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위씨 판서공파 종택과 종가이야기 1
▶ 관산읍 방촌마을에 자리 잡은 장흥 위씨 판서공파 종택은 1623년에 지어졌다. 14대를 이어온 종가로, 모두 여덟 채의 가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려시대 때에는 동헌 터였다. 파명은 조선 선조 때 가문이 호조판서 벼슬자리에 오르면서 ‘판서공파’가 되었다. 이후 주로 무과 쪽에서 많은 후손들이 활약을 해왔다. 또 호남의 3대 실학자로 불리는 존재 위백규 선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장흥 위씨 판서공파 종택은 방촌리 내동마을 492번지에 위치를 하고 있는데 이 터는 동헌 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시대 동헌 터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전라남도 민속자료 38호로 86년도 2월 7일날 지정이 됐어요, 이 가옥에 대해서. 그전에는 위성렬 가옥, 종손 이름을 붙여서 이렇게 전통 가옥으로 지정됐다가 몇 년 전에 ‘장흥 위씨 판서공파 종택 전라남도 민속자료 38호’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이 집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등 해서 여덟 채로 구성된 집입니다. 3칸 사당도 있고 또 그 장례 시에 신주를 모시는 영여도 지금 보존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리 오기는, 당동에서 태어나가지고 살다가 “38살이라 하셨소? 나이가? 오실 때 나이가?”
- [35세.]
35세 때 인자….
- [분가를 했지.]
분가를 하고 38세에 방촌 동헌 터로 이사를 왔어요. 그라믄 당초에 집은 동헌 그 집이었는가 민가였는가 그거는 모르나, 이 터에 민가였는가 아니면 동헌 관청 집이었는가는 모르나, 지금 현재 앉혀져 있는 안채의 위치에 집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1623년도에 조금 위로 집을 옮겼어요. 상량문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왜 옮겼느냐? 이 종갓집은 그때 3대가 벼슬을 하고 있는 시기라 세 분의 고부가 살고 있어요. 여자들만 살고 있는 거요. 남자들은 객지에 나가고. 그 당시에 관리들은 현지처를 또는 관기를 두고 있기 때문에 본처는 다 집에 가 있는 그런 시절이기 때문에 세 분의 과수 아닌 과수들이 되어갖고 여기서 살고 있는데 마침 스님이 시주를 하러 와서 여자분들이, 여기는 남자가 귀하다고 스님이 하니까, ‘우리들은 지금 과부 아닌 과부로 살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남편들하고 같이 생활할 수가 있것느냐’ 그러니까 스님이 집을 살짝 올려서 지으면 남자들하고 같이 살것다 이러니까 돈도 있고 하니까, 벼슬 하시는 분들이라 집을 우로 올려 앉혀부렀어. 그것이 1623년이여. 그길로 3대
벼슬하곤 쭈욱 벼슬이 끊어져 분 거여. 진짜로 벼슬이 없어져 부렀어, 족보상으로 보더라도. 그렇게 내려오다가….
- (대신 남자들하고는 같이 살게는….)
살게는 됐지.
- [그거 사실이여.]
그런데 그 현재 13대 종손이 그때가 종손이 그때가 해방되던 해요? 45년도? 그러면 종손이 몇 살이나 되셨소?
- [저 20살 때.]
결혼하셨소 그때?
- [아직 안 했소. 21살 되던 해에 결혼….]
