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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문림편] 장흥위씨 판서공파 종택과 종가이야기 2

장흥문화원 2017. 9. 7. 16:02

 

 

 

장흥위씨 판서공파 종택과 종가이야기 2
▶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창고 등 모두 8가옥으로 구성된 장흥 위씨 판서공파의 종택은 2004년에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이 집에는 400년 된 천릉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위치도 좋아서 방촌의 들과 23번 국도가 훤히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고서적과 철피리와 옥피리, 영여 등 각종 유물과 유품이 소장되어 있기도 한 곳이다.

 

 

시방 개수를 하니라고 집을 뜯었다 다시 지었는디 나는 그전에, 과거 그전에 있던 그 집에서 내가 출생을 했어요. 그 집이 어떻게 되었냐, 그 집이 디귿자 집이여, 디귿자 집. 그라고 사랑채가 앞으로 딱 막고 있기 때문에 딱 집이 입 구(口)자. 안 그라믄 대문만 닫쳐 불면 밖에 영 사람이 아이고 못 들어 그렇게 집이 있었어요, 집이. 그란데 그 집을 해방되어 가지고 다시 인자 뜯어 불고 밑으로 시방 현 그 전 있는 집터로 제가 옮겼어요. 지금 있는 몸채 자리가 거(기)가 그대로 사랑채 자립니다. 그라고 안채이던 자리는 그 우게(위)가 또 시방은 텃밭으로 되어 있어요, 거가 있고. 지금 한 400년 된 천릉이 모셔 있고 그래요, 그전에는 터가 세면 천릉 모신다 그래서 있고. 옛날 동헌 터. 여가 동헌이 262년간 동헌 터였지 않는가. 그 동헌 터는 어디냐, 내 생각인디 내 우게(위에) 산이 거가 일 정보가 있습니다. 이 산이 뒤에, 편백 심은. 거길 가서보믄 산이 번번해. 제두자리 제두자리. 나무가 심어져. 옛날 동헌 터가 거가 있었다는 것이여. 왜 그러냐면 내가 그전에 보면 이 앞에 큰 방촌 들이 싹 다 보여, 모두. 싹 다 보여. 그전에 올라가면. 번번하니 제두자리여. 그전에 동헌터가… 뭐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내가 거그다가 초당 하나 지을라 하다 나이가 늙어서 아그들이 말겨서 안 지었소만 거그다가 지어 놓으면 시원하고. 집 앞에 저그 큰길 있지 않어요. 23 국도. 그리가 사방까지 다 뵈어부러. 환히 잘 뵈여. 거 올라가면. 거다가 초당을 지을라다 안 지었어, 못 짓고 말았는디. 것다 편백을 심어가지고, 시방 편백이 한 40년 되어 이래요. 그런 거를… 거서 내려오는 공기가 그야말로 편백 숲 공기라 참 시원합니다, 내려다보고 앙겄으면(앉았으면). 그라고 이제 있어서 그러면은 그 집을 그리 밑에 시방 몸채 있는 자리가 거가 집이 졌는데 거가 있음시로 삼 생과부가 있응께 도승이 집에를 동네 시주를 왔다가 왜 이렇게 세 분이 남자는, 아까도 이야기 되았습니다만은, 있냐 그란께 전부다 벼슬길로 나가불고 우리가 집을 짓고 그라면 집을 위로 올려지으면 벼슬이 끊어지오, 그랬어. 그래서 부인들이, 세 할머니들이 집을 우로 옮겨지었어. 그라니 그 뜯어불은 집이 내가 봤는디 천계 4년인가 집을 지었습디다. 상량에 나와 있는디. 집을 인자 뜯어 지은 집은 전부 모두 구녁(구멍)이 있잖아요? 다시 맞춘 집이라서. 뜯어 올려 이축한 집이 확실하더만. 아, 그런 집을 지음스로 요리 싹 새로 짓고 상량문을 천계 4년을 잇는 상량문을 그때 둬야 하는디, 내가 그때 인자 20세라나서 그런 줄은 몰랐단 말이요, 기와 막어서 헌 나무를 싹 나무 할라고 가져가붔는데 싹 갖다 줬어요. 나무를 줘버렸단 말이오. 상량문을, 그게 참 후회가 되오. 그란디 단 사당. 사당은 안채, 본채 든 다음에 지었는데 1623년이던가?
- [4년, 인자.]
그때 했는디 사당은 시방 그때 2004년도에, 본채는 저거이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지었는디 사당이랑 같이 했는디 다시 또 시방 중수를 했거든요. 개와 할라고 한디, 사당도 다시 지음시롱 본께 거그는 사당을 3중수, 세 번째 진 상량문이 있어요, 이따 보시오, 있습니다. 그래서 아 이 상량문은 다 지음시로 저 우에 영거놨어요, 이따 보면 알 것이요. 사당이 아까 그 밤나무 기둥이었는데 우에가 4칸, 3칸 사이 놨어. 요러큼 요러큼 4칸인데 기둥이 우게 네 갠디 젤 뒤에 있는 기둥은 딱 밤나무요. 밤나무 신주락 안 합니까? 그란디 밤나무란 것이 소(나무)보다 더 좋아. 그때 반은 쇠는 녹아분디 밤나무는 물만, 풍만 안 맞으면 그대로 가만있어. 지금 봐보쇼. 지금도 매끈매끈해. 밤나무 기둥 세 개, 네 개는 그대로 살리 놓고 해왔습니다. 그라고 이런 봇대를, 우게 봇대도 몇 개, 두 갠가 세 개, 그 재목 썼고 앞에 기둥도 두 갠가 세 갠가는 앞에 기둥이 안 썩어서 그대로 쓰고 그랬습니다. 2004년도에 다시 중수한 뒤로 아까 사당에 대한 상량문을 가서 보면, 보면 알 것이요. 그러고 인자 있고…
- [거 앞에가 뭐요? 거기 뭐라고 써졌더마. 현판. 조그만 건물. 그 건물은….]
아! 모종, 모종.
- [용도가?]
용도가 그 뭣이냐믄 시방 그 앞에 사당 정문 앞에다 딱 지은 것은 일테면 다용도실로 쓸라고 했어요. 만약에 인자 내가 죽어불고 이 후는 산업사회가 되고 전부 도시로 가서 산디 그라믄 조상들 제사 모실 사람이 있냐 없냐 그것도 문제가 되고 그래서, 현재 종손만 있는 사당에다 모시면 3칸 사당이니 충분히 모셔지거든, 그러면 제사 지낼 적에 그 모종을, 문을 탁 열어불면 제사를 지낼 수가 있단 말이오. 제사를 지내. 그래서 걱다 짓고 있는 것을 지었어요. 여름 거처라서 밑에 마루 놓고 이따 모종 보시면 알 것이오마는 문 열어보면 사당하고 딱 그 제관들이 거서 제사 지낼 수 있게 비가 오더라도.

