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청준
▶ 장흥 회진 진목리 출신의 소설가 이청준이 어린시절 겪은 잇다른 가족의 죽음과 가난에 대한 이야기. 진목교회 야학, 진목동초, 광주서중, 광주일고, 서울대 독문학과를 다니며 성장한 작가의 젊은 생애를 사실적으로 구술해줬다. 집안의 어려운 환경을 문학으로 그려낸 작가의 생애를 실제 사례들을 들어 구술했다.
이청준 선생은 원래 지금 묘소가 있는 갓마을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아래쪽 마을, 거기서 태어납니다. 거기서 태어나가지고 사는데, 총 해서 아버지 어머니, 형 둘, 이청준 해서 8가족이 살아요. 6남맵니다. 형이 둘 있었어요. 큰형이 그때 18살 정도 됐을 무렵 이청준 선생 나이로는 6살 정도 됐을 때 무렵에 큰형이 몸이 계속 아팠어요. 아팠고, 큰형한테 다락방이 하나 있었다더라고요. 그래서 큰형이 책을 좋아해가지고 책도 좀 보고, 일기를 쓰셨데요. 또 어떤 여학생하고 편지도 주고받고 이런 게 좀 있었나 봐요. 그런데 큰형이 하도 아프고 그러니까 집안에 우환이었죠. 큰형을 낫게 하기 위해서 온갖 약을 다 쓰고 이런 상황이었는데, 이청준 선생이 6살 될 때, 막내동생이 갑자기 죽어버려요. 갑자기 죽어버리고 나니까 할머니가 그때 계셨는데, 그랬답니다. 그 당시에는 개만 죽어도 액땜했다는 말을 쓰거든요. 그래서 막내가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느그 큰성 살릴라고 대신 데려갔는갑다, 이랬답니다. 그래갖고 막내가 갑자기 죽어요. 죽고 나서, 막내가 죽었으니까 집안 사람들이 인제, 큰형은 완치가 되고 낫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데요. 근데 6개월도 안 돼서 큰형이 죽습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둘이 죽어버려요. 그러니까 갑자기 그렇게 죽어버리니까 집안 사람들이 울지를 안했답니다. 울지도 않고 그래가지고 그냥 놀란 상태가 되죠. 그러다가 또 6개월이 안 돼서 아버지가 술 먹고 그러다가 홧병으로 돌아가셔버립니다. 6살의 이청준에게는 죽음의 충격이 매우 크게 와버린 거죠. 그래가지고 있는데, 누나가, 둘째가 누나였는데, 누나가 18살이 돼서 시집을 가요. 그게 이청준 선생이 8살 무렵인 것 같아요. 근데 시집을 갈 때 누나가 시집가니까 온 집안사람들이 다 나와서 펑펑 우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막내 죽을 때, 큰형 죽을 때, 그 다음에 아버지 돌아가실 때, 누나를 여의다, 여의다는 말이 똑 같아, 전라도 말로, 여운다 하죠, 그니까 누나 시집가면 여운다 하고, 사람이 죽은 것도 여운다고 그래요. 여의는 거죠. 누나를 여의었을 때, 온 집안 사람들이 그냥 대성통곡을 했답니다. 사람 죽을 때도 안 울던 사람들이 인제 막상 누나 시집갈 뿐인데, 그때 대성통곡을 했다고 그러고요. 그리고 나서 그 집안이 8명의 가족에서 네 명이 남습니다. 어머니와 삼남매가 남은 거죠. 그래가지고 그때 집안이 어려워져가지고, 그 집을 팔아요. 팔고 인제 남의집살이를 하더라구요. 남의집 살다가 이동을 몇 번 해요. 남의집을 붙여 살고 그러다가 나중에 지금 현재 생가로 되고 있는 진목마을 그 집을 삽니다. 그 집을 사는데, 「눈길」이라는 소설이 그 집을 배경으로 나오게 되죠. 그게 실제로 그 집을 팔게 되는데, 이청준 선생의 바로 위 형이 하나 있어요. 그분이 여기 회진에서 살았었는데, 술을 되게 좋아하셨다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 갖고 바닷일을 하면서, 일도 많이 하지도 않으면서 사업 한다고 까먹고, 막 그렇게 실지로는 그랬답니다. 그러니까 집안이 뭐 남아 난 게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그 둘째 형이 이청준 선생이 21, 30살이 되기 전 같아요. 또 술을 많이 먹고 이렇게 하다가 자살을 해버려요. 그러고 나서 집안이 다시 또 어려워진 겁니다. 