해방되던 해에 지금 현재 13대 종손이 그 집을 다시 내려 앉힌 거요. 옛날 집으로,옛날 터로. 그란께 지금 현 터가 옛날 터고 윗 터에서 다시 내려 앉힌 거여. 그러고 종손이 공무원 생활을 하시다가 정년을 하셨는데, 3대 벼슬을 하기 때문에 사당을 3칸 사당을 지었다 이런 말도 있고 종2품 이상의 벼슬이 있는, 그러면 3칸 사당을 짓는다 하더라, 하는 말도 내려오는데 저는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나 하여튼 이 종갓집에는 3칸 사당이 있습니다. 그 3칸 사당은 이듬해 지었어요. 이 터를 위로 올리는 1623년, 올려놓고 그 이듬해 사당을 지었는데 그때에 1624년이니까 지금부터 392년인가 되었어요. 400년이 지금 되었는데 그 사당이 가서 보면 밤나무 기둥을 포함해서 소나무, 그렇게 해갖고 가서 보니까 꺾쇠가 박아져 있어. 쇠로 된 꺾쇠. 근데 그 꺾쇠는 녹아갖고 비실비실하는데 밤나무는 싱싱해, 밤나무 기둥이 몇 개가 있는데. 그래서 다른 것이 부실해버려, 다른 나무가. 그래서 지원을 받아갖고 2004년도에 중수를 했어요. 중수할 때도 문화재는 좌우간 자재가 일부가 들어가야 돼, 기존. 일부가 안 들어가고 새로 지어부면 문화재로 인정을 안 해줘. 그래서 그전에 밤나무 기둥 같은 거는 그대로 쓰고, 그래갖고 다시 중수를 해서 깨끗하니 지금 관리를 하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 방촌에는 사당이 내가 알기로 한 아홉 군덴가 뭐 있었다고 그래요. 열 군덴가? 그런데 다 단칸 사당입니다. 그런데 이 종가댁만 3칸 사당을 지금까지 유지를 하고 있다. 또한 이 터는 고려시대 동헌 터라 이렇게 일컬어져 오고 또 이 밑에는 청화루라, 동헌 앞에 루가, 이 아래 그 누구야 성환씨? 성환씨 댁이 옆에 성환씨 댁이 청화루. 또 저 밑에는 옥이 있었기 때문에 앞에가 옥샘이 있고. 그래서 옥천. 옥량씨 댁은 옛날에 교도소 지금 말하면 감옥소지, 요새는 교도소인데. 그래서 그 감옥소에서 쓰는 샘이 앞에 있는데 지금은 사용은 못하고, 여 방촌이 치소로 있을 때 종가댁은 동헌 터였다. 제가 생각할 때 고려 태조 23년에 940년에 정안현으로 됐거든요. 오차현, 오아현으로 통일신라 때 되어 오다가 고려 태조 23년에 그때가 940년인데, 그때 정안현으로 됐어요. 그때에 방촌에 치소가 되았다, 나는 이렇게 추정을 하거든요. 그래서 고려 우왕 5년 1379년에 하도 왜구가 여기, 제일 가까워 바다가 바로 옆이니까. 그래 침입이 자주 있어서 치소로써 적합지 않다 해갖고 나주 철야현으로 옮길 때까지 여기가 동헌 터였다, 방촌이 그러고 치소였다. 이 방촌이 치소가 되기 때문에 치소를 수호하기 위해서 회주고성이 장천재, 지금 주차장 있는 데서부터 [오른편을 가리키며] 여 저 앞으로 죽 도르막동이라고 하는 데까지 회주고성이 있었어요. 다 허물어지고 일부만 지금 남아있어, 그 잔재물이. 그래갖고 저 안에 들어가면 ‘회주고성지’다 팻말만 문화원에서 갖다, 문화관광과에서 갖다 붙여 놓고. 바로 이 뒷산이 상잠산인데 잠뇌산이라고도 해요. 누에 잠자, 누에 같이 생겼다 해서 상잠산. 그래서 거기는 상잠산성이 있는데 그 성은 그 성은 토성으로 해졌어. 그래갖고 치소를 수호하고 방촌에 들어오는 진입로에 석장승이 있었어. 그러면 옛날엔 산 밑으로 도로가 있을 때 양쪽에 이렇게 석장승이 있는데, 진서대장군하고, 하나는 명문이 없어. 그래서 미륵불이다 미륵이다 벅수다 이렇게 분분하는데, 지금 도로가 옮겨지면서 이쪽으로 옮겨놨을 뿐이지 과거에는 양쪽에, 도로 양쪽에 서 있어요.