- [요새 수월게(쉽게) 말하면 정각.]
정각이오. 그걸 딱 지어놨어. 거기서 정각으로 쓰는디 제사 지낼 때는 거서 제관들이 거서 비가 올 때도 제사 지내도 우게 딱 문만 열면 뵈이니까 그러콤 집을 지어놨습니다.
- [요거(현재 구술자를 비롯하여 다들 앉아 있는 건물) 행랑채. 아, 요거이 행랑채!]
요거이 행랑채고 우게 사랑채는. 사랑채, 행랑채. 사랑채라 했는데 내 친척들, 안식구들 손님 오면은 그리 모시고, 행랑채는 외부 손님들 오시면 이리 모시고. 그래서 사랑채, 행랑채라 그랬습니다. 여는 행랑채고, 사랑채 보시면 알 거예요.
- [부속건물]
[왼편 마당 쪽을 가리키며] 여(기)는 부속, 곳간이어요. 창고입니다.그라고 그 저 무시기 회양 아재가 이야기, 말씀을 하셨는데 음… 영하네, 영하네, 정자 철 그 냥반이 21살에 무과급제를 해가지고 맨 처음에 함평군수를 지냈더만, 함평군수. 맨 처음에, 초임이. 그래갖고 인자 그담에 여러 군데 댕기다 시방 교지가, 내가 46면을 보존을 하고 있습니다. 보실랍니까? 여기 있어요. 내가 사진 찍어놓은 거 다 여기 있어… 앨범에 찍어놨습니다. 그래서 교지를 지금 유물관에 전시를 하고 있는데… 함평군수를 지냈고, 그 다음에 영흥부사 하다가 인자 청나라 회답사로 가셨는데 왜 그라냐 하면 우리가 청나라에다 우리나라 뭐야, 조공을 바쳤던 것이드만. 조공을 바치는디. 그 국경, 국경에서 밤낮 싸워. 청나라는 되놈들 아닙니까. 되놈들 내려와서 뭣을 강탈해 갈라고 해, 막을라고 해서 싸우고 어짜고 그라는데 여기서 반대를 해서 저그 청나라한테 역행을 한다고 그래가지고 저기서 청나라서 불러갖고 뭐라 하고 그랄 판인디, 우리 영하네가 그럼 참 지금 우리는 모르지만 전해온 구전에 의하면 7척 장군이더라 그래요. 아주 키도 크고 무섭게 생겼더라 그래요. 그 냥반을 병조참판으로 해가지고 병조참판으로 벼슬을 줘가지고 회답사로 보냈어요. 청나라로 보냈는디 거(기) 가서도 장수랑 말을 한 자를 안 져. 시방 심양일기라 있거든? 한자도 안 지고 빡빡하게 꼭 옳은 소릴 하지. 거서 한 달 동안을 있다가 인자 청나라 천자지이? 그때. 이 사람이 썩도 잘한다 그래갖고는 그라믄 도로 나라로 돌아가라 할 적에, 아까 이약한 대로 말 한 필에다 안장까지 딱 있고. 그 시방 말의 등허리에 깔았던 인모요가 있어 인모요. 말 등거리다 깔고 안장을 영거. 안장이 그전에 보면 이러고 나무로 되어 참 좋게 되어 있어요. 아, 그놈을 공관에다 놔두고 항시 있었는디, 아 내가 20년간 맽기고 객지에 들어왔더니 그거 다 팔아묵어버리고 없어. 인모요는 시방 있어 인모요가, 인모요가. 시방 있습니다, 인모요는 있고, 그래서 말 한 필 주고 인자 옥피리하고 철피리 하고를 줘서 그래가지고 오셨어요.
- (천자가, 천자가,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 천자가?)
천자가. 하여튼 하사, 하사품이요 그것이. 나는 그리고 하사품인지 확실히 몰랐는데 하사품으로 해서 그것이 인자 뭐시기가 그것이 있더만. 하사품으로 해가지고 왔기 때문에 저, 뭐여. 뭔 서적인가 있더라고. 그걸 성록이, 경찰. 그놈이 그걸 발굴했어. 그래갖고 그것이 천자 하사품이다 해서. 여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영여도 있고. 영여도 오직 우리 집밖에 없어요, 영여가. 혼백을 모신 가마예요.

