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의 서당
▶ 관산읍 각 지역에 있었던 서당, 서실들에 대한 이야기. 구술자가 전해 들은 이야기로 각 지역 서당, 서실, 재각 등의 내력을 설명하고 재각기 그곳에서 강학소의 형태로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이뤄졌다는 것과, 자신의 학습경험을 사실적으로 구술한 이야기다.
관산읍에서 옛날에 운영된 그, 서당, 강학소를 인자 한번 이야기 할라고 그래. 어느 동네가 있었는가 이거. 우리 읍의 서당의 역사는 문헌이 없기 때문에 오래 전에부터 이어져 왔겠제마는, 문헌에 나타나기는 1938년도, 《장흥지》를 하면서 비로소 인자 읍면에 서당 현황이 파악 된 거여 인자, 그래서 인자 처음으로 기록된 것이 1938년 《장흥지》에 기록된 내용인데, 건물을 갖춰 갖고 강학소로 이렇게 따악 있는 곳은 몇군데 안되고, 마을회관이나 마을에 인자 부잣집 사랑방, 인자 이런 데를 이용해서 마을에서 후학들이 공부를 하는, 그런 사당이 대부분인데, 좀 규모가 있이 강학소로 운영된 곳이 우리 관산읍에서는 장천재. 장천재를 천관산 자락에 있는 영은동천 입구에 있는데, 장흥 위씨 문중의 제각이기도 하지만 존재 위백규 선생의 강학소다,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장천재에서 강학을 했고, 또 양춘재, 여기는 상잠산 자락에가 있는데, 방촌으로 가는 고개 중턱에 그 좌측으로 양춘재 제각이 있는데, 여기는 장흥 위씨 천개공 위 덕자 위의 재실로써, 천개공 강학소로 운영돼 왔습니다. 물론 각 마을에서 사당에서 초급 중급반 정도 이렇게 되면 인자 중급, 고급반들이 그런데로 오는, 그런 제각에서 강학을 했고, 또 인자 다산재, 다산재는 방촌 내동마을 산속에가 있는데, 거그도 인제 상잠산 자락인데, 장흥 위씨 인자 존재 위백규 선생의 그 재실인데, 존재 위백규 선생의 강학소로 또 다 인제…. 그래가지고 제일 관산에서 마지막까지 운영된 서당을 했어요, 거기서. 다산재. 그 다음에 인자 또 학명재라고 있는데, 학명재는 상잠산 자락인데, 화곡동이라 해가지고 영광 정씨들 강학손데, 지금은 압해 정씨로 통일이 됐어요. 그 신안 압해로 중국에서 들어왔어. 그러기 때문에 압해 정씬데, 어느 할아버지가 영광으로 가 갖고 그 손이 이쪽으로 왔다. 그래갖고 영광 정씨로 썼는데, 다시 압해 정씨로 이렇게 통합이 이렇게 됐는데, 거기 거 압해 정씨의 강학소가 학명재로 거 했고. 또 영호정이라고 있었는데, 영호정은 영광 정씨 자자일촌 한 학교마을 큰사랑이라고, 그렇게 그 불러왔습니다. 그 정문에서 큰사랑이라고 했는데, 거가 영호정인데 지금은 마을회관으로 활용을 하고 있어요. 영호정에서 정씨 문중 후학들을 거기서 오래도록 가르킨 강학소이기도 하고 예업소이기도 하고 그런 딥니다. 인자 또 관덕재라고 했는데, 여그는 쩌그 남쪽의 그 산서마을, 경주 이씨들 재실인데, 거기서 선생을 초빙해가지고 경주 이씨들 후학들을 거기서 강학을 하는 강학소인데, 그 관덕재는 남부지구, 산서마을 뿐이 아니라 납부지구 마을에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관덕재로 가 가지고 상당하니 늦게까지, 이렇게 운영돼 온 거 강학소…. 그 담에 인자 유천재, 유천재는 남부로 가게 되면 미곡처리장이 있어요. 