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장흥농민군이 이제사 빛을 보게 되었다

장흥문화원 2017. 9. 12. 09:56

 

 

 

장흥농민군이 이제사 빛을 보게 되었다
▶ 1894년, 호남 지역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자주화 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역사다. 당시 전라도에는 53개의 집강소가 있었는데 그 중 두 개가 장흥에 있었으며 3만 명이나 되는 농민군들이 전라도 각지에서 장흥으로 모여들어 외세에 맞섰다. 장흥 지역의 이방언 장군, 이백호 선생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들을 이끌며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장흥이라는 지역과 장흥 지역 농민군들의 혁명 활동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이제라도 동학농민혁명과 당시의 장흥이 조금씩 재조명이 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한문으로 돼 있는데 장흥 농민은 전연 빠져 있더라고. 무장 기포에서 실패해가지고, 또 전주 감영을 농민들이 가서, 두 번이나 가서 작살을 내버렸지. 그런 것은 나와 있는데 장흥 농민군에 대해서는 일절 안 나와 있더라고. 한디 우리 장흥은 해방 후로 16만 인구였어.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그런 장흥이기도 한디 이것이 왜, 어느 때부터 우리 장흥이 몰락해버렸나 하면, 고려 23대 인종 황후, 인종 황후가 당동마을에서 태어났거든. 그래갖고 그 후손이 계속 마지막 우왕까지 내려왔어. 왔는데, 고려가 망해 부니까 한 마디로 우리 장흥, 이것이 장흥 관산이 사실 공예태후 친정이기 때문에 여기서 전부 다 원후라고 하는 전부 다, 요즘 말하는 국무총리 여기서 태어나갖고 전부 다 외갓집이 전부 여기여. 하니까 고려역사는 전부 다 여기서 전부 다 우리 관산서, 외갓집이기 때문에 고려 역사가 이뤄진 것이여. 아주 유서 깊은 곳인데, 고려가 망해 부니까 이성계가 이 장흥을 작살 내분 것이여. 천관산이 저기 고흥으로 유배돼 가버렸다니까. 해방 후로 책을 읽어보면 천관산이 고흥으로 나와 있더라고.
- (그러니까 산을 다 어떻게 유배를 보내버렸….)
유배를 보내버렸어, 이성계가. 그때부터 사실은 우리 장흥이 지금까정 이렇게 몰락해버렸어. 그라고 또 장보고가 장보고가 만약에 동학에, 장보고가 성공을 했으면 도읍지를 대덕에따가 할라고 했다고. 할라고 했는디 거기 인저 신라에 그 저 내, 말하면 우리 씨족이 결국은 그 완도로 유배 왔는데 유배 온 게 아니고 피난, 장보고가 이렇게 보고 했는데, 우징 신무왕의 큰아들, 우징이 왕를 하기로 했는디 안 해부니까 장보고가 난리를 일으켜 부니까 신라서 뭐냐면 장보고를 죽여버렸다고. 김제에 거시기를 청부살인을 줘갖고 결국은 인제 대덕, 만약에 성공했으면 도읍지가 대덕에따가 할라고 했다고. 했는데 지금도 가서 보면은 장보고의 딸, 딸이 일로 도망해갖고 지금도 가면 거시기가 있어, 비석이 있어. 