- [어려서 봤을까? 쪼그만 가마.]
있어요.
- [혼백 모시고 가, 앞에 가, 상여 앞에.]
가마 지금도 있습니다. 도둑놈이 돌라갈라고(훔쳐가려고) 해서 창고에다 여(넣어) 부렸어요. 도둑놈들이 사당 앞에 달아맸는데 돌라갈라 해서.
- [어떻게 방촌은 많이 잃어부렀던지 책도 다 잃어붔어요.]
책도, 책을 79권인가 잃어붔어요. 도둑놈이 와서 문 뜯고 가져가 버렸어. 그래 그놈을 찾을라고 경찰에다 신고를 했는데 찾아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 뭣만 맨들어줘버렸어. 안 찾아줘. 그라고 맨 위에 서울서 책이 세 권인가를 있다고 연락이 왔는데 세 권 그놈을 찾아놨어. 79권인가 몇 권을 잊어버렸는데 중요한 책은 하나도 없지. 그야 돌라다 전부 대학교수들한테 팔아묵었는 모양이여. 싹 팔아묵고 고놈도 어디로 간 놈을….
- [교수들 도둑놈들이여. 존재집 해갖고 연구한다고 해서 ‘빌려갑시다’ 해갖고 교수라 믿고 줘. 흔적도 없어. 그라믄 그 사람 누군지도 몰라. 여기 교수라 한께 믿고 준디.]
아까 이야기한 존재공, 그 분의 명의로 『지제지』라고 있어요. 천관산, 천관산 내력을 전부 써논 지제지가 있어. 그것이 오직 두 권이여. 즈그집 존재 종가에 하나 있고 우리 집 한 권 있는데 그 지제지에는 존재 선생이 해놓은, 일일이 장마다 도장을 다 찍어놨어. 그 도장은 내 집에 있었는데 존재댁에서는 누가 필요한께 줘 불고 몰라 부러. 잊어 부렀어. 오직 우리 집에만 있었어. 그놈을 시방 지금 번역해갖고 모두 나가고 원본은 내가 여기 유물관에다가 전시하고 있습니다.

- [천관산 보며는 지제지를 보면 천관사에만 해도 48전당이 있었어, 집이.]
- (암자 같은 거?)