거기에 평촌마을이 있는데, 그 평촌마을의 그, 후학들을 가르키는 서당이고 또 예업손데, 거기는 광산 김씨 소석 김노현씨란 분이 굉장한 학자였어. 그래서 방촌 분들도 전부 소석 김노현씨의 제자들이여. 그렇게 많은 후학들을 길러낸 곳이 유천재 강학소이다. 그 다음에 인자 상산재가 있는데, 상산재는 장천재 쪽으로 가는 구길로 올라가게 되면 재실이 하나 있는데, 거기는 죽헌 위계창씨란 분이 자손들을 가르키기 위해서 재실을 만들어서 후학을 가르키는 서당을 했어요. 자손들을 가르키기 위해서. 그 다음에 인자 경용재라고 있는데, 견용재는 소재지에서 칠량 2킬로 남짓 가게 되면 와룡마을이라고 있는데, 와룡마을에 서실이 견용재예요. 그래서 와룡마을 사람들을, 후학들이 공부를 하다가 그 견용재가 뜯긴 이후로는 마을 회관에서도 하고 또 부잣집 큰 사랑방에서도 이렇게 하고, 마지막까지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서당을 회관에서 해서 나도 겨울방학 때는 다닌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용전 와룡마을조 60년대까지 이 서당을 운영을 했다, 그 담에 삼의재라고 그거는 쩌그 부용산 밑에 마을인데, 석남동 마을에 있는 삼의재는 동네 후생들을 강학하는 강학소로 그렇게 알려져 있고, 상강재가 있는데, 상강재는 송천 1구 송현마을의 광산김씨들 재실인데, 그 재실에서 마을 후학들을 거기서 서당을 해서 그런 강학소로 알려져 있고, 해서 우리가 신문명이 들어오면서 일제 감시가 쪼금 소홀한 틈을 타서 각 마을의 야학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해 인자, 야학이 되면서 인자 서당이 각 마을에 다 있었는데, 인자 쇠퇴해 가는 거여. 그런데 야학이 아조 성행을 하니까 야학을 하는 것도 일제에서 감시를 하고 못하게 해. 훼방을 놓고 이래서 마을 서당이나 야학소가 차츰 없어지고, 학교가 각 읍면별로 생기면서 서당이 없어지기 시작했어. 그래서 내 기억으로는 70년대까지 한두 군데 서당을 하지 않았느냐? 이런 생각이 들어서 우리 관산의 각 마을의 회관이나 사랑방 큰사랑에서, 각 마을에 서당이 있었제마는, 그래도 강학소 같은 규모가 있는 재실에서 후학을 가르키는 서당은 방금 열거한 몇 개의 재실에서 후학을 가르켰다, 이런 기록과 함께 제 기억을 말씀드린 겁니다.
- (그때 서당에서 스승님하고 학생들하고 배웠을 때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고 했는지를 풍경 같은 거를… 어떤….)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소학』을 배웠는데, 아침에 선생님한테 한 장, 또는 쫌 머리가 있는 사람들은 2장, 이렇게 배우고, 또 자기가 머리가 좀 하면은 세네 줄 배우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나는 한 기억에 한 두 장식 배운 것 같어요. 아침에 밑줄을 배우고, 뜻을 배우고, 그렇게 하면 그 배우는 장수가 완전히 암기 될 때까지 아침 저녁으로 틈 난데로 읽고, 점심 먹고 한 시간 정도는 붓글씨 습작을 한 것 같아요. 