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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면

[용산면] 반란군은 반란군대로 우리를 죽일락하고 경찰은 경찰대로 밥 해줬다고 죽일락하고

장흥문화원 2017. 9. 19. 17:15

 

 

 

반란군은 반란군대로 우리를 죽일락하고 경찰은 경찰대로 밥 해줬다고 죽일락하고
▶ 밤이면 무서워서 반란군들이 하라는 대로 밥 해주었다. 그러면 낮에 경찰들이 들어와서 밥 해주었다고 때리고 죽이려고 했다. 그런 험한 세상을 살았다.

 

 

전쟁 때 피해가 큰 피해, 사람이 죽고 살고 그런 피해는 없어도 상당하니 모도 그때 그랑께. 엊그젝께도 우리가 경찰이 와서 그런 얘기를 했는데. 그전에는 반란군이란 것이 있었어. 그란디 그 반란군은 글자 그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반란군이 아니고 그때 6·25 때는 이북사람들이 내려와서 여그를 점령을 했을 때, 그 사람들이 반란군이제 이러트먼. 그란디 다시 점령을 한국에서 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못 올라가고 산에가 숨어있는 사람이 반란군 아니라고. 그 반란군이 우리 동네를 자주 왔어. 자주 왔는디 그 반란군이 난중에 들어보니까, 저어 쪽 상발리 있는 쪽 그 쪽에가 한 몇 명이가 못 올라가고 거기서 주둔을 하고 있었닥하더라고. 그란디 그때 그 세대 때는 어째 그 사람들을 그렇게 못 잡고 거그따 놔두고 그렇게 부락사람들을 괴롭혔는가 몰라. 그라면은 이 부락에가 아 서남지구, 쩌그 저 지리산 보고 서남지구라고 안한다고.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근무하는 사람이 있었어. 그 냥반이 여그를 늘 왔다 갔다 해. 서남지구가 있고 토벌작전하고, 읍에 있는 김만수씨가 그 토벌대장으로 계시고. 그렇게 한단 소리를 우리가 들었는디. 그때 그 냥반이 여그를 왔다갔다, 이렇게 휴가를 오면서 총을 갖고 다녔어. 그란디 그 총을 갖고 댕기면서 산짐승이 나오면은 이러케 몰아불기도 하고 쏘아불기도 하고 그랬는디. 어디서 그 얘기를 들었던고 밤에 그 사람을 잡으러 여그를 들어왔어. 반란군들이 들어와가지고 그 집이 들어가서 이렇게 총으로 쏠락했는디. 인자 어뜨게 문을 박차고 도망해서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그 사람이 총은 안 맞이고 살기는 살았는디. 동네 사람들이, 그때는 그래 반란군이 와서 배가 고파서 밥을 해주락하믄 밥을 안 해줄 수가 없어, 밥을 해줘야돼 당연하니. 그라믄 밥을 해서, 인자 무서우니까 밥을 갖다 바치면은 밥을 묵고. 그 사람들이 또 뭔 식량 같은 거, 보릿쌀이랄지 쌀이랄지 있으면은 모도 싸가지고 즈그들 해묵을라고 가꼬간단 말이여. 그라면은 인자 이렇게 날이 새면은 신고를 할 것 아니라고, 지서에다가. 그라면은 신고를 하면은 지서에서 와가지고, 반란군 밥해주고 식량 줬다고 동네사람들을 데려다 뚜드러 팬 사람들이여, 또 그때 당시에는. 그랑께 반란군이 와서도 안 죽을라고 밥을 해줘야쓰고, 반란군을 밥을 해줬다고 또 지서 경찰들이 와서 또 우리들을 못 쌀게 굴고. 그때 세상은 어째서 그렇게 살았는고, 지금 생각하면은 생각이 들고 기가 맥혀 죽을 일이제. 말로 어떡게 표현할 수 없지. 아 여그따가[마을 사장나무를 가리키며] 물팍 꿀쳐서 안쳐놓고 장작조각으로 여그[허벅지를 두드리며] 뚜드러패고, 거꾸로 달아매놓고 물씨고 해서. 그때가 금매 밥해준 것이 뭐시 그것이 나뻐서 그랬냐 말이여. 안 죽을라고 밥해준 것인디. 우리가 뭐 일부러 밥해준 것도 아니고. 그렇게 주민들을 못 쌀게 굴 때가, 우리들이 태어나가꼬 너무 억울한 세상을 많이 살았어, 그때 당시에. 그랑께 그것도 지금 시대가 변천하니까 지금 그라지만은, 그때 세상은 어쩌서 그렇게 살았던고. 반란군은 반란군대로 우리를 죽일락하고, 군인은 군인대로 와서 해줬다고 죽일락하고. 그런 것이 너무 억울하게 세상을 살았어, 그 당시에는.

 

 

 

 

 

 

 

 

 

 

                                       포곡마을 사장나무

 

 

 

 

 

 

 

 


자료번호 / 06_12_01_MPN_20160810_BSJ_0001
제보자(구술자) / 방송정(남, 77세, 포곡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