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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문림편]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학생 송기숙

장흥문화원 2017. 9. 8. 10:23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학생 송기숙
▶ 송기숙의 집안은 아주 가난했는데 온 식구가 대나무와 볏짚, 쌀장사를 해서 기숙을 학교에 보냈다. 기숙은 항상 손에 책을 들고 다닐 정도로 학구파였다.

 

 

송기숙씨가 여그서 나랑 같이 학교를 댕기면서 인자 그 문학의 소질이 있어서 공부를 해가지고. 그래도 이 부락에서는 송기숙이가 그래도 학교댕긴 것으로는 최고로 낫지, 낫고. 이 부락을 자주 왔었어. 그라고 자기가 태어난 부락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원래 자기가 태어난 부락은 완도 금일면이거든 거가. 그래서 약 한 4살인가 5살 묵었을 때 여그를 왔어. 그래가지고 초등학교 때부터 계산국민학교를 댕긴디. 학교, 국민학교는 나하고 3년 선배여. 그라고 중고등학교도 나보덤 3년 선배고. 인자 여그를 같이 넘어 댕기고. 인자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그 냥반은 아마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머리가 좋고 우차고 아니라, 노력으로 해서 아마 그냥반이 그렇게 되았어, 노력파여. 항상 즈그 집이서 여 재를 넘어 댕겨도 손에가 책이 쥐어져있어 항상. 영어단어도 외고 여러가지 것을 모도 많이 하드만 노력파여. 지금 생각하면 그래. 그래 그냥반이 인자 처음에 책을 써낸단 것이, 고등학교 삼학년 땐가 ‘물쌈’이라는 책을 써냈어 인자. 그 사람이 고등학교 삼학년이고 나는 중학교 삼학년 정도 되고. 그래 물쌈 그것을 인자 내가 읽어보니까 팽야 이 부락에서 일어나는 그 이야깃거리, 그런 것을 해서 모도 물쌈이란 것을 써서 냈어. 논에 물대는 인자. 여그는 저수지가 있는 거이 아니라 양쪽 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을 막고 막고 해서 논에다 너서 이를테믄 농사를 지어묵는 데거든 여가. 그러니까 우게서 물을 많이 너부러도, 밑으로 흘려줘야 쓰꺼신디 안 흘려주고 다른 데로 흘려불고 그랴면 밑에 사람들이 인자 덜 좋다고. 그래서 서로 인자 입절음이 나고 물쌈이 된 거이제. 그래서 그 물쌈 얘기도 나고. 또 그 다음에는 인자 뭣을 만들었냐 그라면은 아마 전남대학교를 학교 재직 중에 그랬는가 어쨌는가, ‘자릿골의 비가’(『자랏골의 비가』)라는 걸 썼어. 그란디 그것도 내가 내용을 읽어보니까 이 부락을 위주로 해서 만들어 낸 거이고. 그래서 그 자릿골의 비가를 보면은 실지가 이 부락에 있었던 일을 많이 비어(비유)해서 내놨드만, 내가 보니까. 어려서, 그란다 내가 생각을 하고 있었제. 내가 학교 댕길 때에 기숙이는 고등학교 나는 중학교, 그라고 댕길 판인디. 여그서 아침에 출발하면은 장흥을 넘어가면은 여그서 한 6키로 되거든. 10리가 넘어 재를 넘어서 댕기믄. 그라믄 지금은 이렇게 질이 있지만은 그전에는 오솔길로 요롷게 요롷게 해서 학교를 댕긴디. 젤로 무서울 때가 안개가 콰아악 이렇게 쩐쩐해가지고 아무것도 안보일 때. 그때 인자 기숙이하고 나하고 둘이 학교를 넘어가면은 존디. 인자 거그는 상급학생이고 나는 하급학생인께 나는 먼저 시간을 끝나고 여그를 넘어와야 쓰고, 기숙이는 이자 고등학생이라나서 늦게 인자 시간을 끝난께. 그 사람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이렇게 오면은 참 그때 무서운 때가 많았었고. 인자 짠뜩 무서워서 못 올 때 같으면은 평화에서 기숙씨 오도록 까지 지달리고 있다, 같이 일케 재를 넘어올 때가 많앴었고. 송기숙이가 원래 완도 금일면 사람인디 즈그 아버지는 송복도씨여, 즈그 어머니는 박씨여. 그란디 거그도 섬 냥반이여, 거그도. 그래가지고 이자 여그를 왔는데 아들만 형제여. 그란디 송기숙이가 형이고 송기숙 밑에 송군수란 사람이 있는디, 송기숙이 보듬더 3살 덜 묵었제. 거가 무인생이니까 3살 덜 묵었는디, 꼽사여. 