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갈량 풍암 문위세
▶ 풍암 문위세는 어려서는 퇴계 이황의 문하로 성리학을 공부하고 37세부터 장흥에 거주하면서 도학에 관심을 갖고 후학을 양성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풍암은 59세의 나이에 형제들과 함께 70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보성과 순천, 남원, 무주, 금산, 성주 등지에서 왜적을 맞아 큰 공을 세웠다. 특히 퇴계에게 배운 팔진도 병법은 조선의 제갈량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였다. 이 같은 공을 인정받아 호남 을량사, 용담 현령, 파주 목사로 임명 받고 병조참판으로 증정되어 공신록에 기록되고 있다.
풍암공 문위세의 12대 손입니다. 풍암 문위세는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군을 모집해서 저 멀리 경상도 성주 회복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국가에서 인정받아 호남 을량사, 용담 현령, 파주 목사로 임명 받고 병조참판으로 증정되어 공신록에 이렇게 기록되고 국가에서 인정된 강성서원에 매년 배양되고 있습니다. 강성서원에는 문위세의 신도비, 2품 이상 관리들에게 세울 수 있도록 국가에서 허락해 준 신도비가 있습니다. 신도비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풍암은 1534년 부산면 부춘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그 아버지는 이름을 지을 때 사람으로서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나 존재하는 이유는 베틀에 무명옷을 짜는 것과 같다고 해서 짤 [위]자 세상 [세]자 그래서 위세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풍암은 9살 때 외숙 밑에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어머니는 강진 해남 명문가인 해남 윤씨며 윤호경의 손녀 그리고 귤정 윤구 선생의 둘째 동생입니다. 그래서 풍암은 외숙 밑에서 9살 때부터 10살 때까지 글을 배우다가 11살 때부터 12살 때까지는 위암 선생 밑에서 글을 배우고 13살부터 14살까지는 퇴계 선생에게 글을 배우면서 선비로서 자세와 실천의지를 익혀서 어려서부터 성리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도산서원에서 공부할 때 다른 학생들은 입신양면을 위한 과거 공부를 하는데, 풍암은 마음을 닦는 수기치인의 공부를 하면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퇴계 선생 밑에서 배웠습니다.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37살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장흥에 돌아와서 선비로서 22년 동안 생활하면서 도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꾸준히 했고 또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습니다. 1592년 풍암공 59세의 나이에 임진왜란이 발생을 해서 7월 1일 2형님과 함께 부춘정에서 의병 일으키기를 협의를 하고 현 장흥법원이 위치한 장흥도부 객관인 관산관에서 강진, 영암, 보성, 장흥 선비들과 함께 의병에 대한 일정을 논의했는데, 당시 장흥도부사 윤희선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실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의병을 일으키기로 매형인 죽천 박광전 선생과 전 현감을 지낸 보성의 임계영 그리고 능주 현감으로 있는 김익봉 선생과 협의를 해서 7월 20일 보성관아, 현재 보성군청 차고에 모여서 700여명의 의병이 모여서 보성에서 낙안, 순천을 경유해서 8월 9일 남원 강화루에 다다랐습니다. 의병으로 출진하면서 무병 옷을 입고 의병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주변 고을이라든가 선비들은 유생으로서 의병장이 되었다고 놀렸으나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수장으로서 역할을 다 했기 때문에, 1592년 9월 22일 남원부사 윤안성은 전라좌의병군 700여 명 중에 장흥 의병 200여명을 살펴보고는 “우리나라 제갈량이 나타났구나! 흰옷 입은 백의 의병장 문위세는 우리나라 제갈량이다”며 칭찬을 하면서 남원고을 선비들에게 부탁해 500명의 의병을 다시 넘겨주니 그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고 합니다. 남원부사로부터 의병 500명을 넘겨받고 장흥 의병 200명 이렇게 700명이 남원에서 무주, 금산 등지로 옮겨서 왜적과 싸울 때 험한 꼴차기(골짜기) 때문에 도산서원에서 퇴계 선생에게 배웠던 제갈량의 군사용병술인 ‘팔진도’의 전법으로 왜적을 무찔렀습니다. 이때 빼앗은 창이나 무기를 의병들에게 나눠주면서 엄격한 통제를 했기 때문에 일사불란한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임하고 있을 때 1592년 9월 25일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습니다. 학봉 김성일은 도산서원에서 같이 학문을 했던 인연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고 1592년 10월 중순경부터 1593년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경상도 성주성 회복 전투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운 것을 인정받아서 조정으로부터 호남 을량사로 임명이 되고 1593년 2월부터 의병이 해산되던 1594년 4월까지 전라도 호남지역에 있는 양곡을 경상도 지방으로 운반해서 관군과 의병들의 군량으로 공급하는 책임을 다 했다고 합니다. 