암자. 그것이 하고 지제지에 싹 다 있어.
- [천관산에는 89암자가 있었고, 천관사만 집이 48채가 있었다, 규모가.]
그라고 아까 고흥 동자 천 그 할아부지가 남해군수를 하다 군수를 벼슬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서 다른 모두 뭐 하시다가 거기서 돌아가셨는데 그 냥반이 시방 천등산에다 모셨는데 그놈을 팔라고 우에다가 묫을 투장을 한 사람이 많이 있었어요. 파내고 그래서 재판한 재판기록도 있고 그럽니다만. 묫자리를 봐가지고 밑에다 반드시 물이 있어서 더 좋다는 뭣이 있다, 있는데 그 저수지가 없었어요. 아, 그런데 자연히 저수지가 생겨부러. 그래갖고 해방 후로 그 밑에다 저수지를 크게 만들어 그놈이 시방 상수도로 쓰고 있어, 고흥서 도양면에서. 상수도. 그것도 묘해. 물이 묫자리로 가 밑에가 반드시 그런 물이 있어야 쓰는디 되어 있는디 없다고 하는디 자연히 그놈을 거거기다 딱 저수지를 만들어 시방 상수도로 쓰고 있어요, 고흥서.
- [음수용인가 몰라?]
거기를 1년에 한 번씩 꼭 시제를 모시러 댕긴다 요새 못 댕긴다 여기서 합배미를 지내고. 거가 논이가 닷 마지가 있어요, 다섯 마지기, 묘 관리하려고. 우리 할아버지, 동자 천 할아버지 그 냥반이 사논 논인디 곡수로 해서 받고 있습니다마는 거기서 1년에 한 섬씩 주고 묘 수호하고 벌초해서 그라고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 [마무리해.]
- (그것도 운치가 있네요, 후손들이 할머니를 이쪽 노승봉 거기다가 쓰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그 냥반 하여간 벌초를 할려면 1년이면 아조 골치거립니다. 거기다 임도를, 내가 임도 신청을 했는데 시방 해방된 지가 이제 내가 정년한 지가 20 올해 8, 9년차인데 도에다, 도에서 정년퇴임했거든요. 도에다 한데. 그때 내야 있을 적에 임도를. 내가 주무를 했거든. 내가 그때 도에서 사무관까지 있다가 사무관으로 11년 있음서 그 안에 부군수로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가고, 또 여기 광주 시청 과장으로 나가라고 하더만 거그서. 거그 서기관 자리여, 그 나가면 뭣할 것이여. 여기서 거기 갈라믄. 도에가 있다 11년 정년하고 왔는데. 뭐 이라고 잊어부러, 뭔 말, 금방…
- [그때 임도를 하셨다, 임도.]
임도를! 내가 인자 산 말이여. 그때 내가 있을 적에 임도가 새로 생겼단 말이여, 내가 도에 있을 때. 그래갖고 임도를 내가 취급을 하고, 전라남도 일대의. 그때 지금도 1년이면 100억 이상 내가 예산을 취급했거든. 사방공사로 사방사업소도 하고 사방 그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갖고 임도도 또 내가 육림 업무를 볼 때 했는데 할라다가 내가 내 집 내 것을 먼저 해서 쓰겄냐? 그만두더라도. 이거 하나 안해줄라녀 그라고 안 하고 왔는디 지금까지 안 해줘. 그래가지고 내 델꼬(데리고) 있는 직원이 현재도 시방 도에 과장을 하고 있고, 또 그분이 하다가 도 삼림과장 하다가 그만뒀는데 그 놈한테 이약을 했어. 했더니 그 놈이 와서 금년에 해준다는데 시방 워쩌께 될 판일까 몰라. 그렇게 임도를 낼라고 애를 쓰고 있는데 해가 올라갈 수가 없어 사람이. 그란데 거기 있다가 고흥 천등사라고 뵈인다는 말이야 거기서. 그란께 건너다가라도 내외간에 모실라고 거기다 높은 데다 뫼를 쓰논께 아주….
- [후손들 고생시킬라고.] [웃음]
아주 큰 뭐시기여, 후손에들. 그 산이 칠정 칠반이여, 겁나게 커.
- [그거 빠졌어요.]
2만 몇 천 평이야.

- [정자 철 감시봉에 모셨는디 비석 할라다가 못가고 체육공원 우에 돌에다 해붔다는 얘기하시오.]

그라고 참, 정자 철. 판서하네 아드님 그 냥반을 인자 비석을 가지고, 그 냥반 묘가 저기 저 관지봉이라 천관산 중턱에가 있단 말이요. 그란데 거기도 이상해. 내가 도에 있을 때 천관산에 불이 났거든….

 

 

 

 

 

 

                                                                       종택 안채와 앞마당

 

 

자료번호 / 06_12_02_MPN_20160811_WSY_0001
제보자(구술자) / 위성열(남, 90세, 관산읍 방촌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