그란디 그것이 확실한 근거가 있냐 없냐 나오는데, 내가 볼 땐 확실한 근거가 있다, 그런께 다시 말해서 고려가 망한 뒤로부터 우리 장흥이 아주 그냥 한 말로 묵사발이 되 분 것이여, 현재 지금까정. 그라고 박정희 정권 때도 제일 마지막에 거시기 된, 도로가 된 것이 우리 장흥이여. 완전히. 그때 16만인디 해방 후로는. 지금은 4만 넘은가? 4만 돼불고 자꾸 인구가 줄어져부러. 그란디 장흥 관산이 사실은 이 남한의 중심지여, 한가운데여. 대한민국을 치면은 제주도까정 따지면은 대한민국의 한가운데가 바로 여기여. 그란디 정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필요가 없어. 그라고 있다가 인제 장흥 농민들이 굉장히 핍박을 받아불어버렸지. 더군사 이재로 잉? 이재 들어와갖고. 한데 그중에서도 서민 계급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거여. 반란이고, 좋게 말하면 혁명인데 그 들도 저 사람들 이씨가, 인천 이씬가? 인천 이씨 하고 김해 김씨, 이 두 성받이가 아주 그 장흥서 요즘 말하면 정부에 굉장히 거시기, 불만을 많이 품은 것이여. 그런데 동학혁명군들이 주체가 전부 다 김해 김씨하고 인천 이씨들이여. 그라고 이 양반 계급들은 아예 이 동학에 가담한, 하나도 없어. 그라고 바로 거기의 중심인물이 이방언이. 이방언이 묵촌 사람이거든. 용산 묵촌 사람인디 이 이방언이가 중심이 돼가지고 그 결국은 문제를 삼는 것인데, 이방언이하고 흥선대원군하고 아주 가까워 사이가. 가까운디 흥선대원군은 아마 이 나라가 일본에게 망하겄다 그런 생각을 여러 번 한 것이여. 한께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아는 사람이여. 자기 며느리하고, 민비하고는 사이가 안 좋아가지고 난리 안 났소. 한디 흥선대원군은 사실은, 이방언이하고 사실은 손을 잡는 것이여. 그래갖고 인제 1900, 1894년에 무장 기포에서 실패해부니까, 이방언이를 서울로 압송을 했다고. 압송했을 때 흥선대원군이 살려줬다니까, 참, 역사가. 그런디 살려줬는디 일본놈들이 잡어다가 죽여버렸어, 저그 저 장흥 벽사에다가. 죽여버렸어. 그런디 이방언 장군의 막사가 인물이 누구냐면 바로 저 이 송재, 이 송재의 증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인자 백호야 백호, 이백호. 이 사람이 뭐냐면 독자야 독자. 독잔데 자기 아버지가 지금 현재 향교에 가면은 훈장 명단에 나와 있어. 이백호 아버지가 뭐냐면 그 저 소강 선생이여. 지금 나와 있는데 소강 선생이 묵촌에서 유명… 요새 말하면 한학자였어. 한디 이 이백호가 독자여. 그래서 이 아들을 갖다가 교육을 시켰는디 무사를 만들라 해가지고 이름을 무경이라고 지었어. 무사 무자 경자. 그래갖고 무경이여. 그란디 이 독자가 참 아끼는 아들이지. 그래갖고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셔 부니까 3년상을 지내고는 이방언 산하에 들어가분 거여. 그 양반 계급들은 전부 다 동학에 가담이 안 됐잖아요, 상민계급이 전부 다 가담됐지. 그란께 자기 아버지가 딱 돌아가셔 부니까 ‘됐다’ 그라고 이방언이 산하에… 이방언이하고 계촌이 되아. 아마 7촌이나 되아 갖고 아마 제당숙이나 될 거여. 그래갖고 이방언 장군 밑에서 이백호 장군 이 사람이 인자 심부름하고 이백호 장군 밑에가 또 자기 산하에 두 사람 있어, 심복이. 