한 일화를 소개를 하면, 1593년 6월 15일 권율 장군의 명령을 받고 전라도 연해안 지역의 곡식들을 운반하던 도중에 순천 예교 다리 밑에서 많은 왜적들에게 침략을 당했는데 도산서원에서 배웠던 군사용병술인 팔진도 병법으로 배를 바다 깊숙한 곳에 정박해 놓고 주변에 돌이라든가 병사들을 배치해서 적군들이 군량을 뺏으러 다가올 때에 비바람을 일으키는 어진법을 실천해서 안전하게 군량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경상도 진주성 관군과 의병에게 공급한 일화가 있습니다. 풍암은 도산서원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퇴계 선생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일화 3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25살 때에 퇴계 선생과 도산서원에 있는 명옥대를 유람하면서 퇴계 선생은 명옥대 기문을 짓고 풍암은 기문을 받아쓰는 여가시간을 가졌는데, 퇴계 선생은 “여가시간에 멋있는 사람은 풍암 뿐이다” 이렇게 자랑을 했습니다. 26살 때는 도산서원에 있는 완락제에서 여러 학자들과 투호놀이를 하면서 학자들의 덕성을 살펴본 후에 덕성으로부터 천체를 관측하는 천기지형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고 풍암은 퇴계 선생 앞에 다가가서 “천체를 관측하는 기계는 중국 순나라 임금이 요나라 임금을 보좌할 때 해와 달과 수성, 목성, 금성, 토성 일곱 가지를 관측하는 기구입니다. 맹자께서는 임금을 섬길 때 순나라 임금처럼 요나라 임금을 섬겨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말씀을 드린바 있다고 합니다. 27살 때는 스승과 같이 객사에서 생활을 할 때 스승이 제갈공명의 팔진도를 건네주면서 베껴 쓰게 했고 팔진도 군사용병술을 익히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592년, 32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바로 호남 을량사라든가 경상도 수복 전투에서 그 전법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관직을 내렸고 정1품 사용 병조참판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은, 장흥군청 앞에 ‘의향 장흥’이란 글이 바윗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군민회관에도 ‘의향 장흥’이라는 빗돌이 있습니다. 또 장흥 주요 곳곳에 그 같은 빗돌이 있습니다. 의향이라는 것은 선비로서 국가가 위태로울 때 평생 보던 책을 덮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소중한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국난극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군청 앞 바윗돌에 새겨져 있는 ‘의향 장흥’을 보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47년에 풍암은 유치 늑룡 삼거리 산등성이에 백운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다섯 아들과 사위 그리고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치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훈련시켰던 것은 그 당시 나라가 어지러울 때 국난극복을 하라는 의미가 있지 않았는가 생각되어서 앞으로 그 양반의 묘소가 있는 늑룡 삼거리 도로변 한편에 가칭 역사호국공원을 조성한다면 ‘의향 장흥’에 부합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풍암은 입신양면을 위한 과거공부는 뒤로하고 마음을 닦는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도학 주역을 관심을 갖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선비정신으로서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관직에 있으면서 휘하에 있는 병졸들을 선비정신을 실천하게 해서 국가를 구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이 1592년 봄에 현 전라북도 진안인 용담 현령으로 근무하면서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이 함락될 때 그 근처 용담 지역은 영호남 교통요지이기 때문에 영남으로 통하는 왜군을 방어하고 남원으로 추격해 오는 적군을 물리치면서 고을을 지켰기 때문에 난이 끝나고 1600년도에 조정에서 다시 그 역할을 재공론하여 병조참판에 추진되어서 국가에서 인정한 강성서원에서 1785년부터 배양해 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향 장흥으로서 큰 영광이고 후손들에게 선비로서의 정신, 나라가 위태로울 때 국난을 극복했던 실천 선인으로서의 전승이 될 것 같아서 후손으로서 풍암의 공적과 활동 사항을 말씀드렸습니다.
자료번호 / 06_12_08_FOT_20161222_MBG_0001
제보자(구술자) / 문병길(남, 58세, 유치면 늑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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