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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회령진성

장흥문화원 2017. 9. 11. 17:13

 

 

 

회령진성
▶ 회진성은 1490년 보성 군항리에 쌓았던 것을 회진성의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완도 고금도와 이진성 등이 위치한 이곳으로 옮겨서 1554년에 쌓았다는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전해 들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명확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것을 분명히 했으면 하는 의견을 말했고, 회진성을 쌓았을 당시에 이곳 회진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생활상도 얘기했다. 더불어 인근 섬마을의 묘터와 장산리 형국을 뱀 형국에서 게 형국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도로 가는 육교를 게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회진에 수군만호가 주둔하면서, 회진성이 성종 제9대 임금이신 성종 21년, 1490년에 회령진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보성 군항리에 있었거든요. 그 다음에 64년 가차이 거가 있다가 회령진을 설치한 이유는 마량과 고금도 가교리, 이진 여기에 중앙정부에서 설치를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사이에 우리 회진을 택했던 것이예요. 그랬는디 1554년도에 64년도 거가 있다 이리 옮겼습니다. 그래 갖고 수군만호가 여기서 주둔하고 있었어요. 수군만호가 주둔하고 있을 적에 이 성안에가 약 72호 정도 살었답니다. 그리고 성받이는 12호 성, 12 성받이가 살았고, 호수는 민가로서 72호 살고 그란디, 그때 당시에 주민들이 성 안에서 살기 때문에 뭐라고 얘길 하냐면, 오후에 밤 되고 늦어지면 성안에 문을 닫으니까, 문 닫기 때문에 성안에 제사나 명절은 오후 6시나 돼서 낮에 훤해서 제사를 모시고 그랬어요. 그것은 72호 산, 그 과정이 전부 그랬고, 성밖에는 그렇게 안 했거든요. 초하룻날 했고 그랬는디, 여기는 29일 날 해 지기 전에 성문 닫기 전에 여기서 제사를 모시고 그랬다. 그런 설화문화가 계속 유지해 왔거든요.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여기다는 엄만호 수군, 엄만호씨가 여기서 주둔하고 있었거든요. 그 후로 그 양반이 돌아가셔 갖고 동네 뒤에다가 솥고리 형으로 되어 있어, 성 안이. 그 성을 말하자면 그 묘를 억압하기 위해서 쓸락 하고, 동네 사람들은 못쓰게 하고 그랑께 저녁에면 옛날에 그랬습니다. 병이 오면 바가치에다 문대고 소리를 지르고 그랬어요. 그런 게 있어요. 우리 명덕에도 그 전에 신상서 호길자가 제일 먼저 올 적에 장산, 제 고향이 장산입니다. 장산목하고 대리 있는 쪽 하고 사람들이 말하자면 수직을 하면서 서로 왕래를 못하게 해요. 그렇게 저녁에면 그 사람도 못 오게 하고 바가치로 문대고 귀신을 못 들어오게 한다. 그런 뜻에서 그렇게 많이 했고, 그 후로도 엄만호씨가 동네서, 동네 사람들, 70호 산 주민들이 그 만호가 죽어서 거기다 쓸라고 할 적에 동네 사람들이 못쓰게 하기 위해서, 막 말하자면 옛날 같으면 요강에다 소매 장군을 해갖고 다 넣어갖고 삐리고, 저녁에면 바가지로 문대고 그렇게 했어도 억압해서 썼어요. 