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는 성문 역할을 했지 않느냐 산성하고 고성하고 성문 역할을 했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좀 해보기도 하고 또 뭐 북쪽이 약하니까 비보를 뭐를 해서 세웠다는 설도 있고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하여튼 회주 치소를 수호하기 위해서 양쪽으로 해서 토성과 산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실되었다. 또 상잠산성 정상에 올라가면 마장 터가 있는데 거기는 말 훈련을 시키고 또 활쏘기 하는 훈련장이 있었다. 그란께 고려시대 때 거기서 훈련을 했는데, 여기서 보면 꼭대기인데 뭐 저런 데서 할 수가 있겄냐, 거기를 올라가 보면은 그때 초분들이 많이 있고 소들을 먹이러 거기까지 소를 끌고 올라가서 소를 먹이고 하는데 그분들 얘기를 들으면, 폭이 한 4~50미터, 5~60미터 된다 그래요, 폭이. 길이가 200미터 정도 되어갖고 충분히 말 훈련장으로서 활용이 가치가 있다 그래서 옛날에 마장 터 말 훈련장으로 활용했지 않으냐 이러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려원년 6년에 회주목으로, 목사골로 승격이 됩니다. 현에서 바로 부로 되었다가 목사골까지 승격이 되어갖고 충선왕 2년에 1310년에 다시 강등이 되어요, 장흥부로. 그렇게 약 한 45년간은 목사골로 또 여 치소가 유지가 된 그런 곳이기도 한데… 임진란이 이전, 1585년도에 당동에서 분가를 해서 다섯 형제에서 넷째 분인데, 그러면 옛날엔 분재기가 있어. 노비들까지 다 하는데, 분재기도 보유하고 계셔. 분재기가 있어. 분재기에 의하면 85년도에 분가를 했어. 곤자 할아버지한테서 다섯 형제가 났는데 거기서 분가를 해갖고, 분가는 했지만은 3년간 더 살어. 큰집에서. 그래갖고 1588년도에 요리 이사를 온 거여. 그런께 이사를 와서 4년 후에 임란이 난 거지. 그래 판서공 덕자 화 할아버지는 임란이 날 때는 어디서 근무를 했냐 하면은 그 냥반이 무과에 급제한 이후로 선조 임금이 피난을 가, 임란 때. 피난을 가는데 그때에 미관말직(微官末職)이었어. 무과 해가지고 그래서 호종을 해, 호종. 임금을 모시고 피난을 간 것보다 호종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에 한 일원으로. 거기에 송강 정철, 서애(西厓) 유성룡 이런 분들도 같이 간 것 같애. 대화하는 걸로 보면은. 같이 가는데, 송도까지 가. 배가 고파. 먹을 것도 없고, 떨어져 불고. 그러니까 판서공 할아버지가 민가에 가서 서숙밥을 구해다가 선조임금한테 드리니까 배가 고픈께 ‘이거이 바로 팔진미지. 어디 팔진미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느냐 정말로 맛있는 밥을 구해왔다’고 이라고 치하를 하고 잡쉈다 임금이. 그라고 의주로 가는데 왜놈들이 수도 서울까지 한양까지 점령을 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금방 임금 잡으러 온다는 소식도 들어오고 하니까 호종하는 이런 사람들이 거의 도망가 불고 뭐 십여 수밖에 안 남어불어. 다 도망가불고. 그러니까 덕자 화 판서공 할아버지가 임금하고 또 서애 유성룡, 송강 정철 있는데 ‘그동안에 국가에서 녹을 먹고, 임금한테 녹을 먹고 호위호식했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가버렸냐?’ 기가 맥힌 탄식을 하면서 ‘칼 한 자루하고 창 하나하고 말 한 필을 주시오. 내가 가서 일격에 달려가서 일격에 왜놈들을 격파를 해야지 못참겠다, 분해.’ 그러니까….
- [죽어도 거서 죽을란다.]