그래갖고 인자 결국 전주 두 번째, 그 전주 감영에를 갈 때도 이 이방언 장군이 갔냐, 저 이백호가 갔냐 안 갔냐 그것이 이러 나와. 안 간 것으로, 안가. 5천 명이 갔거든 장흥서 5천 명이나. 안 갔을 것이다 그렇게 현재에 나오는데 우리가 볼 때는 갔다 오셨을 것이다. 그래갖고 1894년 12월달에 무장이 해체되니까 12월달에 작살나부니까 우리 장흥 군민들이 그래도 선비의 마을이여. 장흥 군민들이 그 거시길 저 뭐냐게 되면은 다시 말해서 혁명군을, 요새 혁명군이라면 좋고 나쁘게 말하면 반란군이여. 전부 다 광주, 저 보성, 회천 전부 다 이렇게 해갖고 장흥다가 3만 명을 모였어, 그때가 3만 명인데, 그때가 1895년 1월경이여, 12월에서 1월경인데, 어떤 학자들은 만 명이라고 그러고 나가 볼 때는 3만 명은 될 것이다, 3만 명 그저 모이기가 어렵다고. 그래 3만 명하고 일본놈하고 싸우는디, 저 석대들 건너편에 산이 있잖아. 거기서 일본놈들이 완전무장을 해가지고 가서 신식무기로, 대개 신식무기가 사정거리가 20미턴지 30미터여. 그놈으로서 와서 싸워. 우리는 몽뎅이오. 하하… 3만 명이 작살나부러. 하루에 작살나분 것이여, 하루에 바로. 대항이 안 되니까 나머지가 불과 살아가지고 여기 저 자울재. 그때 몇 100명이 아마 갔는가 몰러도 하튼에 산 사람이 얼마 안 되아. 3만 명 거의 다 죽었다고 그래. 50명이란 사람도 있고 500명이란 사람도 있고. 아무튼 그 사람들이 자울재를 넘어서 용산서 해갖고, 그때는 이 길이 없었습니다. 저거이 1920년대에 일제시대 때 생겼기 때문에 부용산으로 해가지고 성산, 성산 가 사시는 거 우리 관산에 치소가 있었어 거가. 거기서 집합을 해가지고 여 신촌하고 옥산 그 가운데서 접전이 벌어진 것이여. 그 수가 5천 명이여. 5천 명인디 게임이 안 되제! 게임이 안 돼. 그래가지고 하루에 작살나갖고 다 도망가불고 여기 저 송재 선생 자기 외가가 바로 용전이여. 용전인디 자기 외갓집에서 숨어 있다가 안 되겠응께 천관산 꼭대기로 도망을, 천관산 소굴에가 있는디 배가 고파서 살 것이여? 천관산 넘어가지고 대덕으로 해가지고 여기 저, 여기 앞에는 바다였거든. 고마리로 해갖고, 남포로 가갖고 인자 거기도 지양리라고 있어 지양리. 안양에 지양리라 저기가 산 밑엔데 그 모령에 들어가 인자. 모령 지양리에 들어간데 모령 들어간데, 송재 증조할아버지가 백씨라는, 백씨가 처갓집이여. 수원 백씨가 거기가 저 처갓집이여. 거기서 셋이 숨었제. 인제이 숨었는디, 백호 선생하고 자기 밑에 부하 직원하고 숨었는디 일본놈들이 잡어다가 셋이 묶어갖고 그 밑엣다가, 밑엣다가 뭐냐면 우즈기(유지기)를 씌워놓고, 우즈기 씌워놓고 이라고 분살형, 그 형자가 이 형자가 대개 [방바닥에 써 보이며] 이렇게 쓰드라고. 형을 받었으면 형사 형(刑)자인디 분살형을 시켜가지고 이렇게 모양 형(形)자를 썼더란께. 그래갖고 거기다 3명을 것다 거시기를 우즈기를 씌어갖고 나무배늘을 쌓고 3명… 일본놈들이 와서 죽여버린 것이여, 아조 전부 다. 그란께 이, 송재 증조 백호 선생을 잡을라고 아조 난리가 나부렀지, [관련 자료를 들어올리며] 요것이 원고지가 한 200매 된디 굉장히 어려와. 간단히. 그란디 죽어부렸는디 감히 거를 갈 수가 없잖아. 그란디 백호 선생이 아들이 넷이여, 딸이 하나고. 아들 넷인디 죽은 장면을 못보고 저그 멀리서 산 밑에서 본디 자기 시아버지, 자기 아버지가 타 죽은디 가도 못하고, 그라고 다 죽고, 일본군들 철수해부니까 가만 거기 가보니까 시체를 발견할 수 없어, 누군지를 몰라. 