썼습니다. 가서 보면은 소쿠리형에 돼 갖고 딱 여기다가 여기다가 묘를 썼어요. 욱에다가 그래갖고 이 지역에서 사람이 나지 않는다, 인물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쑤욱 하다가 2008년 11월 달에 내가 번영회장 하면서 묘를 파서 이장을 했습니다. 그것은 엄영일씨라고 즈그 종손이어요. 그 양반하고 합의를 해갖고 군에서 그 주위 복원사업을 하기 위해서 토지는 전부 사고, 또 거기 사면서 묘지에 대해서 보상 같은 것도 약간 해주고 3개 동구, 서구, 남구 3개 마을에서 협찬을 받어서 전부 계약을 해갖고 묘를 파서 자기 선산 장흥읍 연산리라고 있어요. 자기 선산으로 옮겼다. 그것은 내가 실지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안 것이고, 그 전에 묘를 쓰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설에 불과한 것이지 잘 모르거든요. 이렇게 옛날 어르신들이 그렇게 했다, 그 말만 듣제 실지가 우리가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거든요? 그런 사례가 하나 있고, 내가 원례 장산리에 살았다고 그랬지요. 장산리에서 회진으로 이사온 지 42년 됐습니다. 42년 됐는데, 장산리도 회진 여기하고 비슷하게 이렇게 되어 있어요. 게. 그란디 원래는 장산 지형은 장산리라 한디, 옛날은 장사, 뱁사자 써갖고 뱀이 길게 나왔다. 뱀이 길게 이렇게 쑤욱 나왔다. 그라믄 거기가 중매하고 뱀 머리라 하거든요. 이렇게 한디 거기를 명덕서 도로 내면서 거기에 약간 짤랐어요. 짤라갖고 장산리가 피해를 많이 봤습니다. 해갖고 동네서 계에서 관광 가 갖고 8명이 죽고, 저기 보성 재에서. 8명 죽고 기타 부상자가 많이 생겼어요. 그래 갖고 그 후로 이래서는 안 되것다. 해서 동네서 아치형으로, 노력도 가자면 아치형으로 해갖고 그 목을 이제 이어줬다. 그런 설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고, 게 형으로 동네가 옴팍하니 게 마니로 찝어다가 먹고 이라거든요. 먹는 여기가 마을 부락이예요. 마을 부락인데, 해방되는 해에 이세옥씨란 분이 대덕읍장 하고, 해방 돼갖고는 부산에서 신경원장까지 하고 그랬거든요. 그분이 그그 우리 고향입니다. 그래갖고 안에다 간척지를 막았어. 인제 여기서 요리 해갖고 간척지를. 간척지를 만들면서 기 쪽발 같은 것을 독으로 쪼사 깨불었어. 그래서 이런 문제가 자주 온다. 그래서, 그때는 마을에서 전부 그때는 동원을 해갖고 여기를 복원했습니다. 독 갖다 쌓고 인자 이렇게 해서 지금은 별일 없지마는 마을에가 그런 큰 피해를 많이 당했다. 이런 얘기가 많이 있고, 또 장산리 뒤에 가면 한 500미터 올라가면 용두산이라고 있거든요. 용두산 옆에 거기가 그전에는 그 밑에가 대리 김해 김씨들 선산이 있고, 논이 거가 다 있었어요. 산꼭대기가. 한 500미터 이상 올라가. 그란디 옆에서 조간 요러면은 보샘이라고 샘이 있어요. 나쁘게 말하자면 여자의 음부라고 그라지요. 그 말을 안 쓰고 보샘이라. 그렇게 해가지고 거기서 물이 폭폭폭폭 이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그 그리 밑에서부터 소 뜯기로 가면 여름에 인자 동네 뒤에 놔두면 쓰윽 먹고 올라가거든요. 그라면 올라가서 우리가 물 먹고 그란디, 장산리 사는, 현재도 생존하고 계시지만, 남자가 가서 보샘을 건들어 불었어. 깨 불었어. 깨 불어갖고 그 남자가 연장에 가서 고름이 나오고, 아프고 두통이 나고 난리가 됐어. 그래 갖고 자기 집에 가서 올라가서 빌고, 그래 갖고 농사 짓고 지금 살기는 살어요. 