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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용산면

[용산면] 큰 용이 잠들어 있는 활성안

장흥문화원 2017. 9. 19. 17:37

 

 

 

큰 용이 잠들어 있는 활성안
▶ 용산 계산마을 뒤에는 활성안이란 성이 있다. 그리고 활성안에서 안양 지천까지 산줄기를 따라 큰 용이 누워있었다. 그런데 장흥읍에서 관산으로 통하는 도로를 내면서 그 용의 허리를 건드리자 용이 놀래서 그 활성안 계곡으로 떨어져 잠들었다.

 

 

우리 마을에 인자 학성안이라는 성이 있는데 흔히 학성안이라고 하기도 하고 활성안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쭈욱 내려온 얘기를 들어보면 안양하고 우리 용산하고 거쳐서 그런 전설들이 쭈욱 있는 것 같애요. 그래서 인제 보면 그 안양면 지천, 거기가 앞에가 그 쪼끄만 산이 있었는데 그 산만큼 큰 용이 활성안하고 그 안양 지천 산하고 쭉 연대해서 줄기를 따라서 이렇게 누워있었는데. 인자 그 이렇게 장흥읍에서 관산으로 가는 그 도로를 내다보니까, 그 용의 허리를 건드러 부니까 용이 깜짝 놀래가지고 일어나서, 풍길 앞으로 해가지고 나라서 그 활성안 계곡으로 줄기로 이렇게 떨어져서 잠들었다, 이런 전설이 있어요. 그라다 보니까 그게 어땠든 간에 허리를 건드렀다는 것이 옛날에 다 그러겄지만. 그러다 보니까 그 줄기에 있었던 마을들이 여러 방면에서 피해를 입었다는, 그런 참 전설이 쫌 있어요, 학성안이. 지금도 학성안이다, 활성안이다 이렇게 많이 얘기했는데. 실제로 인제 이렇게 보면 저희 어려서 봐도 그 활성안 자료 같은데 보면, 조선 태종 때 천사백십사 년, 태종 14년 때로 되는데, 그 때 이 성이 축성이 되았던 것 같아요, 자료를 보면. 왜 그걸 볼 수가 있냐면 그때 축성되는 데가 그 보성 회령성이 순영성이라고도 한데, 그때 아마 2개가 이렇게 축성이 되았던 것 같애요. 그래가지고 그 축성이 된 배경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상당히 왜적들이 침범이 심하다 보니까 장흥부에서 이러케 성을 축성했는데. 조선 그 태조가 1392년도 잉. 태조 때 이렇게 보면은 우리 유치에 있는 그 수인산성, 고것도 그때 되야 있다는. 현재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자 우리 학성안은 아마 그 시점을, 그런 전설을 안고 있지만 현대에 접근하다 보면 그런 그때까지 올라간 것 같애요. 근데 우리가 인자 자료, 이렇게 어려서 보면 그 성은 나무 하나도 없이 전부다 초지였는데, 초지, 초지였는데. 그 뒤로 쭈욱 들어보면 거기서 말을 키웠다, 군마를 키웠다, 또는 말을 사육해서 거기다 이렇게 훈련을 시켰다, 그런 얘기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 아주 그 어렸을 때 거리 인자 소를 띠끼러 댕기고 그랬는데, 그때 진짜 나무 하나가 없이 초지였는데. 그 뒤로 인제 그 산림녹화 이런 것 하면서 거기가 인자 그 오리나무랄지 이 소나무, 삼엽송 이런 것들 심어가지고 지금은 많이 우거졌거든요 사실은. 근데 좀 특이할만한 것은 우리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했는데. 저희가 한 초등학교 한 천구백육십 년대 초쯤 되는데 그때 우리 마을에서 어렵게 산 사람이 있었어요. 한데 거그가 보면 학성 가운데가 물이 샘솟는 곳이 있는데. 그 샘을 주변으로 해가지고 밭도 치고 논도 거가 위쪽으로 네 다랑치, 쩌어 저 동문 쪽에 아래쪽에도 네 도랑치, 이렇게 논을 쳐가지고 거기서 농사를 지었거든요. 그라고 지게로 이렇게 져 날리고. 그 우리 계산마을에서 거까지 그 비탈진데 소 끌고 올라가서 쟁기로 갈아가지고 잉 그렇게 했던 것을 이렇게 보고 있고. 또 인제 그 땅을 쫌 그때 만해도 비옥하게 한다 해가지고 이 삼십포 풍길 거그서 나온 조개껍질, 그것을 이렇게 망에다 담어가지고 밭에다 이렇게 막 뿌리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인자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그랬는데, 그때 소 띠기면서 어린 생각에서도 “아야, 이거 수백 년 흘르먼은 여기가 조개껍데기 나오면은 여가 바다였다고 얘기하겄어야 잉.” 마악 그렇게 하고 웃기도 하고.[웃음] 우리가 그랬던 곳이 사실 활성안이라고 했어요. 성터는 지금 남쪽으로는 둘레가 한 4키로 정도 되야요. 남쪽에 한 절반, 서쪽으로는 완전히 돌로 구축이 되야 있고, 반절은 인자 토성이고. 또 동쪽으로는, 저 위쪽으로 해갖고 완전히 절반은 석성이고 밑에는 토성이고. 그라고 서쪽하고 북쪽은 거의 토성으로 이렇게 되야 있어요. 그란디 그 돌들을 어떻게 그렇게 다 옮겨서 그렇게 쌓는 것인지 참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지금도 어찌 보면 우리 마을에서도 그 뒤로도 제가 알기로는 한 89년, 89년 정도까지, 1989년 정도까지 그 논에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를. 그라다가 인자 연로 하시니까 그 지신 분들이 인자 농사를 안 짓고 하다보니까 인자 흔적도 없어져부렀는데. 그렇게 유래가 있던 것이 우리 활성안입니다.

 

 

 

 

 

 

 

 

 

                                        계산리 활성안

 

 

 

 

 

 

 

 

 

자료번호 / 06_12_04_FOT_20161220_LYM_0001
제보자(구술자) / 이영민(남, 63세, 계산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