붓글씨 습작을 하는데, 큰 글씨는 아니고, 보통 글씨로 습작을 하고, 또 저녁에는 고학년, 지금으로 말하자면 고학년 좀 많은 책을 읽은 어른들로 인해서 시를 짓고, 시를 지으면 동네 어르신들이 인자 시 짓는 날 나오셔서 채점을 하는데, 채점방식이 붓을 딱 먹을 딱 뭍혀 가지고, 붓을 들고 있어갖고, 딱 읽어봐 갖고 맘에 들면 점을 하나 찍고, 그 점이 누구 것이 많냐에 따라서 장원이 나오는데, 재밌는 얘기는 그날 저녁에 술 한 잔 생각이 나, 궁금하고. 그러면 심사위원, 어르신들이 눈을 깜박깜박 해갖고 부잣집 자녀 것을 점수를 많이 줘가지고 닭죽이 나오게끔, 막걸리하고, 이런 장난도 있더라, 그러면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시를 지을 때 살짝살짝 부츰을 해서 가르켜 줘가지고 좋은 시가 나오게끔, 옆에서 딱 이렇게 컨닝을 해주는 거여, 말하자면. 그래갖고 글씨가 좋다고 눈을 깜짝깜짝 하면은 거기에다 점을 많이 찍어갖고 장원, 그러면 그 아부지는 인자 기분이 좋아서, 아들이 장원했다니까 닭 잡고 닭죽 쑤고 술을 막걸리 받고 해갖고 그날 회식을 하고, 이런 기억도 납니다. 그렇게 배워가지고 암기가 다 끝나고 하면 선생한테 인자 강을 바쳐요. 뒷돌라서서 꿇고 그거를 전부 암송을 하고, 무슨 말인고 하고 뜻을 설명을 하면은 틀린 대목은 가르켜주고 다시, 다 됐으면 치사 받고 그라고 다음 장을 그와 같이 또 배우고, 이런데, 그때 나는 『소학』, 한 철에, 한 달에 그래 한 달 방학인데, 한 20일이나 다녔는지 모르것어요. 서당을, 그런데 엉터리 교육을 받은 것이, 그때는 머리가 명석하니까 한번 들으면 입력을 해부러, 기억을 해부러. 소학 다섯째권까지를 읽어분 거여. 한 20여 일 남짓 된 때에. 그래 갖고 하루 아침에는 첫째권부터 다섯째권까지를 암송을 해. 불을 안 쓰고 새벽이면 일어나서 자기가 배운 거를 암송을 하거든. 불 안 쓰고. 그라믄 선생이 다 들어봐. 저놈은 뭣을 읽은 께 틀리냐 맞냐 이거 다 그라고 틀린 대목 있으면 그거를 가르켜 주기도 하고. 그런데 내가 그날은 좀 일찍 일어나가지고, 실력발휘를 해야 쓰것다 그라고는 다섯권까지 딱 암송을 하니까 선생이 탁 듣고 있었등가 아침에 그래도 열심히 했다, 그람스로 치사를 하드라고, 그란디 한 줄도 기억이 안 나. 그러니까 엉터리 교육, 그러니까 하면은 바로 해 바쳐부러 그라면 바로 또 다음장 들어가고 또 바쳐불고 다음장 넣고, 그러고 해갖고 한 20일 동안에 다섯째권까지 읽어 부렀으니 이것이 뭔 이야기 들어보면 이야기 입력하데끼 입력을 해갖고, 바치기만 해부니까 한 줄도 지금은 기억이 안 나부러. 그래서 엉터리 교육을 했다…. 그런데 내 친구는 『명심보감』을 지금도 내 갑에 처음부터 끝까지 쓰고 설명을 다 해부러. 그래 어떻게 너는 『명심보감』을 그렇게 기억을 하느냐? 그러니까 다른 친구들은 중학교를 갔는디, 나는 중학교를 못 갔다 이것이여. 그래서 서당에를 갔는데,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공부를 했다, 그랑께 지금까지 전혀 안 잊어 분다 그것이여. 그래서 내가 읍사무소 있을 때 그 친까 이장을 하는데, 일 보고 나 갈란다 그라고는 인사 하면, 어야 어야 이리 앉어보소. 『명심보감』 한 줄 좀 가르켜주고 가소. 그라믄 항상 거그는 이 붓펜을 갖고 댕겨. 글씨를 잘 써. 종이 줘봐라 그래갖고는 이라고 하늘을 보고는 효행편을 하까 성심편을 하까 뭔 그라고 따악 하다가 첫줄만 생각나면 조르륵하니 딱 써 불어. 