그런 설이 있어갖고 거기가 보샘이라. 우리들이 볼 때는 거기가 보샘골 보샘골 그라거든요. 그런 유래가 용산 밑에서 동네 뒤에 있었고, 게 모양인데 게 쭉발을 전부 깨 불어갖고 안 좋았어. 사고가 많이 나고. 그라고 인자 동네 사장제를 모십니다. 매년 나무 원래는 장산리가 생긴 것은 덕산리 여기 건네 보면 덕산리, 장산, 노력 이라고 합해서 덕산리 그라거든요. 덕산리서 살면서 그리 이사를 한 사람 두 사람 한 것이 인자, 하동 정씨가 젤 먼저 살았다고 그래요. 거그서. 하동 정씨가. 그래갖고 차차 이렇게 한디, 그것을 어떻게 해서 그라믄, 그리 옮겼느냐? 덕산리가 먼저 생기고, 장산리 생겼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동네 뒤에가 구 묫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같으면 거기다 못 쓰죠. 덕산리 같은 데는 동네 뒤에다 못쓰게 합니다. 장산리도 지금은 못 쓰게 합니다만 그때만 하더라도 동네 뒤에가 묘 같은 것을 많이 써졌으니까 덕산리에서 생겨 갖고 살다가 그 뒤에 인자 늘 하나씩 둘씩 이사를 해 갖고 집성촌을 이뤘다, 이렇게 어르신한테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거기는 그런 문화가 말하자면 퇴폐적일랑가는 몰라도 과거에부터 그렇게 있어 갖고 동네 사람들이 희생도 많이 당하고, 또 지금까지도 그 문제를 늘 악몽에 있게 마련이예요. 아 차로 관광 갖다 오다가 보성 재에서 8명이 부닥쳐갖고, 8명이 죽고 부상자가 지금 많이, 현재 있는디 많이 생기고 그래서 마을에서 인자 그 전부터 그랬제마는 아조 사장 제사를 모시고 갯제를 모시고 그라거든요. 그 후로 뱀사 타원을 만들어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별로 그것이 없습니다.
- (사고가 몇 년도였을까요?)
사고는 지금부터 10년 가차이 됐을 거예요. 얼마 안 됐어.
- (그렇게 오래 된 저기는 아니네요?)
10년 못됐을까 더 됐을까. 그런께 내가 그 내가 요리 나와서, 여기 나와서 그런 일을 당했는데, 한번 물어본께 안 갈쳐 줄라고 그래. 그래갖고 그런 것이 뭔 존 것이라고 부락에 피해가 있는 것이, 누구누구 죽었네. 부상당했다. 그런 행사 했네. 그것을 말을 안 해. 안 해 줘서 그것을 날짜를 아마 10년 넘었으리라 이렇게 짐작이 가고. 우리 장산리마을이 참 해괴합니다. 문제는 살의라고도 할 수 있고, 귀신을 믿어야 할지, 또 귀신이 참말로 있는가 그런 것도 궁금하거든요. 동네가 사람이 안 좋게 할라고 그랬는가 몰라도 모인 동네 뒤에다가 묘를 썼어. 그 후로는 묘를 못 쓰게 하거든요. 그란디 묘를 써가지고 그 묘와 관련된 사람이 우리 집 밑에 산 즈그 시머어니가 말하자면 정신이 이상이 되어 불었어. 그래갖고 집 건네서 딛고 다니라고 집 건네서 쩌기다가 묘를 썼다 그거여. 아무도 모른디. 그란디 그 묘를 쓸 적에 쩌기 귀바우라고 거가 말하자면 자기 아버지 묘 있었는데 아버지 묘를 저쪽 뒤고랑이라고 하는 곳에다가 묘를 썼어요. 그란디 우리 아버님도 옛날에는 글 안 해요. 동네서 누가 돌아가시고 그라면 모두 울력 해서 삽이나 괭이 갖고 같이 해주고 그래요. 아침에 일찍 갔는데 벌써 다 써불었더라요. 그래서 와불었는디. 나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본께 그런 애기를 해요. 그란디 묘는 이제 회진서 있는 점쟁이라고 돌아댕긴 점쟁이가 그집으로 어떻게 접촉해갖고 이 뒤에다 쓰면 말하자면 재력이 부해지고 큰사람이 난다, 그래갖고 현혹돼 갖고 몰래 밤에. 저 아버지 묘를 밤에 거기다 파 갖고 거그다가 쓰고 쩌기다가는 가묘를 썼어. 