그래 어채서 꼽사가 되었냐 그랴면 허리에가 여가 종기가 났는디, 그 종기가 계속 곪아 들어가서 척추까지 들어갔어. 그래서 인자 어떻게 그때 당시에는 하다보니까는 척추가 휘어져가지고 꼽사가 되았어, 꼽사가 되았는디. 그 송기숙이 아부지하고 어무니하고 송기숙이 동생하고가 송기숙이를 갈칠라고 아무것도 없어서 여그와서, 논 한 예닐곱 마지기나 벌었을까. 그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살림에 송기숙이를 그때 당시에 대학교까지 보내서 교수를 만들어 냈는디. 그 냥반들 공이 엄청나게 컸다고 보제, 엄청나게 크고. 송기숙이가 처음에 내가 서두에 노력파라 했는디, 내가 같이 학교를 댕김시로 봐도 특별한 머리는 없어. 그란디 원체 노력을 많이 해, 그 사람이. 항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그서 딱 이렇게 책을 들면은, 이 재 넘어 항상 나랑 같이 댕긴디. 나는 인자 저 보듬 덜 묵고 후배나나서 이라고 그 사람을 따라갈라면은 달음박질을 하고 따라가제만은. 항상 손에가, 넘어오나 다시 요리 넘어오나 손에가 책이 안 떨어진다는 거. 노력파. 그라고 모산써도 위아래 부락에서도 송기숙이와 같은 학년들이 두서넛이 있었는디. 거그도 다 전남대 농대 학생도 있고, 송기숙이는 전남대 문과 대학이제 거그가. 그란데 지금도 그 사람들 모산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은 송기숙이는 확실허니 노력을 많이 해서 성공을 한 사람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 내가 봐서도 노력파여. 즈그 아부지 어무니가 송기숙이를 갈치면서 그 학비를 댈라고 대를 여그서, 대발장시도 했어, 대. 대를 여그서 사가지고 배에다 실고 완도로 들어가서 쪼개서 거 해우발 이케 하는데 팔고 한 거 아니라고. 그 대발장사도 많이 하고 즈그 아부지가. 또 거그는 그때 당시에 농사를 인자 안 짓고 그래나서 볏짚장사까지도 했어. 볏짚은 어채서 그랬냐 그랴면 마람 엮어서 집 일라고. 섬에는 농사짓는 데가 적잖애. 암만해도 인자 바다에서만 살기 때문에. 그래 인자 볏짚도 이렇게 사서 배에다 실고 가서 거그서 장사도 하고. 대도 사서 장사도 하고. 쌀도 여그서 농사 지서서 가꼬가서 쌀장사도 하고. 여러 가지 장사를 해서 송기숙이를 갈친 사람이여, 그 냥반들이. 고생고생해서 진짜로 없는 집안에서. 그란디 인자 그 밑에 있는 꼽새 즈그 동생도 머리가 참 좋아. 그란디 인자 학교도 아마 초등학교 밲에는 못나왔을 거여, 그때 당시에. 그란디 거그도 광주로 이사가가꼬 얼마 안 살고 죽었다고 얘기를 하더라고, 2형제 뿐이여.
- (어렸을 때 아이들이 많았을 꺼 아니에요. 여기 당산나무에서 놀기도 하고.)
그라제 인자 어울리기도 하고. 우리들하고 만내면 못 묵은 술도 한 잔씩 하고 노래도 불고. 저 6·25 때 이렇게 동네사람들 청년들 학생들 전부 싹 모여 놓고. 그때 저 거 이북서 내려온 선생이 계산국민학교 둘이가 파견이 되아 항상. 장흥국민학교는 얼마나 되았나 몰라도 둘이가 와서 교장이고 거부하고 필요 없이 그 사람들 지시에 움직이던마, 선생들이. 그래서 인자 그 사람들이 칠판에다 써서 뭐 미국에 양코배기 큰 야단났네, 하고 노랫말도 적어서 하면은. 저녁이믄 그놈 적어가꼬 가서 송기숙이 모도 누구 그 사람들 우리들 학교 댕기는 애기들 전부 모여서 그놈 보고 노래도 불고, “큰 야단났네”하고 하하하. 그런 기억이 있제, 없는 거 아니여 다 있어 잘잘 했을 띡에, 중고등학교 넘어 댕길 띡에.
- (재미있는 성격이었나요.)
아니 그렇게 재밌는 성격은 아니여, 무거와 입이. 그저 저 재미있고 웃으면은 그저 그냥 소웃음으로 슬쩍 웃고 그라제. 그렇게 활달하니 우리들하고 같이 해서 어울리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하는 성질은 아니여. 학구파여 야튼 학구파여, 그 사람은.

 

 

 

 

 

                                                                                                   자랏골의 비가

 

 

 

자료번호 / 06_12_01_MPN_20160810_BSJ_0001
제보자(구술자) / 방송정(남, 77세, 용산면 포곡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