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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대덕읍

[대덕읍] 선창이 크다 하여 대창

장흥문화원 2017. 9. 19. 09:37

 

 

 

선창이 크다 하여 대창
▶ 일제강점기 때, 대덕읍내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선창이 크다’고 하여 ‘대창(장)’이라 불리는 시장이 서곤 했다. 규모가 큰 장이라 늘 장꾼들로 북적였던 대창(장)은 근처 섬에서 가장 가까운 시장이기도 해서 농사를 짓지 않는 섬사람들이 부족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찾던 곳이었는데, 이후 시행된 간척사업으로 인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3.5키로나 될 거여, 거기가. 그랬는디 거기가 일제 때, 해방 후로까지도 도로가 개설이 안 되고 그럴 때는 이 섬사람들이, 도서 사람들이 식량을… 거기는 농사를 적게 짓지 않아요, 식량이 항상 부족해. 그란께 식량을 육지 와서 갖다 사다 먹어야 쓰는디 도서 사람들이 이 시장이 제일 가까운 데가 대창(大艙)이에요, 대창. 다른 데 저 더 가까운 데, 회진이나 내저가 있지마는 배 닿은 데는 가까운디, 고까지 지고 다니니까, 운반수단이 없으니까 그때는 지고 이고 다니니까 제일 가직은(가까운) 데가 대창이여. 시장 장날이면 그 골짝 배가 꽉 차요, 바로. 못 들어올 정도로 차. 그렇게 장꾼이 많이 오는 데여. 그래가지고 이 선창, 그라는데 배 닿는 데로다 가학도 선창이 있고 잠두도 저짝에 선창이 있어요. 그란데 여거를 대창이라 하는 것은 선창이 그렇게 크다는 의미로 해서 대창 그랬는 모양이여, 아마. 그렇게 큰 선창이라 해가지고 대창. 그랬어요. 그때는 참말로 배가…. 그라고 또 봄에는 섬사람들이 다니기가 좋아요. 아침에는 샛바람이 불고 오후에는 하늬바람이 불거든. 그라니까 돛 달고 다니기가 좋아, 바로. 그렇게 이 섬사람들이 많이 다닌 대창이… 완도, 이 약산 고금도까지도 왔을 거예요, 그렇게 왔어요. 그라고 저짝 사람들이 인자 강진 배들이라 해가지고 많이 다녔고, 그때는 마량장 요런 것이 없었고, 회진도 장이 없었고, 요기 이 근방에 대덕장, 관산장, 이런 것밖에 없었어요. 그란께 제일 섬사람들이 가직은 데가 이 대덕시장이여. 식량을 가져 갈라믄은, 또 저거가 운반을 할라믄 대창 거(기)가 여기서 한 3.5키로나 될 거여. 그란께 거기를 그렇게 많이 다녔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거기를 대창, 그랬어요. 어디 전화번호부에를 보니까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 거기다 지역 뭔 내력을 써라고 해놨든가, 누가 하라고 했든가 거길 뭐라 했냐면 옛날에 거(기)가 큰 창고가 있어갖고 대창 그랬다고 그렇게 해놨더라고. 에이 이 자슥들, 모르믄 말을 안 해야지.

- [거가 전설이, 그 대창이라는 그 밑으로는 갯벌이여. 박정희가 대통령 하면서 저 밑에를 막었단 말이여. 그 전에는 거기까지 배가 들어왔어, 여기까지 들어와.]
그래 거기가 간척지가 돼버렸지.
- [그래가지고 여(기)가 아주 곡창지대가 돼버렸어.]

 

 

 

 

 

 

 

 

자료번호 / 06_12_03_FOT_20160920_GSG_0001
제보자(구술자) / 김선관(남, 83세, 잠두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