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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진면

[회진면] 덕도와 뭍을 오간 뱃사공 이야기

장흥문화원 2017. 11. 9. 09:44

 

 

 

덕도와 뭍을 오간 뱃사공 이야기
▶ 1960년대 중반, 덕도가 간척되기 전에는 나룻배가 덕도와 뭍을 오가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대덕장날이면 덕도 사람들이 한꺼번에 배를 타러 나루터에 나와서 혼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배 타는 인원을 잘 조정하고 배 타는 사람들에게 엄하게 주의를 줘가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 했던 뱃사공 덕분이었다.

 

 

여기가 지금 덕산이고, 덕도라고 그러고. 간척되기 전에는 [바다 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덕도고 여기가 회진반도라고 [정자 쪽으로 손짓을 하며] 그랬다고 그래요, 회진반도. 저기 대덕에서 요렇게 해서 쭉 회진으로 해서 선자로 삭금으로 해서 대덕 가항으로 나오는데 양쪽은 바다의 만이고 해서 여기가 반도라고 했어요. 그리고 여기는 덕도라는 섬인데, 그때 당시 여기가 바다였기 때문에 1965년도에 준공식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은, 그 전에는 바다였기 때문에 유일한 교통수단이 나룻배였어요, 나룻배. 나룻배 아니고는 덕도에 사시는 분들이 뭍으로 나오기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아까침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노둣길이라고 그래요? 덕산에서 수동으로 건너가는 저것이 물이 낫을 때, 썰물 때는 돌로 걸어가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 덕도권의 사람들은 나룻배로 해서 회진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나룻배로 길이가 날랍게 한번 보니까 4~500미터도 안 될 것 같죠? 아주 짧은 거리입니다만은 여기가 물살이 어찌나 셋든지 간에 제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어르신들 얘기로는 여기가 유속이 8노트 정도 나갔다고 해요, 8노트. 시속으로 계산하면 팔팔은 육십사. 한 14.5키로 아워(km/h) 정도로 물살이 쎘던 지역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나룻배로 건널 때 보통 한 사람이 있었는데, 물살이 쎄고 그러면은 바로 못 건너가니까. 물이 흘르면은 가쪽으로 올라가가지고 빗갈래쳐서 빗장으로 내려온다고 해요. 물 내려오는 그놈 봐서 이렇게 이렇게 건너오고 그러는데 그렇더라도 저쪽에 나룻터에 바로 대지 못하고 3~40미터 밀려갈 정도로 물살이 쎈 지역이었다고 해요. 여기가 지금 덕도 다 뚫려서 뺑 둘려 있었기 때문에. 그래 이 덕도 사람들이 여기를 나오려면 나룻배를 이용해야 하는데 나룻배 사공이, 뱃사공님이 성격이 아주 난폭했답니다. 얼마나 난폭했냐면은 조금만 말을 안 들어도, 노긋대라고 하나요? 노긋대라고 하는 게 있는데 그 자리에서 그냥 막 [때리는 모습을 흉내 내며] 치고, 서 있거나 해찰부리면 물장을 쳐서 ‘조용히 좀 앉아라!’ 그리고 욕도 상스러운 욕을 하고, 막 ‘씨발년’ ‘잡놈’ 이런 상스러운 욕까지 다 해가면서 여기에 배 탄 사람들한테 상당히 난폭하게 굴었다고 해요. 그런데 윤병추 [자리에 함께한 청중을 말함] 조합장님도 말씀하십니다만은 왜 그렇게 사공이 난폭했겠느냐? 그런데 우리 조합장님도 실지 타시고 건네오시고 그랬다는데 사고가 한 번도 안 났답니다. 그렇게 물살이 쎄고 그렇게 위험한 지역임에도 사고가 안 났는데, 그 이유는 거기 뱃사공께서 배에 탄 손님들을 엄하게, 이렇게 안전수칙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 나름대로의 경험으로 해서 이렇게 해야만이 이 사고 안 일어난다는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그 해찰을 부리거나 이렇게 장난을 하거나 그러면 욕설을 하고 물장을 치고 이렇게 하도록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또 나룻배가 그러면 사진이라도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 나룻배 생김새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 사람의 증언을 하자 보면은 일방적으로 배는 앞면이 쪼삣하잖아요(뾰족하잖아요)? 그런데 나룻배는 이렇게 나루터에 접안하기 위해 손님들이 쉽게 타고 쉽게 내려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디읃(디귿, ‘ㄷ’)자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디읃자로. 디읃자로 되어 있어 가지고 [아래로 손을 내리며] 여기에 이렇게 계단이 있었다고 해요. 그러면 갓에(가에) 대면은 배를 딛고 올라오고 내려올 수 있도록. 그러면 딛고 올라오면은 이 배가 의자가 갓으로(가로) 쭉 이렇게 있었답니다. 그러면 앉아서 이렇게 오고. 그런데 인제 장날 같은 경우, 특히 대덕 장날일 경우, 저기 덕도 사람들이 한꺼번에 막 넘어옵니다. 그러면 그 배를 서로 탈려고, 사람들이 우 하고 몰려든대요. 배도 그렇게 크지도 않고, 한 길이가 6메타? 한 6메타… 그러고 폭도 2미터 정도밖에 안 되고 그러는데 거기에 그때 당시 사람들이 2~3천 명 이상 살았다고 봐야죠, 덕도에. 3천 명 가까이 살았다고 봐야죠, 60년도에, 인구가. 회진이 86년도 분면 될 때에 인구가 약 7천 명이었는데, 덕도가 한 3천 명 이상 됐으니까요.