거, 죽을란다, 그러니까 이런 충신이 어디가 있느냐? 그래갖고 선조 임금이 언양 현감을 제수를 해, 거기서. 그라고 서애 유성룡이랑 송강이랑 ‘아주 이런 충신이 어디가 있다냐’고 치하를 하고. 그란디 그 와중에 둘째 형이 덕자 의인데 동생이 임금을 호종하고 피란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도망해서 여기서 거까지 찾아와. 그래갖고 두 형제 부둥켜안고 울면서 충에 대해서 또 우애에 대해서 거기서 하니까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칭송을 해. 우애가, 형제간에 우애가 이렇게 돈독하고 또 충의 정신이 이렇게 높을 수가 있냐, 그래갖고 칭찬을 하고 그래서 언양 현감으로 가 계시면서 많은 공과를 올려. 그래서 거기서 또 그 공과에 의해서 뭐시기가 군자감정? 군자감정이라는 벼슬로 또 승차를 겸해서 주면서 언양을 했는데 지금은 울산시에 흡수가 되어갖고 언양이 그렇게 돼 있더만. 거기도 우리가 다녀왔는데, 거기 동헌 터도 가봤어. 봤는데 복원을 할려고 하고 있더만. 다행히 거기는 민가가 별로 없어. 옛날에 그 동헌 터들이 다수로 있고 그걸 복원을 할라고 계획을 울산시에서 하고 있는데, 울산에서 충의사라는 사우를 지어갖고 임란 공신들을 거기서 배양을 하는데 울산시에서 운영을 해. 그런데 4월 달하고 10월 달하고 두 번 배양을 하는데 덕자 화 할아버지도 언양 현감으로 계실 때 임란 공신으로 인정을 받아서 충의사에 배양돼갖고 있고, 또 일부는 우리들 사우인 죽천사에 또 배양돼 있고, 또 광주전남 오란 공신들을 추모하는, [옆자리 청중(위성열 구술자)에게] 충의사지요? 담양? 충의탑? 아니 뭔탑? 충혼탑? 그 오란의 공신들을 충혼하는 탑을 세워서 거기서 1년에 한 번씩 제를 모시는데, 광주전남에서, 거기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이괄의난, 병자호란, 여러 가지 오란을 하기 때문에 2천 몇 100명이여 광주전남, 그분들을 모시고 기리는 데 모셔져 있고 우리 위씨 성을 가진 분들도 스물여덟 분이 배향 제사를 잡수고 있고… 이렇게 판서공 할아버지가 공적이 있는 것을 인정받고 선조로부터 [옆자리 청중에게] 훈 훈록이 뭐, 뭐였소? 두 가진가 훈록이 있죠? 호성 성부 온정 일등훈 한나하고 진무 이등이요? 이등훈에 책록이 돼있어요. 그런 공훈록이 유물관에가 있는데 공훈록이 있기 때문에 울산 충의사에도 배양되게 됐지, 이런 공훈록이 없으면은 인정을 안 해요. 그라고 언양에서 했기 때문에 언양, 역사적인 그런 기록이 거가 있고 해서 거기에 배양이 되고 있습니다. 판서공 덕자 화는 넷째아들인데 엊그저께도 다섯 분의 형제분들을 말씀하신 걸 들어봤는데 첫째가 덕자 홍, 둘째가 덕자 의, 셋째가 덕자 관, 넷째가 덕자 화, 다섯째가 덕자 후 이래갖고 덕자 항렬이라. 그래서 그 오형제에서 수가 많이 퍼져 분 거여, 위씨들이. 그래갖고 오덕오덕 그래요. 오덕이 다 학문이 출중하고 그 인품이 출중하고 해서 좌우간 누구도 또 너무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하니까 부러워하고 이랬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넷째인데. 그것도 디엔에이가 있는가 아부지가 무관이니까 아들이 또 무과등과를 하고 손자가 무과등과를 하고 지금 현재 우리 판서공파는 경찰이 많애. 그것이 디엔에이가 확실히 무과 쪽으로 있는 거 같어. 그런데 나도 딱 사주를 보면은 경찰 쪽이 맞는다는 것이여, 행정보다도. 내가 생각해도 만약에 경찰에 갔으면 수사를 기가 멕히게 했을 것 같애, 피가 디엔에이가. 판서공파 후손들은 무과 쪽 경찰 쪽으로 많이 진출돼갖고 있어요. 높은 벼슬은 없다 할지라도 셀 수 없이 많애, 경찰들이. 이렇게 그런 디엔에이가 된 것 같애요. 그래가지고 그 후에 호조판서로 추증이 된 거여. 현감 하고 군자감정이 최고 벼슬이였제. 그란디 호조판서로 이런 공훈 때문에 추증을 받어. 증직을 해. 그래갖고 호조판서기 때문에 우리가 판서, 판서파가 된 거여. 판서공파가 그래서 된 거여, 판서파, 호조판서기 때문에. 그래서 판서는 종2품 벼슬 그래서 신도비를 세울 수가 있어 후손들이. 그래서 신도비를, 지금 유물관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 일가에서 신도비는 판서 하네 밖에 없죠.
