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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선조가 김여중에게 부여한 마을이름, 금곡

장흥문화원 2017. 9. 11. 17:05

선조가 김여중에게 부여한 마을이름, 금곡
▶ 임진왜란 때 김여중은 백미 300석을 군량미로 내놓는다. 전쟁이 끝나고 선조는 김여중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으나 벼슬을 사양한다. 선조는 중국 진나라 부자 석순이 살았던 금곡을 마을 이름으로 하사한다.

 

 

임진왜란 때 우리 마을에가 출중한 어르신들이 숱하게 많이 나오셨어. 에 그때는 공신록이 선무야. 그렇잖소 인자 임진왜란이 선뭅니다. 여기서 선무도 나오셨고 그 여러 훌륭한 어르신들이 나왔는데, 그 진사 벼슬까지 당시에 하셨던 김여중 이시라는 양반이. 그 양반 호가 헌헌이여. 헌헌 김여중이라는 어르신이 나서가지고 모곡 운동을 한 거여, 모곡. 아 전쟁이 벌어졌으니까 군량미를 어떠케 준비를 해야제. 누가 군량미를, 느그가 만들어 달라 해서 한 게 아니고 인자 이 어르신들이 그 충심에 나라를 구국운동 정신으로 모곡 운동을 해갖고 쌀 300석을, 백미 군량미 300석을 그 해가지고 그 전쟁 하는 곳에다가 보내주시고. 노속들, 자기들이 거느리고 있는 노속들 여러분을 같이 인자 몰고 가가지고 권율장군 밑으로 가서 상당한 큰 공을 세우고 하신 일이 있어. 인자 그라고 평년이 되니까 선조께서 니 원하는 것을 물었어, “니가 원하는 것이 있쓰꺼 아니냐 혹여.” 긍께 “원하는 것이 뭣 있습니까, 나라 건질라고 나선 사람이.” 그런 것은 없었겄지 이 우리가 생각하믄. 아 어떠케 말을 했는가는 몰라도 내 속으론 그래, 에헤헤. 그래가지고 인제 에 아무것도 원하는 데가 없다고 하니까 좌찬성 벼슬을 하사를 하셨어. 이 그 양반이 벼슬질에 나가갖고 뭐 행동한 게 아니고 그냥 좌찬성 벼슬을 주시고, “느그 마을 이름을 금곡이라고 해라.” 금곡이라는 그 유래는 어디서 온 거이냐믄 중국 진나라 때 석순이라는 사람이, 천하의 부자 석순이라는 사람이 살던 마을 이름이 금곡이여, 고장 이름이. 중국 진나라 금곡. 금곡 땅 석순이라는 사람이 살던 고장 이름을 우리 마을에다가 하사해 주신 거여. 마을 이름을 임금이 하사해주는 그런 부락입니다, 하하하. 그래서 금곡이라고 했었는데 이 우게가 마을 하나가 다시 성촌이 되야요, 그때부터. 백씨들이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마는. 거가 마을이 국이 딱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니고 쭉 병풍마니로 늘어진 산밑이여. 그렇게 해갖고 사신 양반들이 들어와갖고 사신디. 저쪽에도 훌륭한 어르신들이 숱하니 또 많이 나오셨어요. 인제 쩌그가 마을 이름이 없으니까 우게금곡, 웃금곡 여그는 금곡. 우리는 금곡 우게서 산다 그라고 웃금곡이라고 그래요. 옛날 우리 말로 웃금곡. 그렇게 쭉 해 내려왔는디. 아 인제 일제시대에 뭐가 되얐냐믄, 왜구들이 여그 들와갖고 36년간을 침탈하고 마악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하는 세상이 돼아나서. 긍께 웃금곡 아랫금곡 그라기가 거 그렇거든. 긍께 기냥 부르기 좋게 상금, 하금 그거이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 행정부락이 되야 버린 거여. 그래갖고 이게 그때부터 근자에 엊그저께까지도 상금, 하금. 그먼 하금이라는 이름은, 한번 가만히 우리가 생각해보면은 웃 상자, 아래 하자. 아래는 옛날에 같으믄 양반 시대 같으믄 상놈, 양반 하는 시대 같으믄. 아 여기는 그래도 천박한 사람들이 모태 살고 쩌그는 고상한 사람이 사는 마을 같이 그렇게 비쳐불잖아요. 긍께 우리가 항시 서운해.[웃음] 그래 살다가 이제 새로 마을 이름 찾기, 이런 운동에 일원이 되야갖고 금곡이라는 마을 이름을 찾은 제가 7년도, 그 무렵인가 언제 찾았을 거요. 지금에 와서 금곡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모르는 사람은 하금이 더 편하게 통해요. 우리는 좀 서운하죠. 은근히 알아줬으믄 쓰겄는데도 쫌 아직도 그런 게 남아 있어요.

 

 

 

 

 

 

 


자료번호 / 06_12_04_FOT_20161125_LJC_0001
제보자(구술자) / 이종칠(남, 68세, 용산면 금곡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