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대들전투 패전 후 피신한 부용사에서 살아 돌아온 동학농민군 이겸호
▶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조부님은 장흥석대들전투 패배후 용산 부용사로 피신하셨다. 이를 알고 잡으로 온 관군들에게 그 속에 숨어있던 모든 농민군이 사살되었으나, 조부님만은 스님의 변호로 무사히 살아 돌아오셨다.
내가 듣기로는 먼저 형님이 우리 동학 나댕기셨고, 조부님이 우째 동학에 참전을 하셨냐 그라며는. 큰 조부님은, 형제분이신디, 큰 조부님은 면에 출입을 하시고 우리 조부님은 시골에서 살림하시면서 농사짓고. 그랬는디 형님을 살리기 위해서 조부님이 동학에 투신을 했다 그러시더라고. 그렇게 얘기를 들었고 인제 그러니까 동학에 참전을 하셔가지고 1894년 12월 24일날 저녁에 여기 어서마을에서 간부급들이 회의를 하셨다고 하더라고. 그래가지고 새벽에 자울재를 넘어서 넘어 가신거야. 그래가지고 그때 이제 대규모 전투가 석대뜰에서 다음날 벌어졌는디. 아무래도 인제 화총 그걸 받어가지고. 나는 이제 조부님한테 직접 얘기를 못들었는디 형님이 하신 말씀이 100메타가 못나갔대 총이, 화총 그것이. 그래 아마 한 7~80미타 나갔는가 몰라. 그것도 머 옛날에 보릿고랑 얘기를 하시면서, 보릿고랑 업저서 한참을 기어가가지고 쏘아야 저쪽이 마지며는 시신이 되고, 했다고 그런 얘기를 했다 하시더라고. 내가 지금 판단해볼 때는 화총 그것도 다 이렇게 전투하는 사람이 받는 게 아니고, 그때 당시 머 간부급들이 그렇게 받은 모양인갑드라고. 총기가 부족하니까. 그래가지고 25일날 저녁에 석대뜰에서 후퇴를 하자 해가지고 하신 것이 아마 부용산으로 수 10명이 이렇게 피신을 하셨다 그러드라고. 그래가지고 절로 들어갔는디 안 나오니까. 머 마루 밑에 숨은 사람, 머 헛간채 숨은 사람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피신을 해서 있는디. 운주 거 나뭇꾼을 시켜서 머시라고 밖에서 외냐 하며는, 나온 사람은 살리고 안 나온 사람은 다 죽애분다, 그래가지고 거의 나간 사람은 거의 다 죽었대. 한 사람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고 다 죽었는디, 조부님은 왜 살았냐. 부용산에 주지스님이 꽉 앙쳐놓고 못 나가게해, 법당에다 앙쳐나두고. 관군을 시겨서 들어갔는디 법당에 주지스님이 뭐랑고면, “이 양반은 이 밑에 사시는 나뭇꾼인디 아무런 동학하고는 관련이 없다.” 그랑께 딱 나가셨다 그래. 나가갖고 인제 나가부렀는디 하나도 살아남은 사람 없고 다 죽었다 그래. 그래가지고 인제 일주일이 지났는디. 우리 할아버지로 말하며는 종형님이, 동생이 인제 부용산으로 피신했단 소리는 들었는디, 죽었을 것이다, 다 죽었다 하니까, 송장이나 인자 찾으러 가야 쓰것다, 그러고 바지게를 짊어지고 올라강께 살아서 내려오시더라, 딱 한 사람. 그래가지고 인제 운주마을 앞에 거그를 인제 형제분이 걸어내려오신께, 형님하고 동생이재 종형간. 그래 내려오셨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제 난리가 나부렀지. 부용산 피신한 사람 이제 다 죽었네 하닌까 난리가 났는디. 동네 사람들이 그때는 머 이렇게 마을앞에가 사람들이 나와서 서서 구경하면서, 저런 양반이 안 살아오믄 누가 살아와야, 그렇게 감동적인 얘기를 하시드라고. 그러닌까 이쟈 내가 판단하기는 지금 내가 이렇게 어르신들한테 전해 듣고 내가 이렇게 판단하기는, 아마 할아버지가 인간성도 좋고 항상 그 뭔가를 좋은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하신 양반인 것 같에요. 그래서 아마 마을 주변이나 다른 마을에서도 그렇게 인제 아, 참 좋은 양반이구나, 이렇게 칭찬을 받고 그라고 사신 분인 것 같아요.
자료번호 / 06_12_04_FOT_20160707_LJS_0001
제보자(구술자) / 이정신(남, 73세, 용산면 어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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