그래 갖고 설명을 딱 해주고 가. 그러면 내가 가분 뒤로 내가 모른 게 대고 썼다냐 그라고 명심보감 책을 내갖고 거기를 딱 이렇게 비교를 해봐. 획 수 하나를 안 틀려. 그렇게 정확하게 공부를 한 친구가 있어. 그란디 병 들어서 죽어불었네? 그래 갖고 너무 아까워 몇 년 전에 죽었어. 그란디 그렇게 공부를 해야 되는데, 나는 머리만 믿고 그냥 한번 읽고 바로 바쳐불고 또 배우고, 한 줄도 지금 기억이 안 나. 그래서 엉터리 교육을 나는 받았다, 그런 사례가 있어. 그런데 지금 우리 후밴데, 나이는 나보다 1살인가 덜 먹었는데, 2년 후배였어. 서울서 지금 회사 경영하고 있는디, 그 친구는 지금도 『대학』 『논어』 『명심보감』 출출이여. 거그도 고등학교 때까지 방학 때면 공부를 한 친구거든? 그란디 그 애는 머리가 천재라. 그러니까 절대 안 잊어 불어. 여그 와서 대화를 하면 대학 뭐하고 줄줄줄줄… 외면서 해석까지 싸악 하면서 나는 뭔 말인지도 몰라. 그라믄 막 줄줄이 입에서… 중국을 갔는디 뭔 글이 써졌는디 반초로 써졌다 이것이여. 그랑께 아따 그랑께 글씨 명필로 붓글씨 인자 써놓께. 그것은 사람들이 안디 뭔 말인지는 모르잖아. 이 친구가 딱 봉께 아는 글이거든? 그랑께 이 친구가 이 글을 차악 읽고 해석을 딱 해줘부러. 그랑께 그때부터 다시 봐 자기를. 그전에도 쪼끔 아는 사람으로 아는데, 진짜로 알어 분다, 그라고는 다시 봐부러. 이 한문을 많이 알면은 일반 사회생활을 하는데, 대화를 하는데 훨씬 유리해. 문자를 써가면서. 유식이 나와. 그라고 비유를 많이 하거든, 비유를. 그래갖고 하니까 한문을 배우는 학생하고 안 배운 학생하고 내가 듣는 말인데, 논술을 하는데, 한문 한 학생들이 훨씬 더 논술을 잘한다, 그라고 이해력도 빠르고, 그라고 다시 한문이 부활되어야 된다, 그란디 요새 또 한문을 배운 학생들이 많이 있어. 그래갖고 엊그저께 저그 회진면 애기가, 친구가 여그 와서 채본 받으러 왔어. 그란디, 즈그 손자를 델꼬 왔등만 그란디 화악 이라고 글씨 쓰는데 보고 있더라고, 늬가 좀 관심 있냐 어쩌냐 내가 그러니까, 즈그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3급 봐갖고 이번에 뭐 하나 틀려 불어갖고 실패했다고, 그라면 4급까지 됐다는 거여. 그래갖고 3급은 상당히 많이 알아야 돼. 3급 우리보담 더 많이 알어, 3급이면. 우리보다 훨씬 많이 알어 3급이면, 그런디 내 친구가 인자 그 국어국문학과 교사 정년을 했는디, 삼산 친군디 그 애는 중어중문을 나왔어. 그래 갖고 한시를 많이 읽고 한시를 많이 알어….
자료번호 / 06_12_02_MPN_20160822_WCR_0001
제보자(구술자) / 위철량(남, 71세, 관산읍 와룡마을)
'문림의향 특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림편] 문학병이 든 고등학교 시절과 억불교지 (0) | 2017.09.08 |
---|---|
[문림편] 회진팔경(會鎭八景) (0) | 2017.09.08 |
[문림편] 고산향약계 (0) | 2017.09.07 |
[문림편] 장흥위씨 판서공파 종택과 종가이야기 2 (0) | 2017.09.07 |
[문림편] 장흥위씨 판서공파 종택과 종가이야기 1 (0) | 2017.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