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장평면

[장평면] 일제강점기 굶주린 주민들 먹여 살린 금장굴

장흥문화원 2017. 10. 19. 17:45

 

 

 

일제강점기 굶주린 주민들 먹여 살린 금장굴
일제강점기 일본군에게 곡식을 수탈당하고 겨우 연명하고 살았는데,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등 집안에 큰 일이 생기면 제산마을 야산에 있는 금장굴로 가서 금을 캤다. 금장굴이 규모가 작아 일본군이 채금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아버님이 겪었던 얘기여. 내가 그 무렵에 다섯 살인가 먹었던가 모르겄어요. 어르신 말을 듣자믄은 그땐 다 일제 때 고약한 시절이었어요. 산에서 나무를 캐다가 짜서 먹고 못 먹을 나무도 다 먹고. 배가 고프니까. 그럴 무렵에 나로 인해서는 할아버지 제사가 돌아온디, 형편이 없으니까 가져갈 것이 없어. 금을 캐는 데 가서 밑에서 올갱이로 젓고 보니까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려고 했든가 캘 수 없는 큰 금이 나오드라여. 그래갖고 그 금을 캐가지고 할아버지의 제사를 모시는데 썼다고 그런 얘기도 들어본 적 있어. 그때는 참말로 배고픈 시절이라 보리가 피기 전부터 비어가지고 갈아가지고 삶아서 갈아가지고 묽어지니까 그걸로 죽을 써먹고. 우리 어려서는 참말로 6·25후에도 많이 그랬지요. 옛날에 어른들 보믄 좀 농사를 짓다보면 수확을 하다 보면 홀태 밑에 나오는 찌끄레기 그 놈이나 주워 먹제. 나머지는 전부 공출로 내야 해. 일본놈들한테 곡식을 줘야해. 무조건 뒤져서 어따 묻을 곳도 없고. 창으로 쭈셔서 가져가불고 그러니까. 부모님들이 붓어서 죽고 맞아서 죽고. 일제 때 보믄 그 많은 압박을 받고. 우리나라가 36년간을 그러고 살았다는 것을 얘기 할라고 했어.
- (그래서 어르신 아버지가 금을 캐러 어디로 가셨다구요?)
제산 금장리로. 금장굴이 있어. 지금은 많이 매워부렀지만. 금장재 넘어가믄 금장마을이란 데가 있어. 그란디 그 얼마나 깊었든가 보이들 안 해. 그란디 나무도 쟁여가 있어. 들어가믄.
- (금장굴이 지금 부산면에 있어요?)

장평면 제산리고 그래. 거가 제산리 사십 몇 번진가 산으로 해서는 그래.
- (금을 캐러 많이들 가셨나 봐요?)
옛날에 그놈 팔라고 많이 다녔제. 그래갖고 아버님만 그란 게 아니라 참 금을 많은 사람들이 캤어요.
- (광산의 주인은 없었어요?)
주인 없고. 그건 확실히 모르것는데, 너도 나도 많이 파고. 거기서 제일 거시기한 사람이 있었것죠. 금이 나온다고 그라니까 파고. 그라믄 판 뒤에도 하천에서 물 내려오는 데서 올개미로 흔들어서 조그만 거라도 집고 그랬다는 거여.
-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는데, 금을 캤으면 일본에서 빼앗아 갔을 텐데?)
그란께 우리 부락이 소규모라 놔서, 크든 안하고 소규모여서 일본놈들이 간섭을 안했다고 봐야제. 그러지요. 그라고 주로 하천에서도 금을 흔드는 올개미가 있었는가비여. 그 올개미로 흔들어서 잡놈이라도 집고. 그래가지고 생활을 보탬이 되었다는 것을 얘기하제. 지금은 산에 숲이 없어져버리고 거시기가 되어 부른께 구댕이도 많이 메워져부렀어.
- (금 있겠는데요?)
구덩이는 있어. 거기가 6·25후로 집을 지을라고, 거기 어른들이 거기다 목재를 쟁여놓고 재놓고 들어갔제. 경목을 사용해서 집을 지은 사람이 있어.

 

 

 

 


자료번호 / 06_12_07_FOT_20160721_CHJS_0002
제보자(구술자) / 최장석(남, 79세, 제산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