- [우리밖에 없어.]
없어요, 아무도 없어. 벼슬이 그렇게 없었다는 얘기여.
- [… 해야 하는디….]
거기는 안 했으니까.
- [후손이 없어가지고, 무가 되아가지고 그 냥반 참 그야말로 출중했제.]
그 냥반은 문하시랑 그런께 국무총리를 하셨제, 고려 때.
- [선산, 그란께 신도비를 아직 못 세웠는데, 할라고 그랬는데 그 냥반들 신도비를 세워야 하는디… 그 참, 그 일을 내가 추진을 하고 있어… 그믐월 복상 짓고 신도비 세울라고 추진하고 있어.]
그런데 그분의 아들이 정자 철인데 그분이 호는 만해재인데 이분이 21살 때 무과를 등과를 해요. 그래서 이분은 여러 군데의 현감 이런 벼슬을 하다가 영흥 부사를 가셨어. 영흥 부사를 하셨기 때문에 현직 계급으로는 제일 높아, 우리 일가들 중에서. 문하시랑 그분 빼면은 부사 벼슬을 했으니까. 그래 안 하면 다 인제 증직 받으고 그랬거든. 그라고 그 밑에 벼슬 하시고. 그런께 우리들이 영하네, 영하네 그래요. 영흥하네를, 영흥 할아버지를 우리 사투리로 영흥하네 그래야 될 건데 흥자까지는 발음하기가 어려와 그란께 영하네 영하네, 이렇게 우리들이 불러요, 영하네. 그런데 영흥 부사를 하면서 그때에 또 청나라인가, 명나라였던가?
- [남도 방어사]
아니, 그러니까 그게 하도 침궐이 심하니까 청나라에서 침궐이 심하니까, 심하니까 거그 함경남도 방어사를 겸직을 줘. 그란디 여기서 남도 방어사, 이라고 말하면 이쪽 호남 남쪽의 방어사라고 생각하는데 함경남도 방어사를 겸직을 준 거야, 그쪽 계시면서. 그래서 또 심양까지 다녀오고 모문용이가 청나라 모문용이가 그쪽의 대빵 또…
- (심양 다녀오시면서 일기를 쓰신….)
- [『심양일기』라고 있어요.]
심양에 가서 장군하고 대화를 하면서 얼마나 화술이 좋았는가 학문이 좋았는가 설득을 시키니까 거기서 철피리를 선물로 줘, 철피리. 그래갖고 지금 철피리가 지금…
- [철피리하고 또 옥피리하고 말 한 필 줬어. 또 말 안장, 말 안장까지 준디. 나가 집을 맽겨 놓고 객지에 갔다고 말 안장을 지들이 딱 팔아묵어부렸어.]
당숙이 안장은 팔아먹어 불고….
- […참 좋더란 걸 안게 그걸 딱 팔아묵어부렸어, 온께….]