그래 갖고 그 형이 돌아가시면서 지금 있는 진목리의 집을 또 팔게 되죠. 「눈길」에 보면은 어머니가 동구밖에 와서 기다리가 고등학생 쯤으로 되어보이는 아들이 왔을 때, 나는 이미, 화자, 서술자는 이미 집이 팔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고 불구하고 어머니가 우리집을 놔놓고 너 왜 밖에 있냐 그러잖습니까? 그렇게 해서 다시 집으로 델꼬 와서 뒤주, 뒤주가 있는 집에서 하룻밤을 재워서 따뜻한 밥을 먹여서 어머니가 집이 없는 자기, 이미 팔려버린 집으로 돌아오는 상황이잖아요. 그리고 아들은 매정하게 새벽 버스, 요즘으로 말하면 다섯 시 차 타고 쌩 하니 가불고, 어머니 혼자 인자 오목조목 아들이 딛던 발자국을 다시 딛고 와서 그 산마루에서 눈내리는 마을을 바라보는 것이 「눈길」의 클라이막슨데, 거기서 어머니가 그러지 않습니까 왜 돌아갈 곳이 없었겠냐? 사실 반어법이죠. 없는 거죠. 눈이 하얗게 내린 마을 지붕들이 너무 환해서 눈물이 나더구나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실제로 이청준 선생이 경헙했던, 이청준 선생님의 어머니가 겪었던 일이죠. 그리고 나서 이청준 선생의 소설의 배경이 그것이고, 선생이 초등학교를 회진에서 나와요. 근데 우리 시대가 다녔듯이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다닌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6·25 무렵이고 그래서 선생은 초등학교를 안 다녔습니다. 사실은 안다니고 진목교회, 현재 진목교회가 100년 가까이 된 교횐데, 100년이 좀 넘었습니다. 100년이 넘은 교횐데, 그 교회 옆에가 야학이 하나 있었데요. 야학이 하나 있어가지고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는, 일주일에 한 번이나 가서 가갸거겨 배우고, 1234 배우고 이랬답니다. 그리고 나중에 회덕동초로 편입을 하죠. 편입을 해서 늬 실력이 좀 되니까 4학년이다. 뭐 이렇게 편입 비슷하게 이렇게 학적도 제대로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학교를 마쳐요. 그리고 광주서중 그 담에 광주일고를 나오는데, 다른 또래에 비해서는, 도시 아이들에 비해서는 학교를 10살에 갔어 그 냥반이 인제, 2살이 더 많았어요.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닐 때 본인은 항상 2등을 했답니다. 2등. 공부 잘하는 애가 하나 있었데요. 근데, 그 마을에서는 ‘공부를 할려면 이청준 만큼 해라.’ 그러거든요. 아마 이게 나중에 서중을 꼴찌로 들어갔다가 서중을 1등으로 졸업을 해요. 그리고 광주일고는 수석으로 들어갔다가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 다음에 서울대를 들어가고, 이런 것 이력 때문에 ‘공부는 이청준 만큼만 해라.’ 이런 말이 전설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마을 같은 데 주변에는 ‘공부 할려면 청준이 만큼 해라.’ 그래요. 안 할라면 하지 말라 이거죠. 그게 인제 전설처럼 떠돌고 있는 이야기고요, 그래가지고 선생이 광주서중으로 가는데, 그 전에 음악선생이 부산에서 와가지고, 그 선생을 되게 좋아했더라고요. 기록들을 보면은. 그러면서 그런 어렸을 때 겪었던 모든 게 이제 나중에 소설로 나옵니다. 이청준의 소설은. 서중에 가서 인제 공부를 하는데, 가난하잖아요. 수필에서는 인제 사촌누님이라고 나와요. 거 게자루 저술이 하나 있는데, 어머니가 하도 고마우니까 게를 여름에 게를 한 포대기를 잡어줘요. 똘게것죠. 똘게를 잡어가지고 이청준 선생이 그 당시에는 버스 타고 회진에서 갈려면 회진까지 걸어나가서, 회진에서 버스를 타고 대덕으로 나와서, 대덕에서 다시 장흥으로 나와서 장흥에서 와야 됩니다. 이게 지금은 승용차로 한 시간 반이면 가지만, 그 당시에는 한 여덟 시간 정도 먹혔다고 하더라고요. 텀이 또 있고 그러니까. 여름에 하루종일 그 게자루를 버스에 싣고 가니까 당연히 게자루의 게가 변해버렸겠죠. 그래 갖고 숲길에서는 누님한테 어머니 이거 누님한테 고맙다고 줍디다 그랬는데, 실은 그 게자루가 당연히 그렇게 됐지만, 실은 사촌누님이 아니었답니다. 「눈길」을 쓰면서 그냥 편하게 쓰려고 사촌이라고 했고, 원래는 서중에 같이 학교를 다니는 친구의 어머니 집에 얹혀 살았대요. 시골에서 올라온 애가 공부도 잘하고 그러니까 선생들이 이렇게 힘을 써가지고 가
