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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임진왜란 의병 문기방과 그의 의마

장흥문화원 2017. 9. 11. 16:50

 

 

 

임진왜란 의병 문기방과 그의 의마
▶ 문기방은 문위세와 숙질간으로 의향 장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문기방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권율장군 휘하의 의병이 되었다. 진주성과 금산산성에서 고진분투하였고 정유재란 중 남원성에서 최후를 맞았다. 남원성 전투에서 문기방이 성문을 지키기 위해 최후까지 문을 붙들고 버티자 왜군이 그의 손목을 절단냈다고 한다. 최후 전투를 앞두고 피로 유서를 남겼는데, 그의 말이 그의 칼과 혈서를 물고 고향으로 와 전했다고 한다. 현재 그의 묘와 함께 말의 무덤도 만들어 기리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충신이 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임진왜란 당시에, 장흥의 향토사를 본다면, 의향의 고향이여.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이런 난이 있었을 때 국가가 인정하지 않은 민간인 단체에서 의병활동을 하는 거여. 의병활동은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내 던지면서 자기 가정에서부터 또는 가족에서부터 형제간끼리 뭉쳐진 게 의병인데, 그래서 장흥이 아마 의향이었다는 얘기다. 그 중에서도 유치면 문 위자 세 그러니까 문위세 그분도 훌륭한 양반이시고. 그 분은 또 퇴계 이황 선생의 바로 직계 수제자가 되시고 장흥에서 대표적인 분이다. 우리 할아버지 같은 분은 유치 할아버지 하고 숙질간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한 항렬이 낮은데 그 양반(문위세)은 이순신 장군에 수하로 참여했고 우리 할아버지는 권율 장군의 수하로 경상도 쪽에서 활동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자료가 좀 미흡해요. 그래서 그때 그 할아버지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진주성이라거나 금산산성에서 고진분투하고 고생하시고 최종적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정유재란 7년 전쟁 중 남원성에서 전사 하였어요. 돌아가신 과정이 중요한데, 장흥 향토사를 하는 문병일이라고 있는데 “대단한 양반인데 너무 자료가 묻혀 있습니다”라고 해. 그 때 당시에 남원성을 지킬 때 성이 함락이 되니까 그 성문을 잡고 최후 발악을 하시는 거에요. 그란디 그 손을 절단을 해 부렀다고 해. 거기서 또 사촌간인 다른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어. 그란디 거기서 할아버지가 시를 써서 인자 죽을라 하면서 전쟁터에 나가면서 시를 써서 몸종에게 줘가지고 그 몸종이 여기로 가져 온 것이지. 전포를 찢어서 혈서를 써서. 그 할아버지가 나중에 녹권을 받기를 2급 녹권을 받았어. 후손들이 오는 과정에 침체가 많이 왔어. 위업을 다 받들지는 못하고 조금만 행사를 모시게끔 단을 모시고 있제. 나로 인해 13대 할아버지인 문 기자 방 그랑께 문기방 할아버지여. 지금 그 분 의마총이 있어. 그 분이 남원성에서 전사를 하시니까 시신을 못 찾았지. 그 혈서는 출전 전날 마부에게 전달해 줬고. 할아버지가 죽으니까 그 마부가 시신을 못 모시고 오고 혈서와 말을 끌고 여기로 왔어. 그런데 그 말이 얼마 안 있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어. 그 말을 묻어 주고 그 말이 먹었던 구시 말 밥그릇을 앞에다 묻어주었대. 마부의 묘비는 ‘충로조감세’라고 되어 있어. 할아버지 묘 밑에 있어. 할아버지는 시신이 없으니까 의복으로만 복장으로 했어.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말이 할아버지 혈서와 칼을 입에 물고 뛰어 왔다고 해.
- (의병으로 권율 장권 휘하에 들어가셨는지요?)
의병이었지. 근데 우병마사로 계시다가 의병으로 전쟁터에 나가신 거여. 할아버지의 아들들이 여섯 분인데,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전쟁에 참여했는데 행방불명되고 나머지 아들들은 병자호란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셨다.

 

 

 

 

 

 

자료번호 / 06_12_09_FOT_20160729_MHG_0001
제보자(구술자) / 문현기(남, 72세, 부산면 효자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