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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안양면

[안양면] 갈치 뱃속에서 사람 손톱이 나오던 시절

장흥문화원 2017. 9. 25. 16:42

 

 

 

갈치 뱃속에서 사람 손톱이 나오던 시절
▶ 한국전쟁 때 마을이 산속에 있어 밤이면 산사람들이 내려와서 여자들은 고추장, 된장을 퍼가고 남자들은 톱과 곡괭이를 가져갔다. 많은 사람들을 바다에 빠트려 죽였기 때문에 마을 샘에서 아낙들이 갈치 배를 따면 사람 손톱이 나왔다.

 

 

6·25는 삽으로 찍어갖고 저 수댓골이라고 수양 뒤에 꼴창, 거그서 삽으로 찍어불고. 그런 사람, 바로 이 동네 두 형제가 자기 큰형님을 바지게로 짊어지고 갔어, 나 어려서 보면. 그래서 무엇인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통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란디. 나중에 크면서 알고 보니까 삽으로 찍어서 주게, 인공 때는. 경찰들이 자응 경찰이 완도, 청산까지 내빼부렀거든, 6·25 때는. 그란께 우리는 그것도 몰랐제마는 나중에사 알았제. 경찰서가 거까지 내빼부러. 그라믄 그 사람들은 밤에먼 여자들까지 와가지고 고추장 가져가고 된장 가져가고. 남자들은 톱, 꼭괭이, 꽹이, 도끼 그런 거 가져가고. 밤에믄 와. 개만 지스면 무조건 그 사람들 부대여. 그래가꼬 유치로 간다고, 유친가 어딘가 그런 데로 간다카고.
- (그러면 이 마을에서도 좀 아무래도 그 쪽 참여하고 또 그렇게 아무래도 피해도 있고 그런 일들이 생겼겠네요.)
두 사람이 죽었… 세 사람 죽었구나. 종삼이 아버지, 병권 씨. 또 경수 큰 성. 병욱 씨라고는 강진 군동서 사는디 선생질 하다가 저 앞에 저수지에 낚시질 하러 간다 했는디 그날 딱 밤에 맞추고 있다가 와서 잡아가꼬 데꼬가부렀어.
- (누가 잡아 갔어요.)
여그 놈들이제 말하자면 지방 놈들이. 6·25라는 건 뭐냐면, 거기서 막 밀고 왔닥 해도 그 앞에 전부 남로당 박헌영이 그 계열들이 미리 전부 심어나 버렸거등. 우리 공산당 하게, 그라고 댕긴 사람도 있었어. 옛날에 그 쩌 장수동 거시기도 “어야, 공산당 좋다하대.” 그라고 저닉이먼 돌아 댕겼다는 것이 그 노인이. 그런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제, 그 당시에는 해방 직후라놔서. 그래가지고 어느 정도 바람이 거리 살살 불어분 뒤에 “야 이번에는 내려가믄 된다.” 그래갖고 막 내려오니까는 그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저쪽 동네 사람 요 사람이 죽이고 요쪽 동네는 저 쪽 사람이 와서 죽이고. 직접 인민군이 여까지 몇 개월 그렇게 막 뒤에 올라오든 안 하제. 거그 지방 놈들이 천상 과거에 물싸움 했다든지, 술 묵고 화토 치다 어쨌든지 그라면 유감 있으면, “그 새끼 그 동네에 못 쓰겠다.” 그라고. 저 동네는 요 사람 죽이고, 요 동네는 저 사람 죽이고. 그것이지 말야 옛날에. 그런께 철사로 이놈을[양 팔목을 붙이며] 다 묶어가꼬 바다에다 빠쳐서 죽이며는 그 갈치나 뭐 고기를 사오면 손톱이 나오고. 옛날에는 동네 앞에 시암을 부락 사람이 싹 먹거든. 그라믄 거기서 고기를 배를 따머는 그냥 손톱도 나오고 뭣도 나오고 그런다고, 에래서 보먼. 바다에다 빠쳐 죽여 부니까는. 그라고 여그 교동 뒤에 탕수변 거기서는 자동적으로 이렇게 파져 있거든. 이렇게 딱 빠지먼 못 나오거케. 사람이 판 것도 아니고 천연적으로. 그 학송 넘어가는디 거그. 그런데 거그 탕수변이라고 한디는 전부 철사로 묶어가꼬 투욱 미트러 부린께, 딱 빠져분께 흙으로 살짝 덮어불고 그런 곳이여 말하자먼. 그랑게 사람들이 팔월 보름인가 열나흘인가는 집집마다 마당에서 혼, 혼불 그것이 궁그러 댕기다고 그래. 사람이 하래, 하래 저닉에 인민군들이 그렇게 많이 죽여버렸어. 몇 십 명을 죽여버려 안양서. 한 동네 며씨씩은. 우리 동네 한 번에 우리 동네서 둘이가 죽었구마 그랴. 한 사람은 시체도 못 받으구, 종삼이 아버지는. 저그 영암 돈박재 어디서 죽었다, 그 소리만 듣고 거그서 흙만 가져왔겄제. 그라고 나머지는 여그 병권 씨라고 그 형님은 수댓골이라고 여그 수양 뒤에 꼴창, 거기서 짊어지고 오고 발대로. 