정교사 비슷하게 그때부터. 그래서 이렇게 얹혀 살아가지고 남의집에 살았더라고요. 그렇게 했고, 서중을 1등으로 졸업을 한 다음에 일고를 간 거예요. 일고를 갔는데, 선생은 평생을 젊잖은 사람으로 살았거든요. 남의 흉도 안 보고 그냥 어디 나서서 연설도 못해요. 그냥. 그리고 강연을 잘 못했어요, 사실. 나중에 순천대 석좌를 오래 하시니까 강의를 좀 하시더구만. 어느 정도 일화가 있냐면은 거도 강연을 몇 번 들어가봤습니다만, 선생은 A라는 말씀을 하시다가 Z로 그냥 갑자기 가 있어요. 그러니까 도무지 갈피를 못잡아요. 저 냥반이 무슨 말을 할려고 그러는가? 그 정도 강의를 잘 못하더라고요. 그런데, 순천대에서도 전설이라는 게 있어요. 거기 선생이 석좌교수를 오래 하셨는데, 한 10년 하셨던가? 선생 정도 이름을 석좌교수로 모셔올라면 인제 어떤 연봉이나 이런 것도 잘 해야 되는데, 많이 못 주니까 한 학기에 아마 몇 번 밖에 안 왔을 거예요. 근데, 선생이 오실 때마다 책보따리를 들고 온답니다, 이렇게. 제자들 줄라고. 다 주고 강의를 하면은 선생 강의를 못하는 것을 아니까 교수들이 내다본답니다. 근데 불안불안하대요. 무슨 말씀을 하신지 하고, 애들이 그런답니다. 강의 재밌었냐 그러면 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요. 왜냐하면 맥락이 없답니다. 그런데 사실 가만히 자세히 들어보면 맥락은 있어요. 그분이 어투나 이게 무엇을 강조하거나 무엇을 포인트를 잡어서 말씀을 잘 못하신 것 같아요. 그냥 나직나직하게 옆에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듯이, 그런 말한 스타일이예요. 아마 그래서 그게 강의하고는 조금 안 맞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고요. 그렇게 불안할 정도로 강의를 못했어요. 근데 그랬던 분이 광주일고 다닐 때 학생회장을 합니다. 그때는 교련이 있으니까 연대장이나 뭐 이런 걸 한 거에요. 도저히 이해가 안됐답니다. 그래서 저도 좀 알아봤거든요. 그랬더니 이청준이 공부도 잘하고 품성도 좋고 그러니까 늬가 학생회장 나가라고 민 거여, 한쪽 세력이. 그냥 떠밀려 나간 겁니다. 학생회장이 후보가 두 명이었대요. 다른 한분이 아 이청준이 나오면 내가 못 나가? 그라고 나왔답니다. 그분도 서울대 나왔는데, 그래 지금 상당히 알려진 변호산데, 그 두 사람이 학생회장 선거에 붙었는데, 이청준이가 돼버린 거예요. 그걸 지금도 들먹거린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그건 좀 기적 같은 것이었다, 왜냐면 연설 한마디도 못하는데, 학생회장 선거에서 이기는 거예요. 근데, 아마 워낙 인품이 좋고 그러셔가지고, 주변에 좋은 학우들이 포진이 됐던 것 같어요. 그래가지고 학생회장 선거를 하고 서울대를 가죠. 근데 선생이 독문과를 가요. 서울대 독문과를 가는데,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고등학교 때 책을 봤는데, 헤르만 헤세라든가 괴테라든가? 이런 독일문학에 심취를 했대요. 그리고 본인은 그때까지 글을 써야 되겠다 생각을 안 했답니다. 독일문학을 공부를 하면서 독일어도 공부하고 그러는데, 너무나 문학이 아름답더래요. 그래서 나는 이 아름다운 독일문학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독문과 진학을 한 겁니다. 독문과 진학을 했는데 인제 학비가 누가 대줄 사람이 없었지요. 그래 선생은 계속해서 과외를 합니다. 심지어 같은 동년배들 과외를 하고, 동년배의 집에서 과외를 하는데, 그래서 선생의 인터뷰 내용 같은 걸 보면은 그런 일화가 많아요. 자기 집이 없는 삶. 