그라고 옥피리 그거는 지금 소장하고 계시지.
- [옥피리, 철피리 있어.]
유물관에.
- [기증을, 기탁했어.]
그래갖고 그 냥반 아들, 동자 전 그 할아버지가 21살에 무과를 하셔갖고 상원군수, 거제군수, 남해군수 이렇게 역임을 했는데 상원은 평양 시내에 있는 어느 지역이여, 현재. 그 관내에 있는 어느 지역이여, 상원이. 거기서 군수하고 또 거제군수 남해군수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분은 진무일등공신 또 공훈록이 있고, 영흥 부사였던 그 냥반도 진무일등공신 공훈록이 있고. 그런데 우리들이 이야기 듣기로 남해군수 하셨던 남해하네 그라거든 우리는. 남해군수 하셨다고 남해하네. 그 냥반 묘가 천태산이오? 그 산이름이? 고흥, 천 뭐 인디….
- [천등산.]
천등산이여?
- [명산이여, 명산.]
거기 무슨 면이요?
- [고흥 천등산.]
무슨 면? 거 무슨 면입디어?
- [도양면.]
도양면이요?
- [천등산. 천관산에서 뵈여.]
동자 전 할아버지가 지금 고흥 도양면 천등산 상봉에 모셔져 있는데 왜 거기에 모셔져 있는가 이야기를 전해온 이야기를 우리가 들어 보면은 남해 유림들이… 정년할, 하기 전이니까 한 20년 전에 거기를 성묘를 갔는데 그때에 수호하신 분이 80이 가깝더라고 그때. 80이 다 되아가. 그 냥반이 세 번 불난 것을 봤다, 그 천등산에. 근디 할아버지 묘만 안 탔단 것이여. 그 도락만 딱 피해서 불이 나고 불이 나고. 그러니까 그 도양 사람들이 명당은 명당인갑다! 불이 저렇게 날 때마다 그 묘만 피해서 가니 정말 명당인갑다 이랬다고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수호하시는 분한테. 그런데 그 할머님이 돌아가셨어. 어디다 썼느냐? 그 할머니는 모셨냐 하면은. 지금 하발리 산 1번진데 노승봉 밑에여. 지금 하발, 상발로 가는 길목에 그 높은 그 한 200고지나밖에 안 돼 거그는. 그런데 거기에 노승봉 전설이 있제. 그 밑에가 할머니 묘가 있어. 그란께 요새 벌초를 하러 갈라면 땀이 뽀득뽀득 나. 가파른 데다가 길도 없어불지 그러니까. 한데 이 냥반은 왜 거기다 모셨다요? 하고 내가 물어보니까 어르신들 말씀이 뭐라고 하느냐 천등산하고 맞봐 그 높이가, 딱 보이겠금 딱 이렇게. 그렇게 두 분이 보게끔 딱 맞보게끔 하는 위치를 찾다보니까 노승봉 아래다가 모셨다. 옛날 분들은 참 지혜가….
- (할머니가 이 할머니가 원하신 거예요, 그 자리를?)
아니. 후손들이 두 냥반… 하도 같이 못 살고 하니까 고흥까지 상여 그때는 상여 그리 모실 수 없으니까 맞볼 수 있는 곳이 노승봉 아래 거기가 하면은 딱 볼 수가 있다 그래갖고 노승봉 아래다 할머니를 모시고 이렇게 3대가 벼슬을 했다 해서 사당도 3칸, 또 그렇게 전해오기도 하고, 종2품 이상의 직이 있기 때메 3칸 사당이다 이런 말씀도 있고 그런데 집을 올려 지은 통에 벼슬이 뚝 끊어져 부러 갖고 대저 벼슬이 없어. 그러다가 지금 13대 종손이 20살 때 다시 이리 내려 앉혀가지고 지금은 행복이를 여기서 낳았어요?
- [다 여기서 낳았지, 서이 다.]
