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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읍

[관산읍] 고려 때 조선장터 신월마을

장흥문화원 2017. 9. 15. 17:31

 

 

 

고려 때 조선장터 신월마을
▶ 관산읍 죽청리 신월마을이 고려 때 원나라가 침입해 려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당시 조선장 터였다는 이야기. 1274년 연합군이 일본을 치기 위해 천관산의 나무를 베어 900여척의 배를 건조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관산에는 또 군마등이라는 곳이 있었고, 회진에도 마장골이 있다고 했다. 신월마을엔 후로는 염전으로 사용됐는데, 그동안 사람이 살지 않다가 염전을 운영하면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고, 이내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고려 때 조선장(造船場), 배를 만드는 곳. 죽청리 신월마을이 조선장이었는데, 1274년에 고려 원종 15년인데, 그때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서, 우리 조선 수군을 징집을 한 거여. 그라고 배를 타고 가야 되기 때문에, 배를 만들기 위해서 천관산 송림을 베어다가 죽청 앞바다에 빠쳐놨다가 그걸로 배를 만들었는데, 1차 2차에 거쳐서 900여 척을 만들었다, 이렇게 전해 내려오고 있어요. 1274년에 1차 정벌에 실패하고 그 뒤에 1281년, 또 7년 후에 2차 정벌을 하면서 려원연합군이 일본 후즈바구를 정벌하기 위해서 고려의 수군과 전선을 징발을 했는데, 그때 전선을 건조하기 위해서 천관산 소나무 아름드리 소나무를 전부 도벌을 해갖고 바다에 담갔다가 그걸로 900여척의 배를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조선장 터다, 그라고 전해 내려오고 또 제주에서 밀을 징발해다가 지금으로 말하자면 군마등이 어디냐면 동초등학교 폐교된 군마등에서 훈련을 시켜가지고 서울로 보내고 또 현지에서 사용을 하고 이렇게 했다고 해서 군마등. 또 회진에 가면은 마장골이라고 있는데, 마장골에서 또 훈련을 시키고, 이 지역에서는 두군데 고려 때 훈련을 시켜가지고 전선에 사용했다 이렇게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죽청 바닷가에 닻돌이 있는데, 그 닻돌은 배가 들어오면 밧줄로 묶는 그런 닻돌인데, 그걸 일본 사람들이 가지고 가 갖고 지금 일본에 보관해 갖고 있어요. 그래 갖고 그거를 사진으로 김재열, 학포 김재열 교장선생님이 일본 여행 가 갖고 그거를 사진을 찍어 갖고 왔더라고요. 그래 갖고 그거를 관산읍지에 닻돌 수록을 해놨어요. 죽청 신월에서 가져간 닻돌이라고 해서 관산 신월마을은 고려 때 조선장 터다. 그 이후로는 거기가 염전이 되야가지고, 우리가 염밭등 염밭등 우리가 지금까지 염밭등이라고 부르는 것은 염전이 거가 있었다, 후로. 그래서 염전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정착해 갖고 신월마을이 생겼는데, 그래서 새로울 신자 달월 자 신월이다. 근자에 근대마을이 형성됐기 때문에 신월이다. 그전엔 선창 바닷가 선창이 조선장이고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고 그래 사람이 안 살았는데, 소금 만들면서 사람이 정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월마을이다, 신월마을은 고려 때 조선장 터다, 이렇게 전해오고 있습니다.

 

 

 

 

 

 

 


자료번호 / 06_12_02_FOT_20160808_WCR_0017
제보자(구술자) / 위철량(남, 71세, 와룡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