자기 집을 이미 잃어버린 집이 없는 삶을, 오늘도 누가 오지 말라고 하면 집에 돌아갈 곳이 아무 곳도 없는 것, 그게 선생한테는 굉장히 각인이 된 사실이었고요. 그게 아마 잃어버린 고향, 잃어버린 낙원, 이미 파괴된 낙원으로서의 고향의식이 그때 길들여졌던, 깊게 베이지 않았을까 싶고요. 또 하나는 죽음에 대한 얘긴데, 죽음은 6살 때부터 여8살 때까지 겪었던 수많은 죽음 그리고 처음 문학을 접한 거 그때 큰형이 죽고 나서 큰형의 온갖 것을 다 읽었답니다. 하다못해 여자하고 주고받은 편지까지도. 그러면서 선생의 죽음의 독특한 의식이 있는데, 어떤 A라는 자가 죽으면 B가 그 죽음을 잇는다는 그런 의식이 깔려 있어요. 소설에 보면. 그러니까 죽음은 아에 사라진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이어지기 때문에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이 돼버려요. 그게 이청준 선생 소설의 바닥에 깔린 것인데, 그게 아주 어렸을 때 체험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리고 또 재밌는 일화는 선생이 독문과를 가니까 마을 사람들이 굉장히 실망을 했답니다. 더군다나 집은 이미 팔렸잖아요. 나중에. 팔리고 문학으로, 문학인으로 살아가는데, 마을사람들이 기대감이 무너지니까 별로 나를 안 좋아할 것이다 여겼대요. 그래 고향을 10년 이상 안 옵니다. 안 오고 밤중에 잠깐 왔다 가고 어머니가 남의 집에 살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그 생활을 계속하다가 한번은 또 고향은 가보고 싶어가지고 저녁 때가 돼서 한번 왔답니다. 회진에 와서 회진에서 걸어서 진목까지 5킬로 6킬론데, 고향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안 되니까, 어두워질 무렵에 들어간다거나. 우연찮게 해가 덜 됐을 때 들어갔데요. 그러니까 나이가 많으신 사촌형님이 굉장히 반갑게 맞이하더래요. 아이고 우리 청준이 왔다고. 그래서 깜짝 놀랐답니다. 고향 사람들이, 나는 그렇게 거기서 늘 이청준 선생은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나 반갑게 맞이한 거예요. 그래서 막 소는 안 잡었지만 닭도 잡고 해서 온갖 대접을 다 해줬답니다. 그런데 다음날 너무나 융숭하게 대접을 받고, 서울 다시 가야 되니까 걸어서 나와서 다시 또 회진까지 걸어갈라고 하니까 좀 갑갑하드래요. 그런데 그 사촌형님집에가 마침 자전거가 있더래요. 그래서 형님한테 말씀드려서 자전거 좀 빌려 탈 수 있을까 라고 말을 할까 망설이고 있었대요. 근데, 그때 열댓 살 된 조카가 그 자전거를 타고 쌩 가버리더래요. 그래서 아이쿠나 자전거도 못빌려 타겄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형님 갈랍니다, 이러고 나왔는데, 형님이 잔깐만 가다려보라고 그러더래요. 나는 갈길이 바쁜데, 잠깐 기다려보라고 그런데, 형님이 말씀하시니까 안 할 수도 없잖아요. 있는데, 쫌 있으니까 앰뷸런스가 한 대 들어오더래요. 그 앰뷸런스가 뭐냐 하면은 그때 회진면에는 택시가 없었답니다. 유일하게 회진의원인가 거기가 앰뷸런스가 있었답니다. 마을 사람들이 급하면 앰뷸런스를 불렀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전화기도 많지 않고 그러니까 아까 그 사촌이 자전거 타고 간 것은 앰뷸런스를 부르러 간 거예요. 그래가지고 생전 처음으로 대절한 앰뷸런스를 타고 회진까지 나와서 다시 귀경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아마 어떤 작가 중에서 앰뷸런스 대접 받어본 사람은 처음 아닌가 싶어요.
자료번호 / 06_12_10_MPN_20161127_LDH_0003
제보자(구술자) / 시인 이대흠(남, 49세, 장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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