시체가 3명이라. 그란께 이백호 장군 막하에 두 사람 있었는데 이백호 장군은 어서 알았냐게 되면 벽사뜰에서 저기 석대들에서 싸울 때 상처를 입었거든 여기가. 상처를 입고 절뚝거리면서 자울재를 넘어갖고 관산으로 온 거여, 자기 외갓집 건너편에서 참살 당해 갖고, 저 천관산 꼭대기로 도망갔는데. 그 상처를 보고 아, 요것이 알아가지고 며느리 넷이 덕석에다가 딱 몰아갖고 며느리 넷이 이렇게 이고, 그라고 아들 넷은 죽은 사람 이 죽은 사람 이름 없는 이름 없이 죽다 간 사람 묫을 써줘. 그래갖고 이 백호선생을 묻을 수 없잖아. 산 밑 밑에다가 몰래 묻는 거야, 난리가, 큰일 나부니까. 그래가지고 백호 선생 슬하 사람들 전부 머슴을, 머슴… 어디를 행세를… 전부 머슴 출신들이야. 산중에서 머슴을 하고, 이 사람도 후손이라 못 장사하고 그랬어, 지금은 이라고 있지만은. 행색을 못해 부러. 5·16이 되고 군사혁명이 되니까 이제사 그 장흥 농민군이 이제사 햇빛을 보게 됐는데. 이 세계사를 보게 되면은 이 중국하고 인도하고 한국이 유명하등만.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슨 자료를 펼쳐 보면서] 이거 읽을라면 한정 없는데, 이런 농민운동이 세계사에서 일본, 중국도 있었등만. 인도도 있었고, 한국. 그중에서도 우리 한국이 제일 유명해부러. 근데 또 하나 뭐냐면 스페인에, 스페인도 원래 스페인이 요새 말하면 그 저 미국 밑에가 뭐여 무슨 나라? 멕시코고, 멕시코의 혁명아가 츠빠따야. 우리 한국하고 우리 농민 중에 누구여, 그? 전봉준이! 전봉준하고 비슷한 사람이 츠빠따야. 이 스페인의 폭군의 압력을 하니까 이 모든 농민들이 이 츠빠따를 중심으로 해가지고 뭐냐면은 혁명을 일으키는디 성공을 했어. 그란디 정부에서 여러 번 화해를 했는데 화해를 안 해 주는디, 성공을 했는디 이 츠빠따가 일자무식이야, 성분이. 그래서 자기 자신이 그래. 내가 이 혁명에 성공했지만은 나같은 무식자가 어떻게 해서 이 나라를 통치하겄냐, 그라고 자기는 산속으로 숨어 부러. 결국은 츠빠따가 잽혀 죽긴 죽는데, 우리 여기 전봉준 장군은 훈장이었거든, 분명 훈장이었고 전두환이 바로 선조여 바로 그가. 직계여 거가. 이방언 이 양반은 학벌이 아주 좋은 사람이여, 아주 잉? 그래갖고 도망가 가지고 거시기 저 그 담양 가면 그 저 뭔 봉? 삿갓봉인가? 거기서 숨었다가 내려왔거든. 오다가 잽혀 갖고 결국은 사형을 당했는데, 그란께 나는 뭐냐면은 거시기는 흥선대원군은 알았어, 일본한테 나라가 망할 것이다, 그라고 결국은 전봉준 장군 뒤에서 거시기 이렇게 후원한 것인데 결국은 일본놈하고 전부 다 죽여붓잖아 전부 다. 그러고 나라가 비참했는데, 그래갖고 결국은 1905년엔 을사보호조약이 되고 1910년에 한일합방 되어가지고 여기를 기록한 사람이 누구냐면 황현! 그 저 거시기 사람인데, 광양사람이어요. 이 거시기 거시기 저, 이 동학혁명사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황현밖에 없어. 그땐 감히 이 동학혁명사를 누가, 쓸 사람 누가 있겠어, 역적으로 몰려부는디. 근데 황현이가 그때 한문으로 싹 썼더라고. 한디 우리 장흥은 안 나와 있더라니까. 장흥은 안 나왔어. 