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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면

[용산면] 조부님의 권유로 상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사람

장흥문화원 2017. 9. 19. 17:33

 

 

 

조부님의 권유로 상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사람
▶ 옛 어르신 중에는 한글을 개글이라고 했다. 장흥중학교 졸업하고 조부님의 권유로 상금 서당을 다니며 논어까지 공부했다. 덕분에 한학에 있어서는 누구에게 아쉬운 이야기를 하거나 물어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조상이 요리, 금일읍에 지금 금일읍이지 않습니까, 거기서 계시다가. 또 인자 섬에서 그 분들이 생겨서 섬에서 일생을 마치고 자손들을 섬에다 남겨놔야, 이런 의욕적인 생각에 육지로 그냥, 나는 비록 섬에서 살았었제만 자손까지 섬에다가. 그때만 해도 섬이 그렇게 좋은 터전으로는 인정이 안 되았었죠. 그거를 탈피하기 위해서 요리 나오셨나 봐요. 그렇게 해갖고 인자 여그 나오자 인자 제가 한 2년 후에 어머니 뱃속에 생겼드래요. 그래갖고 나서 인자 이 집터가 긴데. 그래도 그때는 재정이 좀 부유하다 하면은 논 경작을 많이 한 사람에 한해서 경제가 부유하다, 그랬거든요. 그래갖고 집에가 아버님이 근간성(勤幹性)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해갖고 부지런히 일도 하고 인자 또 해서 재산을 쪼깐쓱 모으신 거이. 우리 지역 면내에서 제일 부자 집이 아니냐, 좌우에서 그렇게 얘기할 정도로. 그래서 인자 제가 어려서 있을 때는 우리 나이에 든 사람이 지금, 지금으로 얘기하면 초등학교도 다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거든요. 왜 월사금이라는 이런 부담 때문에 못 다니고 하는. 저는 그래도 그 조부님, 아버지의 혜택을 받아서 국민학교 졸업하고. 국민학교를 졸업하먼 그 1반, 2반 정도 학생 수에서 한둘이 정도 중학교 가고 그랬어요. 그래갖고 한사람은 저 쩌어 다른 마을에 있는 그런 사람하고 나는 장흥중학교 가서 장흥중학교 12회 졸업을 제가 했습니다. 그렇게 해갖고 인자 그때만 해도 인자 조부님이 조부님께서 머리를, 상투란 머리가 있지 않아요, 이렇게 묶으고. 그렇게 해 가지고 에 인자 옛날 분들로 해서 우리 한글을 보고 그랬어요, 개글 이라고. 그래갖고 한문만이 존재하는 그런 시기였나 봐요. 그랑께 개글 고만 가르키고, 인자 아버지보고 하신 말씀이겠죠. “한문을 배우게 해라.” 이 얘를 가르치자 그래갖고. 제가 둘째입니다마는 제 우게 형님은 지금 강진가 계시고. 그래서 인자 여기서 여 상금이라는 이 건너 마을이 있습니다. 거가 글 서당을 했어요. 이제 서잽니다. 인제 글집이죠 잉. 인자 거기를 중학교 졸업하고 인자 다니고. 그라고 몇 철, 한 2년 3년 다녔나 봐요. 그렇게 해갖고 인자 고서로. 내가 조부님이 그렇게 유식해가지고 에 주역 정도를 조부님은 많이 보신 그런 실력가가 되아요. 제가 인자 저를 조부님께서 그렇게 생각했던가 봐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이 둘째 손자 이 애한테 잔 전수를 해줘야 되지 않냐, 이런 생각에서 저를. 기어코 학교 다니는디 아버님을 설득해갖고 못 다니게 하고 한문 서재를 다니게. 그렇게 해갖고 한문 서재 다니면서 인자 소학 띠고 대학 띠고 논어 세 째 권까지 내가 띠고 해서. 인자 그때 당시 이 구학으로 해서는 누구한테 그 아쉬운 얘기를 안 하고 물어 보도 않고. 이제 이러고 살면서 이전에는 어디 집을 짓고 하먼은 집 머리에 큰 나무를 영그면서 상량문이라고 써요. 맷월 매칫날 맷시에 이집이 건립 되았다. 에 이런 걸 붓글씨로 인자 남기고 이런 청탁을 많이 받어서 그런 일을 좀 하고 있는데.

 

 

 

 

 

 

 

 

 

                                                                                      어르신이 쓴 상량문

 

 

 

 

 

 

 

 

 


자료번호 / 06_12_04_MPN_20161212_SKN_0001
제보자(구술자) / 서기남(남, 75세, 송전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