여기다가는 그래갖고는 그 말하자면 지금 처갓집 사람들 홍용태씨라고 계실 거요. 그 양반이 바로 그 집 밑에 있었거든요. 딱 미쳐불었어. 묘 쓴 다음에. 그래갖고 인자 동네가 난리가 났지요. 그래갖고 내가 이장할 판이여. 그래갖고, 그 여자가 저기서 섰어서 다른 데를 갈쳐주고 밑에 사람이 정신이상이 되야불고. 그랑께 동네가 이거 망할랑갑다 그라고 여자들이 전부 달라들어 갖고 그때 합의를 볼라고 그러지 말고 묘를 파라. 그랑께 절대 안 썼다고, 우리 묘는 쩌기 위에가 있다고. 그래서 합의 안 돼서 동네 여자들이 거기 가서 호맹이 갖고 파니까 뼈따구 나오고 젤 욱에는 명정이 딱 깔아져 있습디다. 명전이 깔아져 있고, 그 밑에가 옛날 사람이라 인자 빼따구만 있어. 그래서 그거이 고발당해갖고 경찰서에 그 젤 주동자, 젤 먼저 한 그 사람이 구속이 안 되었습니까? 구속이 되어불었어요. 구속돼갖고 구속된 사람을 우리가 빼내기 위해서 동네 논도 팔아갖고 결국은 나중에 머시기 했어요. 구속은 풀려나게 했는디, 그 후로 동네 사람들이 그 집이 그 집 일도 절대 해주지 말자, 말도 하지 말자. 그래갖고는 지금은 그 손자 한 사람만 살아있제 전부 다 4형제인데 딴 데로 이사가 불었어요. 동네서 못 살아. 말도 안 하고 농사지으면 모두 그때는 같이 어우러서 품앗이라도 합니까, 그란디 그것도 못하게 해분께는 살 수 없게 돼야불었어. 그 한 사람은 지금까지 살고 있지만, 지금은 그거이 많이 갔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문제가 모두 생겨갖고 동네가 그런 불상사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그 아치를 세워갖고 지금은 별것이 없다. 이렇게 전하고 있거든요. 그란디 이런 설화 문화를 발췌해서 또 우리 금년도에 2016년, 38호 될 겁니다. 38호에 기재를 하면 어쩌겠냐 그런 애기를 우리 운영위에서 할라고 했등마는 역사를 쑤욱 회령진서 할락 했등만 마치 오셨는께 간단히 얘기를 하고 그런데, 실은 성종 21, 말하자면 성종 21년차 1490년대 성은 군항리서 쌓았다고 그라거든요. 그런다 그 후로 아까 그 말한대로 역 회진에 필요한 것은 마량이나 이진 이 사이에 필요하다, 정부에서 애기가 돼 갖고 여기다가 1554년 명종 9년, 13대 임금이신 명종 9년 때 이로 옮겼거든요. 그렇게 옮겨가지고, 지금 장흥 2015년도 37호에 기재된 것입니다. 38페이지에 보면, 수군재건로 군현구미에 대하여 그렇게 써졌거든요. 써졌는데, 쑤욱 이렇게 읽어보면 지금 저 보성 군영에서 군항리 보성 군항리에서 군영 군민을 했다 이라고 말을 하고 그란디 그때는 전남대학교 노기욱 교수, 이훈 두 교수가 주장하고 장흥서는 박형상 우리 장흥 변호사 그 양반이 주장한 것은 해상으로 안 왔다 이것이여. 육지로 이러게 와 갖고 말하자면 용산, 해창, 해창 옛날에는 국가 창고가 있었거능요, 해창 거기에 와서 군영 구미가 거기서 시작돼 갖고 용산으로 관산으로 해서 회진으로 가 갖고 회진 가서 또 4일간 있었거든요. 여그서 인자 원균이가 패해가지고 남은 12척 갖고 여그서 말하자면 다시 수리를 해갖고 울돌목 가서 명랑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렇게 그 책에는 게재됐어요. 그란디 그것은 내가 생각한 것은, 그렁께 회령진성에 대해서는 정확히, 역사를 왜곡하지 말고 한번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노기욱 교수하고 박형상 교수하고 거기는 노기욱 교수는 보성 군항역이다 박형상 교수는 안양 해창이다 이렇게 하니까, 그 양반을 초청을 한번 해서 역사를 한번 바로잡어 봤으면 어느 것이 맞냐 그것이여. 그런 것을 한번 얘길 해갖고 판단, 토론회를 하든지 해볼라고. 