그 당시에 죽은 사람들. 골치 같은디 산에 가서 죽은 사람도 있고, 나무하러 가가꼬도 그냥 쏴 죽에 버린 것도 있고. 그것은 지금 알고 보면 쩌그 저 거시기 산사람이여. 그것은 6·25 전이제. 6·25 전인디 그거는 나 쬐깐 했을 때니까. 그거이 여수사건 났을 땐 거시여 아마도. 여수서는 최창식이가 상사가 “너는 벌교로 가.”, “너는 제주도로 가.” 그라고 아마 지시를 해, 상사가. 장교도 아닌 것이 지 맘대로 했어. 그란디 그때 우리 동네 이 골목 저 꼭대기 집. 지금 집이 없제만 혼자 사는 양반이 있어 노인이. 그런디 화장실을 가니까 뭔 사람 발이 딱 이라고 있거든, 두 개가. 으트게 노인이 혼자 산디. 그렁께 인자 자기 집안 남자한테 연락을 했어. “먼 칙간에가 발이 딱 봬인다마다”, 그랑께는 지서에다 연락을 했제 그 냥반이. 그라니까 경찰들이 왔어. 아무리 나와도 안 나오니까는 탁 쏠라 한께는 작은 방으로 뛰쳐 들어가다가 맞었다는데, 그 사람이 대덕 사람이었어. 그랑께 그것이 여수사건 때 아마 그랬는 거 같애. 이제 그 사람을 쏘니까는 여기 사립 앞에서 죽었는디. 쇠판이 발에가 들어가 있응게 낫으로 이렇게 탁탁 빼낸 사람도 있었고. 나는 안 봤지만 우리 형들이 그랬어. 나 째깐했고 무섭다고 못 오게 하고. 형 둘이만 거기 가서 보고 그랬는데. 그래가꼬 저기 앞에가 우리 동네 산이 있는데 거기다 묻었거든. 그랬더니 그 뒤로 매에엔 년이 있으니까 대덕서 그 여자가 왔지. 나는 안 봤는디 막 울고불고 야단났다 해서 머시냐 근께, 그 전에 여기서 사람 죽은 사람 그 사람 마누라가 왔다간다고 그래. 그라니까 인자 잠잠해져부닌까는 소문은 났고, 그러니까 여기로 찾으러 왔 것지. 누에고치, 아니 여 고치를 몰제 이렇게 미영 잣는 고치를, 장수동 가서 누에 빼갖고 오먼. 그라믄 고치를 몰고 있으먼 꼭 밤에 이것들이 와. 그래가꼬 인자 애기들 못 보게 하니라고 어머니가 문 널고 말래가 있으먼 즐비하니 앉았어 물래가. 그래가꼬 여자들은 장꼬방에 가서 된장, 고추장 푸고. 남자들은 톱 주시요, 도치 주시오, 먼 꽹이 주시요 그라고. 그래가꼬 뭣 없다믄, 내일 나무 해야쓴 게 애기들이. 없다 그라믄 뺑뺑 돌아댕개. 즈그들 보며는 다 연장 어따 놔둔지 다 알제 잉. 뒤안에 가보면 있고. 그래가꼬 갖고 가불고. 그람 인자 내일 아침에 애기들 보고 우리 집 엊저녁에 산 손님 왔어, 인자 그 손님으로 대접하거등 그때는. 산 손님 와가꼬 막 뭐 가져갔제, 그라믄 우리 집에도 왔어, 그라고.[웃음] 그랑께 쌀 가져 간 것은 곰차놓치 많이 대개는. 그라고 여그서 거리가 머니까는 그 사람들이 유치까지 가든 안하고 천상 여그 월계라고 여그 있거든. 이숭굴 못가서 고당 뒤에 월암 뒤에 거그. 그 부분인지 나무하러 가서 보믄 굴속에서 살았는가 어챘는가 흔적이 있고 그래. 그라믄 어디 산 손님 굴이 있더라, 그라믄 거리 구경한다고 또 끄사고 거까지 올라가고. 어덕 밑에 바우. 뒤로는 인자 여기서 장동, 장평을 통해가꼬 유치로 간다고 남자들을 또 데리고 가제. 잡어가꼬 말하자믄. 거그 굴 파갖고 굴속으로 해서. 호리가다를 파가꼬 호리가다로 해서 안보이게 비행기에서 안보이게 이렇게 넘어간다 그 말이제. 그러다 저러다 인자 전쟁이 끝났제. 땅을 파가지고 굴속으로 이렇게 들어가. 굴이 아니고 이렇게 사람 쳐서 안갈 정도 굴을 판다고. 그 그거이 꽁이로 얼마 파질 거시여. 즈그들 하는 지시가 내려오기 때문에 그렇게 했제. 그래가꼬 그것 한다고 할 때, 고등학교 댕긴 정도나 된 정도먼 모도 거기 가고 그랬거든, 미숫가리 싸갖고. 그랬는디 그라다 저라다 한께는 끝나붓제 전쟁이. 그래가꼬 우리 큰형님도 거 간다 할 때 어머니 아버지가 울고 그랬거든.

 

 

 

 

 

 

 

 

 

 

 

                                                         요곡마을

 

 

 

 

 

                                                         구술자 어르신 안방에서

 

 

 

 

 

 

 

 

 

 

 

자료번호 / 06_12_05_MPN_20161202_SKR_0001
제보자(구술자) / 선경록(남, 76세, 요곡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