안 나와 있는데 무장 기포부터 시작해가지고 전주 감영에 두 번이나 침범해불고 그래갖고 싸왔는디, 요것은 잘 나와 있는데 한문을 읽어보니 아는디, 우리 장흥이 안 나와 있더라고. 그런디 사실 우리 장흥이 참 마지막… 한께, 우리 장흥 농민들이 3만 명이 죽었고 여기서 5천 명이 죽었지만은 자기들도 죽을지 알았다니까. 죽을 줄 알면서 이 나라가 망할 것이다… 그 자존심 때문에 결국은 창으로 싸우다가 죽었어. 그래서 우리 장흥을 선비의 마을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지. 의리의 마을이다. 이제 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 [용산 묵촌에 집강소를 설치했는디 이백호 그 어른이 단장을 했다 이 말을 뺐어.]
그란데 인제 뭐냐면 집강소가 53개여. 그란디 강진도 있었어잉. 충청도도 있다고 그래. 경상남도도 있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는데, 우리 전라도에서는 53개가 확실하게 나와. 그란디 그 집강소가 각 군마다 있는데 우리 장흥은 두 군데여. 하나는 저기 저 부산 자라번지, 거기가 사실 우리 장흥의 집강소의 총 본부였어. 용산 묵촌은…. 묵촌은 용산 이방언 장군의 고향이고, 또 거기가 백호 선생 고향인데, 백호 선생하고 이방언하고 칠촌당숙 제당숙 되아. 그라니까 이백호 이분이 결국은 거시기 저 이방언 장군 산하에 들어가서 장흥 농민군을 지도, 진두지휘했던 것인데, 근데 이 집강이 원래는 요새 말하면 군수급이여. 그란데 여기는 뭐냐면 혁명세력이 하기 때문에 국가에서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비, 합리적인, 비단체여. 그랬는데 원래 장흥에 집강소는 부산의 자라번지인데 거기가 장흥뿐 아니라 강진까지 전부 다 해서 했는데, 이방언의 고향인 묵촌에다가 집강소를 설치해가지고 그 집강을 이백호 이분이 집강했는데, 그라믄 이것을 어떻게 알았냐면은 내가 만날 때는 노인들이 80세, 90세였어. 지금 100세, 101세 넘어붔는데 그분들은 어릴 때 들었다고 하등만, 이백호 그분이 그때에 집강을 했다, 구전이여. 그란께 장흥의 혁명사는 전부 구전이제 확실한 그런 근거가 없어. 그란디 내가 여러 사람을 만났다고, 거의 100여 명을 만났는데 확실히 이백호 이분이 집강을 했고, 그러고 그것이 나와 있더라고. 그래서 그란께 후손들이 전부 다 머슴살이 해부고 쫓겨다니고 그래갖고 이 친구도 이상 증손인께 나중에 학교도 못 다녀불고 산골짜기 도망, 산골짜기 집이 저기 저 간재에…
- (용산 솔치?)
전부 다 역적 후손들이라고 어디를 할 것이야 그 말이여. 다 머슴으로 배우지도 못하고 그래갖고 우리 송재 선생이 글씨 쓰고 있는데 그 자기 할아배들의 참 그거 그, 거시기를 받고 있는 것이여. 지금에 와서는 새로 이 동학혁명이 재조명이 되고 그래나서, 참 존경스런 일을 했다, 국가를 위해서….

 

 

 

 

 

 

                                                                              이방언 장군 산소

 

 

 

 

 

자료번호 / 06_12_02_FOT_20160725_GGS_0001
제보자(구술자) / 김간수(남, 77세, 관산읍 외학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