이 집터가 그래서 14대를 내려왔어요. 행복이까지 낳았으니까 14대 내려온 종간데 문제는 뭐이냐, 큰아들로만 이어져 왔다, 혈손으로, 어느 종가든지 혈손으로 내려오기는 힘들어요. 뭐 양자손이 온다든지 뭐 이렇게 해서 종가가 이어지는데 장흥 위씨 판서공파 종가는 14대가 혈손으로만 이렇게 내려왔다, 이거는 우리나라에도 드물다, 이렇게들 다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자부심을 갖고 우리 판서공파 후손들은 있는데 우리 종손이 연세가 89세여서 자녀(장남) 된 행복이가 정년을 하고 여기를 수호를 해야 될 건데 종손 걱정은 그것이고 우리 종원들도 걱정이 그것이여요. 이 종가가 유지가 되겄냐 안 되겄냐, 또 요새 젊은 사람들이 시골에 와서 살것냐 이거이 굉장히 지금 퀘스천마크로 이렇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오덕, 아까 말한 오덕의 각 종원들이 우리 판서공파를 제일 부러워해요. 이 음력으로 10월 13일이 작은집 손들의 시제가 있어. 그런데 그 시제를 전국에서 작은집 손들이 농안 하원등에서 시제를 모시고 13일날 이 종가로 와. 그러면 종가에서 하룻밤 자고, 오후에 늦게 오니까 자고, 말 타고 온께 말밭이 있고 그래. 말을 하룻저녁 먹여주기 위해서 밭을 사서 주고 외지에서 오신 분들은. 그래갖고 말밭도 있고 그런데 여기 와서 하룻밤 유하시고 여기서 14일날 음력으로. 인자 판서공파 종원들이 계를 개려, 판서공파 계를. 그리고 여기서 유하시고 15일날 음력으로 장천재 가서 관산에 총 어르신 시제를 모시고 헤어지고 이렇게 하는데, 아까 영흥 부사 하셨던 정자 철 그 영하네 할아버지는 아주 그 똑똑하셨던 거 같애. 그런데 또 풍수학에 대해서 상당히 조예가 있고 또 거기에 상당히 뭣을 하셨던가. 지금 전해오기는 이신이라는 풍수가, 강진 분이 있었는데 이신이라는 풍수를 모시고 자리를 잡으러, 인자 잡았는데 그 냥반이 당초에 농한 하원등에다가 신의주를 잡어놨는데 동생이 갑자기 돌아가셔 부러. 그러니까 자기 자리를 동생한테 주는 거여. 어른들한테 내가 듣기로. 그러니까 지금 동생의 묫자리는 원래는 자기 자린데 동생 줘버리고 이신이란 풍수를 데리고 천관산에서부터 이렇게 해갖고 자리를 잡는데 자기 자리는 천관산 조금 밑에 내려, 상봉에서 조금 밑에 내려오면 감시봉이라는 봉이 있어. 거기다가 자기 자리를 잡고 자기 아부지, 인자 말하자면 자리는 당시에는 섬이여. 내덕도 지금 덕도, 지금 대리는 회진면 대리는 그땐 연륙이 안 될 때는 섬이여. 거기다가 대리 뒷에다가 자기 아부지 자릴 잡고 건너편에는 자기 할아버지를 잡고. 회진 대리에. 그때는 섬이었어. 그런데 그만해도 아부지는 일촌이잖아. 그런께 더 좋은 데다가 딱 뒷산에다가 잡고. 할아버지는 그만해도 더 머니까 앞산에다가 모셨어. 그래갖고 우리 판서파들이 거기서 제사를 시제를 모시다가… [옆자리 청중에게] 그때 논이 얼마였소 바쳐부렸소?
- [서 마지기.]
