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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면

[용산면] 아부지가 삼아준 짚신 신고, 고구마 싼 보자기 들고 다니던 학교 가는 길

장흥문화원 2017. 9. 19. 17:22

 

 

 

아부지가 삼아준 짚신 신고, 고구마 싼 보자기 들고 다니던 학교 가는
▶ 초등학교 다니던 때 가난해서 아버지가 삼아준 짚신을 신고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까만 물을 들인 무명보에 고구마를 싸 주었다. 그때 당시 담임선생님이 배급 나온 쌀을 더 주어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는 누구든지 보릿고개 가난하게 살았어 이. 논 스무 마지기만 가지믄 일꾼 둘 데리고, 대학 한나 갈치기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런데 요새는 오십 마지기, 삼십 마지기 지어가꼬는 대학 못 갈쳐. 일꾼 둘 데꼬, 그때는 농경사회라 구십구 프로가 다 가난했어, 가난했어. 그라믄 인자 쪼깐 밥술이나 묵은 사람은 고무신을 신어. 그때 껌은 고무신을. 근데 나는 고무신도 업써. 아부지가 짚신을 삼아줘. 그라믄 요 저 일본말로 소레, 발꼬락 사이 찡겨가꼬 요롷게. 짚으로 가믄 인자 여그는 하고 여그는 칠딱칠딱하제, 요것이. 그라믄 그 물길에다가 산에서 내려온 물에다가 찌죽찌죽 한데, 풀이 딱 우거지니까. 학교를 가믄 요 그 소레에, 풀떡풀떡 뛰어서 오닌까 흙이 다 묻어. 그라고 항상 물속으로 걸어, 물 전부 나니까. 그리고 인자 배가 고파서 도시락도 못 싸제, 밥이 없으니까. 고구마, 고구마 싸준 것이여. 싸줘서 그도 뭐 어무니가 손이로 맨드는 무명 요 보, 꺼만 물들여서. 거그다가 요런 놈[두 손으로 주먹을 만들며] 니 개나 시 개나 다섯 개나 싸줘. 이놈을 차대기 맨이로 들고댕기다가, 요놈들이 즈그들 크린치 하제나. 고구마는 삶아부니까 물컹물컹 해. 학교 들어가기 전에 묵어불고 가제. 그래가꼬 국민학교 내가 오학 년 땐가, 사학 년 땐가 문창호 선생이 있었어. 지금 전대 앞에서 머 저 부동산 취급한당가, 소령 예편해서. 그분이 나 담임선생을 했어. 그래가꼬 육군 간부후보생 소위로 군대를 가부렀어, 갈치다가. 그때 미국에서 보조 알랑미 쌀 요롷게 질뗀찔뗀한 거, 요새 대만미라 한 거. 요새는 묵도 안 해, 우리가. 구호물자가 구호가 나왔는데 다른 애들은 다 가락한단 말이여, 반 되씩 주고. 문창호선생이 “병태 너는 거가 있어.” 다 보내불고 나는 두 되를 준거여, 쌀 두 되를. 엄청난 재산이었어, 쌀 두 되도. 내가 어렸을 때도 품고 오는데. 그랑게 몰래 줄라고 나는 두 되를 준거여. 그 또 은인이 있어. 이 내 어린 과정에도 청소를 해가꼬 못 묵어서 여가 부었어. 그라고 청소 하믄 소지락 했어, 그때. 소지 분대장이 선생님한테 허가를 맡어야 가. “청소 다 했습니다.” 그라면 책상 다 의자 넣고 쓸고 닦고. 인자 요로케 분대별로 마치 검사를 맡은디. 말하자믄 나도 모르게 “선생님 내일은 학교 못오겄습니다.” 그랬다고. “뭔 일로.” 그랑께 “무담시 다리가 아퍼서” 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거여. 그랑께 유치 문창호선생도 같이 눈물을 흘려. 여가 그냥 흥청해 나 어린 중심에. 그랑께 그때 감동이 되았던가, 두 되를 줘. 네 사람 몫 아니여, 다 가난한디. 그래서 유치 문창호선생을 내가 죽기 전에 그 은혜를 갚은다 갚은다 해가꼬, 사십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생을. 나같이 지방에 있으니까, 전부 주소를 알어서 동창회를 조직해가꼬, 광주서 계실 때 유치 문창호를 찾고 찾고 해가꼬 초대를 했어. 그래가꼬 그 꼬마 때 이야기. 이렇게 그때 그 선생님이 나 도와주신 것. 그 정을 내 못 잊고 내 마음에 있는 것을 십 분지 일이라도 못대제마는 내가 원은 풀었소, 이렇게 대화하고 그 말도 했고. 그래서 그 질이 원이었제, 원.

 

 

 

 

 

 

 

 

 

                                             계산초등학교

 

 

 

 

 

 

 

 


자료번호 / 06_12_05_MPN_20160812_LJT_0002
제보자(구술자) / 이종태(남, 76세, 포곡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