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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장평면

[장평면] 압곡 정씨 부자들이 원통해 한다고 원등

장흥문화원 2017. 10. 19. 16:33

 

 

 

압곡 정씨 부자들이 원통해 한다고 원등
▶ 압곡에는 원래 정씨 부자들이 많이 살았는데, 영암의 최씨가 묏자리를 찾다가 도사의 도움으로 압곡에서 명당을 발견했다. 그런데 명당이 정씨 부자의 뒤뜰이었다. 최씨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서 꾀를 내었는데, 마을 밖 동산에서 굿판을 벌여 정씨 부자들을 모두 마을 밖으로 유인한 후 몰래 명당에 묘를 세웠다. 이후 정씨 부자는 가세가 기울어 원통해 하며 압곡을 떠나게 되었고 대신 최씨가 마을에 들어와 큰 부자가 되었다. 그 때 최씨가 굿판을 벌였던 동산을 정씨의 원통함이 새겨져 있다고 ‘원등’이라 부른다.

 

 

굳이 얘기를 하자고 들믄 여기 오리 [압]자를 써서 압곡 이라고 했어요. 압곡하고 넘엄골(현 부정마을 인근)하고 그 사이에 넘어가는 등이 있어요. 굳이 얘기 하자고 들믄 새까끔이라고 한답니다. 넘엄굴이라고 하면 옛날 촌명을 월동이라고 했답디다. 그래서 넘어가는 다리라 해서 넘엄골이라고 했답니다.
- (넘엄골이 산세가 깊어요?)
굳이 얘기를 하자고 들믄 옛날에 장자(부자)들이 많이 살았답디다. 그라믄 그걸 누가 인정할만한 증거가 있어요. 뭣이냐 하면 옛날 도자기 조각이, 그릇 깨진 게 많이 있어요. 굽이 달린 그릇 깨진 그릇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옛날 장자가 많이 살았던 그것이 근거가 된 것입니다.
- (장자들이 왜 없어졌대요?)
그러믄 새까금이란 데가 있는디, 그 깔끄막하고 넘엄굴 사이가 얼마 안 되는디, 밭이 한 20평쯤 되는데 계단 계단으로 여러 개 이뤄져 이를 장다리밭이라고 했다. 장다리는 무십니다. 무시를 심어갖고 김치 담아먹고 무시를 뽑아다 월동준비를 했답니다. 옛날 넘엄굴에는 물이 좋은 시암이 있었어요. 둥글둥글하게 솟은 시암이 있는디, 아쉽게도 그 시암이 현재는 농업용 방죽으로 되어버렸어요. 그 밑에 악곡은 장가들이 살았던 곳으로 반반한 데가 있는데 장자 집터였어요. 바우가 드믐드믐 있는데 집 주춧돌이라고 했다. 장꼬방 흔적도 남아있다. 어렸을 때 깨진 기왓장을 주워다 빠셔서 유기그릇을 닦았다. 압곡은 장자들이 살았던 근거가 뭣이었었냐. 장자 집터랍디다. 시암(샘)이 좋은디 넓은 바윗돌로 우물가를 에워쌓았다. 장자는 하동 정씨…. 최씨라는 분이 굿을 할라고 멧자리를 잡으러 나섯는디, 헤매고 다니는 중에 어느 분이 [곡]자 들어가는 곳에서 찾으라고 그랬답디다. 어떤 [곡]자라 물으려 하니 사라지고 없었어. 그래서 그분이 도성이라고 했답니다. [곡]자 드는 곳을 찾는디, 장동면 진곡이라는 곳이 있는데 좁디좁은 골짜기인데 10리나 될까요. 멀어요. 그렇게 깊은 골짝에서 그 곳에서 김해 김씨들이 살고 있었어. 김해 김씨 제각이 있어요. 진곡에도 묏자리 할 만한 데가 없었다. 장곡이라는 데가 있어서 그 곳을 갔는데 그 곳에서도 묏자릴 찾지 못했어. 다음으로 우산이라는 데를 가서 월곡을 갔는디 그 곳도 아니었고. 그 건너 음곡이라는 곳도 없고 그래서 결국 압곡(부정마을에서 300m거리)을 찾게 되었답디다. 그 곳에서 기가 막히게 좋은 곳을 찾았어. 그럼 각각 어디였냐? 아쉽게도, 그곳은 바로 장자 집 뒤에 위치해 있었다. ‘원님을 대동하고 굿쟁이를 데리고 굿을 하면 되겠구나’하고 굿을 하려니 쓸 만한 장소를 찾으러 와갖고 여기서 한 300미터 근처가 될까요. 굿을 붙인디 옛날 초랑이들패가 있었답디다. 그곳에 초랑이굿을 붙이고 굿을 하는 도중에 장자들이 굿을 보고 해가 저물었는데, 악곡 사는 장자가 보니 바로 자기 집 뒤라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고민 끝에 가사가 기울어 압곡 넘엄굴 장자마을이 사라졌다. 장자들은 하동 정씨였다. 장자들은 그 이후 넘엄굴을 떠났다.
- (넘엄굴이 어디를 말하는 거예요? 복흥마을이요?)
네, 넘엄굴은 그 초랭이패들이 굿을 한디 묏을 그렇게 써부러서 원등이라고 했답디다. 집터가 남아있다. 현재로서는 연극패로 주민들을 싹 나오게끔 하려고 원등에서 굿을 했는데 그 때 지명이 지워졌는데 원통하다고 해서 원등이 되었다. 주민들을 싹 나오게 할라고 굿을 한 거요. 원등이 영암 영복 최씨였는데 권력가 였는데 묘를 세우고 묘가 보이는 데는 모두 최씨 땅이 되었다. 현재까지 최씨 무덤이 많다. 원등에서 굿을 해서 원등(넘엄굴 밖)으로 마을 주민들을 다 유인해내고 정씨 집 뒤뜰에 묘를 썼다. 원통해서 원등이라고 해.
- (남의 땅에 묘를 쓴 거잖아요?)
지금도 영암 영복 최씨가 권력자였는 갑디다. 그래서 그 영복 최씨가 지금 그 압곡 묘 쓴 자손들이 최씨 자손들이 영암 영복에서 잘 살고 있답니다.

 

 

 

 

 

 

자료번호 / 06_12_07_FOT_20160720_LHG_0001
제보자(구술자) / 이홍기(남, 85세, 복흥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