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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이사경 동학농민혁명군 접주의 최후

장흥문화원 2017. 9. 12. 09:18

 

 

 

이사경 동학농민혁명군 접주의 최후
▶ 이사경 접주가 일본군에 밀려 고향인 용반마을로 숨었는데, 유치에서 고용살이 온 강씨가 이를 밀고해 접주는 사형을 당하고 마을은 소각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더러는 사형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 당했다. 관군 후손 길씨는 동학에 참여한 농민의 집터를 빼앗아 그 곳에 묘를 썼는데 현재까지 그 묘가 마을 한가운데 서 있다. 주민들은 묘를 이장하고 터를 되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이 마을가 동학농민혁명군 접주가 살고 있었어. 이사경씨라는 접주인디 지금 이장님 증조부님이여. 그분이 접주로 있었기 때문에 우리 마을이 상당히 동학군에 참여를 많이 했제. 인자 그래갖고 동학난을 겪은 과정에서 동학군이 일본군이 개입해 갖고 몰린 판이여. 패전할 판이여. 그 무렵에 접주가 도망갈 데가 없응께 고향 마을을 찾아 들어 온 거여. 들어와서 은둔을 하고 있는디, 기억산에 은둔하고 있었다고 들었어. 저 건너 산이 기억산이여. 기억산 똘밭에서 숨어갖고 있었어. 관군들이 와서 찾을라고 애 쓴 판인디, 유치면 대리 사는 강씨가, 여기서 고용을 해 놈의 집을 살았는디, 밀고를 해 부렀어. 기억산 똘밭에 숨어 갖고 있다고 밀고를 해 갖고 접주가 생포를 당했제. 그래 갖고 사형 당했제. 그라고 이 마을 전체가 동학군에 참여한 사람이 많았어. 현재 그 명단이 다 있는디, 마을지에도 다 기록되어 있고. 그란디 사형당한 사람도 많이 있고 그 당시에는 사형 안 당했지만 그 뒤로 모두 재산을 몰수도 당하고 마을 전체가 소각 당했어. 집 한 채 없이 다 소각을 당해 부렀어. 그 전에 전부 기와집이었다고 해. 그래서 우리 마을 이름이 원래 ‘기와몰’이여 ‘와리’. 지금 집들은 전부 그 뒤로 지은 집이여. 그라고 지금 저 들 한 가운데 멧이 있는디 장흥 사는 길씨들 멧이여. 관군 편이여. 멧자리 있는 곳이 집터인디 동학군에 참여했던 이씨 집터여. 동학군이 참패해분께 길씨가 강제로 그 땅을 차지해 갖고 불을 태워 불고 멧을 섰어. 지금까지 그 맷이 그대로 있어. 우리 마을에서는 아주 불길하제. 마을 한 가운데 저러고 있응께. 그래서 어찌께 해서 저 멧을 이전해 가고 우리 마을 에서 그 땅을 차지하려고 애를 써오제. 현재까지. 중도에 그렇게 하기로 했어 전부. 길씨 후손이 지금 있거든. 호계리 뭐시기가 그 멧을 관리하고 있든만. 그 뭐시기랑 전부 통해서 이장해 가고 우리 마을에서 땅을 사기로 했거든. 그란디 그때 당시에 그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해 갖고 뒷이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 몰라. 어떻게 해서든지 멧을 파 없애려고 하는디 현재까지 못하고 있지.
- (아는 바 없는지?)
모른디 우리 마을에 와서 고용살이를 했어. 유치 대리 사는 강씨라고 알고 있제.
- (이사경 접주가 어떤 분이에요?)
원래는 사경씨 아버님이 접주였든만. 그 아버님이 나이가 많이 들고 노령하고 한께 접주를 이어 받아든만.
- (당시 이사경 접주의 나이는?)
똑댁히 모른디 그때 당시 젊었제. 족보에 보면 다 나온디.
- (이 분의 행적 중에 마을 어르신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 있는지요?)
그건 자세히 모르것는디.
- [그때 이 양반들이 재산이 엄청 많았어. 권력도 있었고 부자로 살았어.]

 

 

 

 

 

 

자료번호 / 06_12_09_FOT_20160728_LJS_0001
제보자(구술자) / 이종선(남, 83세, 부산면 용반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