- [그때 명덕초등학교 학생들이 600 한 7~80명이 최고 많을 때가….]
그란께 그 쪼그마한 배로 장을 갈라고 거기 3천여 명의 사람들이 대덕장에 나오는데 [수문 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지금은 수문이 되어있습니다만은, 그 나루터에 사람들이 막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거예요. 그럼 나룻배에 승선 정원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잘해봐야 고작 2~30명도 많을 것인데 한번에 탈려고 하면 사공께서 남 욕을 하고, 노굿대로 물장을 치고, 막 그렇게 해가지고 못 오고 그랬는데, 상당하니 한이 서려 있는 그런 지역이고…. 그 다음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면 여기에 저기 뭐냐? 요금, 삯은 어떻게 했겠느냐? 나룻(배) 삯은! 배 삯은 어떻게 됐겠냐 들어보니까 그것보다 우리가 각 가정에서 옛날에… 그것을 나가시라고 하요? 나가시. 나가시를 각 가정마다 냈대요. 인자 1년에 두 번 정도 냈는데, 가을에는 쌀 나오는 쌀! 봄에는 보리! 현물로 해서 나가시를 내고 그도 없고 하면 볏짚! 볏짚을 내기도 해가지고 했고, 외부에서 온 손님들은 현금을 주고 배를 타고 이용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제가 말을 조금 왔다 갔다 합니다만은, 이 뱃사공은 그 이전부터도 사람이 살면서부터 계속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동학혁명 때는 우리 인제 여기 그때도 사공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오면은, 동학혁명 때는 피신을 저기 갔지 않았겠어요? 그러면 저기를 나룻배를 이용해서 건너서 갈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물살도 쎄고 그러는데. 그러면은 일본군이 오면은 나룻배 뱃사공이 안 건너줬다고 합니다. 술이 먹고 취해 버려서 자버렸다거나 어디 가고 없다든가 그렇게 신호를 보내면 ‘아! 관군이 오고 있구나’ 하고 그런 이야기를 우리 조합장님으로부터 제가 들었고, 또 일제시대 때도 일본군들이 덕도로 오고, 그런 일본군들 오면 잘 안 건너 주었다고 합니다. 사공이 인자, 사공은 특별히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고, 손님들이 오면은 싣고 건너가고 이렇게 오고 그랬는데 그런 사람들이 오면, 이렇게 일제 분들이 오면은 안 건너 주고 피신해뿌고 있다가 요렇게 해가지고 그래서…. 아! 지금 와서 보면은 우리 사공이 덕도권에 상당히 숨은 공로자고, 많이 공적이 있었던 분이지 않았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 그래서 우리 지역에서 지금은 이렇게 간척이 되어가지고 그 흔적도 없고, 사공에 대한 역사적 기록도 없고, 그래서 상당히 아쉬운 부분인데 그래서 이 뱃사공에 대한 나름대로 어떤 그런 유래라고 할까? 그런 전설적인 부분들을 정리해서 보존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을 가져 보면서 우리 윤 조합장님이 구체적인 실제로 배를 타보셨고, 그런 부분을 증언해주시면 고맙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진만

 

 

 

 

 

 


자료번호 / 06_12_10_FOT_20160719_YJS_0004
제보자(구술자) / 이제석(남, 56세, 동구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