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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문림편] 조선팔문장 기봉 백광홍의 관서별곡이 발견된 곳

장흥문화원 2017. 9. 6. 17:02

 

 

 

조선팔문장 기봉 백광홍의 관서별곡이 발견된 곳
▶ 기산 봉명재 서당에서 14사람의 과거급제자가 나왔다. 작자 미상으로 치부되었던 기봉 백광홍의 관서별곡이 기산에서 발견되어 조선 가사문학의 전통이 새롭게 쓰였다.

 

우리 장흥에 아까 말씀 드린 일 기산, 이 행원, 삼 평화, 사 방촌, 요즘 오 어산. 인제 그 얘기는 왜 나왔느냐 하면은 아무래도 관서별곡을 쓰신 기봉 백광홍 선생을 필두로 해서 마 과거에 대과급제자가 이 마을에서 열네 사람이 나왔어요. 진사시를 보고 그 다음에 과거를 대과를 보고 중시를 봐야. 지금 우리 사법고시만 합격을 하면 판검사 하는데 그때는 조선시대에는 더 엄격했던 것 같에요. 중시를 봐야 사무관으로 갈 수 있었던 거야, 그때는. 호당(湖堂)에 들었던 사람들이 우리 기산 봉명재 라고 하는 서당에서 열네 사람의 과거급제자가 나왔으니까. 조선시대에는 가히 일 기산, 장흥에 일 기산이었다, 인자 그렇게 평하고. 더더군다나 기봉 같은 경우는 조선 8문장에 드셨으니까. 우리 후손들이 못나가지고, 마 그분은 35살에 요절을 하셔부렀기 때문에 일찍 세상에 내놓지 못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향양리에 장흥 고등학교 교장 하셨던 김희준 선생을 무시할 수가 없어요. 김희준 선생께서 전남대 국어국문과를 가셔가지고 서울대로 편입했지요 잉, 서울대 국문과. 그때 인제 저희 지도 교수가 이상보 교수고 또 그 당시에 조교가 부교수가 김동욱 교수였다고 그러대. 근데 그 양반들이 인제 졸업논문을 써오라 하니까 제게 이모할머니 집이 백태인씨 집이요, 백태인씨 집. 백태인씨 집 서고에서 기봉집과 향촌집을 발견해가지고 1961년돈데. 그 전에는 관서별곡이 실존한 것으로, 내용이 실존한 것으로 그렇게 됐는데 그 양반이 그걸 학사논문에다가 관서별곡 내용을 써가지고 제출한 거야. 이상보 박사도 박사학위를 못 받았는데 기봉집을 가지고 김동욱 교수도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장이구도 그렇고, 정민 교수도 그렇고. 기봉집 하나가지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현재 아홉 사람이야, 우리 국문학계에. 그래서 그때 1961년도 이전에는 우리 한국에 국문학계에서 관서별곡 작자미상, 혹은 그 동생 옥봉 백광훈의 작으로 추정됨, 이런 식으로 학계에 내려왔어요. 근데 김희준 교장선생님 학사논문에 관서별곡을 씀으로 해서 이상보 박사하고 김동욱 박사하고, “너 이거 어서 났냐.” “안양 기산에 가가지고 백태인씨 집이 우리 진외갓집 할머니집인데 책장에서 가져왔는데요.” 그래가지고 KBS 방송국하고 동아일보 기자들이 달라 들었죠. 실제로 기봉의 종손은 백연선씨인데. 태인씨는 기봉의 작은아버지 손인 방자 성 동계공 손인데 한때는 신문에 백태인씨 집이 기봉의 종손이라고 나부렀잖아. 텔레비에 막 나오고.

 

 

자료번호 / 06_12_05_FOT_20161201_BKC_0002
제보자(구술자) / 백광철(남, 63세, 안양면 기산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