논 서 마지기하고 산하고 장천 문중에다가 바치고 장천 문중에서 시제를 모셔라, 판서공파 덕자 화 할아버지도. 그래갖고 장천 문중에서 거기를, 시제를 총괄해갖고 모시고… 그런데 그때 당시에 이 섬에가 무슨 명당이 있것냐 한 게 천관산 맥이 그 섬에 그리 떨어졌는데 이제 연륙이 되어버리니까. 그때는 시제를 갈 때는 물때 봐서 가야 돼. 노두를 건너서 가야 되니까. 물때 봐서 또 와야 되니까 빨리 또 시제를 모셔야 돼. 물때에 맞춰서 시제를 모시고 오고 이렇게 그렇게 했던 양반인데, 이신이라는 분은 강진 가서 들어보니까 유명한 풍수로 강진에도 소문이 나있더라고. 그분이 [옆자리 청중에게] 존재공 터를 잡아줬다 했죠?
- [터를 영흥하네가 잡어가지고 그란디 그 존재공을 터를 줬어.]
그런께 인자 영하네가 이신 풍수에 의해서 그 존재공 터를 잡었는데 존재공을 준 것이 아니라 존재공의 할아버지를 줬겠죠잉? 할아버지를 줬어, 그 터를. 그라고 자기는 여기로 오고. 그란데 거기서 존재공이 태어나가지고 호남실학의 3대 실학자가 되셨제, 위백규 선생이. 호남실학의 대가이신데 그때 성리학이 완전히 판을 칠 때 실학을 들고 일어선 분이여. 그래서 호남 3대 실학자로 전라북도 장수의 황윤석, 호가 이재든가? 그러고 화순의 하백원, 또 장흥의 위백규. 그래갖고 3대 실학자로 하시는데, 존재 위백규 선생도 다산 정약용 선생보다 30년 앞선 분인데 존재 위백규 선생이 다산정사.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 다산초당. 이름이 그렇게 돼있고 다산정사라고 여기는 이렇게 짓고.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로 유명하잖애? 공무원들의 학습서로도 하고 그런데 목민관서 하는데. 그분은 중앙부처에서 관직을 하고 책을 또 많이 저술을 하고 해서 유명하지만은 존재 위백규 선생은 『정현신보』라고, 30년 전에 『목민심서』보다 먼저 나왔는데 정현신보하고 목민심서하고 너무도 흡사해부러. 그러니까 학자들이 조심스럽게 존재의 영향을 받지 않았느냐, 이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어. 정약용 선생이 워낙 훌륭해부니까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그런 내용이 있지 않냐? 책이 너무 먼저 나온 책이 목민심서하고 너무 흡사해부러. 정현신보가. 그런데 이 냥반도 90여 권을 저술을 했어. 그러고 천문학까지, 폭넓게 의술까지, 바로 다양한 뭐시기를 저술을 하고 이 농요까지. 가사, 문학, 그거까지 다 섭렵을 하신 그런 분인데. 요분이 한번 보고는 과거에 실패를 했어. 그라고는 안 봐. 그런데 요분이 존재 선생님이 성벽, 성씨가 귀하다. 또 인벽, 인물이 없다. 지벽, 워낙 벽촌에 산다. 이 3벽을 논한 양반이여. 그래서 과거를 보니까 그런 게 눈에 보여, 워낙 영리하신 분이라. 그러니까 안 봐분 거여. 과거 봐봐야 떨어질 것. 요런 것이 다 그때에 성행하고 그러니까 안 돼. 이라고 장천재서 수학하다가 제사를 모시러 오니까 존재 어머니께서 너 아녀도 제사 충분히 지낼 수 있는데 뭐더러 오냐 그래서 내쫓아. 그란께 지은 시가 유명한 시가 있는데 내 얼른 기억을 못하겠네.
- [허허, 몰라.]
나가면서 「가까운디 가까운 곳이 아니다」 하는 시를 짓고 장천재로 도로 가셨다 하는 것인데 그걸 내가 얼른 기억이 안 나구만. 그렇게 그런 집터도 영하네가 잡었는데 그리 양보를 해서 그런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지 않었냐 요렇게 생각을 합니다….
방촌마을 석장승들
장천재
자료번호 / 06_12_02_FOT_20160811_WCR_0001
제보자(구술자) / 위철량(남, 71세, 관산읍 와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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