당시 장흥은 그때 정안현이어 갖고 영암군에 소속이 됐는데, 인종이 태후 탄생지라 해서 장흥으로 이름을 고쳐 장흥부로 승격이 시켰다. 이후로 19대 명종, 20대 신종을 다섯 형제 중에서 세 명이 왕이 되고, 네 명의 공주를 해서 9남매를 태후 임씨가 생산을 했다.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때 또 무신들이 난리를 쳐. 안 된다,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이제동 그런 사람들이 의종 폐위를 하기 위해서 횡포를 일삼고 난리를 치는데도 태후가 왕권을 완전히 수호를 하고, 아들인 왕의 방패막이를 한 거여. 치마만 두른 여걸 남자다. 그라고 19대에 아들이 명종이 돼야. 그래서 명종 13년에 1183년에 향년 75세로 세상을 떴어. 공예태후가. 그래서 순흥에 안장을 하고 시호를 그때 공예태후로 받은 거여, 죽으니까. 그때는 태후 임씨 그랬는데, 공예태후로 죽으니까 시호를 받고. 죽은 뒤에 20대 신종이 된 거여. 막둥이가, 신종이 된 거여. 그러니까 서방 왕이었제, 아들 셋이 왕이었제. 그런데 인제 신종이 죽은 뒤에 됐응께, 세 왕대의 영화를 누린 거여. 그런 대단한 왕비가 이 고장 당동에서 태어났었다. 그래서 이분으로 하여금 우리 장흥이란 이름도 하사 받고 한때는 목사골이었고 했지만은 장흥이라는 이름을 이분 땜에 받았다, 그라고 지금 기록에 내려오고 있습니다.

 

 

 

 

 

 

 


자료번호 / 06_12_02_FOT_20160804_WCR_0005
제보자(구술자) / 위철량(남, 71세, 와룡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