지금 보면은 정류소 옆에 가 게시판이 있어요. 여기 가자면 정류소 옆에 왼쪽에 보면 거가 있는디, 거기 보면은 전라남도에서 그것을 장흥군에 네 개 만들어 갖고, 안양, 관산, 회진, 이렇게 네 곳을 표시했다 하는디, 표시판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 가서 보면 노란색으로 해서 똑똑한 것은 노기욱 교수가 말한 것은 군항리에서 배로 회진으로 왔다. 박형상 변호사는 안양 해창을 들러서 이렇게 말하자면 수군 해안로로 이순신장군의 역사를 걸어온 역사를 말해주기 위해서 표시판을 뒀는디, 표시판 자체가 잘못됐다 그거여. 그래서 이따 가시면서 거기 한번 봐보세요. 나하고 같이 가면서 보면 내가 설명을 좀 해드릴께. 그래서 그것이 시방 우리…. 이렇게 주장하고 있거든요. 그란디 회령진성 이 자체도 말하자면 성종 21년, 1490년 군항리에서 설치를 했다 그러거든요. 그라고 그것을 64년 만에 회진으로 1554년도에 옮겨졌다고 그란디, 우리 장흥서도 일부가 뭐라고 그러냐면 1490년 회진성을 여그서 쌓았다 그거여. 그랑께 우리는 이제 여런 거만 보고 한 것이제 언제 그때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가 정말로 어떤 사람이 쓴 것이 맞느냐, 이것을 인자 우리 문화원에다 얘기를 해가지고 하여튼 보성이면 보성인지 회진이면 회진인지 다시는 이런 말 나지 않게끄름 역사문화를 바로잡아야 쓰것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한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회진, 장흥문화 37호, 2015년도에 만든, 작년도에. 그래서 상당히 요런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되것다 하는 것은 나도 우리 장흥사람들이 전부 1490년도 회령진성은 회진서 쌓았다 그라거든. 그란디 아까 이해준 교수, 요로 봐서는 1490년에는 지금 군항리에서 쌓았고, 64년 후로 1554년도에 회진으로 옮겨 갖고, 여기서 말하자면 주둔해갖고 이순신장군이 여기서 취주를 했답니다. 그때 난중일기에 보면. 그 양반이 인자 삼도수군통제사로 인자 원균이가 칠천량에서 패하고, 12척 남은 놈 갖고 인자 정부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갖고 인자 오길 길이예요. 그랑께 보성에 들렀다가 배로 온 것하고 육지로 해창으로 들려갖고 요리 온 것하고 그래 여기서 내가 생각한 거는 지금 학교 같은 데는 이순신 장군하고 그 양반 역사를 교육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놨제마는 사실상 회진에 와서 취주를 하고 그랬으니까, 이순신장군 동상도 여기다 설치해야 돼. 반드시. 지금 정류소 옆에 가면은 지금 모도 조경 해갖고 이런데 있거든요. 나무 한나가 그제 죽어갖고 파 불었어. 그란디 거기다가 이렇게 하고, 그 욱에 성 일부나마 복원했습니다. 했는데, 거기다가 이순신 장군, 문화원에서는 군 관광과에나 얘기를 해가지고 이순신장군 동상이라도 세워야 쓸 것 아니냐? 딴 데는 이순신 장군하고 관계 없는 데도 학교마다 세운디 실제로 여기서 취주를 하고, 여기서 배 12척을 갖고 사람 동원해갖고 명랑대첩을 성공리에 하여튼 울돌목,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요.

 

 

 

 

 

 

자료번호 / 06_12_10_FOT_20160708_KSB_0001
제보자(구술자) / 김상배(남, 83세, 회진면 동구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