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동학혁명농민군 명사수 박갑수

장흥문화원 2017. 9. 12. 09:36

 

 

 

동학혁명농민군 명사수 박갑수
▶ 동학농민군이 전북 고부를 점령할 때 부산면 효자리 박갑수라는 대장장이가 큰 공을 세웠다. 박씨는 대장장이 시절 스스로 총을 만들어 나는 새를 맞출 정도로 명사수였는데, 전북 고부를 점령 할 때 동학군 명사수로 활약했다. 동학군이 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곳곳에 자수하라는 방이 붙을 정도였다. 박씨는 동학군이 패하자 유치면 처가에 피신해 있다가 결국 자신의 총으로 자결했다.

 

 

동학 얘기는 내가 말 안하더라도 온 국민이 다 아는데, 실제는 우리 한국을 망친 원인이 그때 일어난 거예요. 중앙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군대도 없애 버리고 군인에게 갈 봉급과 식량을 모두 벼슬아치들이 가로채분 거예요. 또 그 당시에 대원군이 집정을 해서 일부 불타 없어진 경복궁을 다시 중설을 하려다 보니까 막대한 돈이 들어가. 그 돈을 마련하려고 가짜 벼슬을 내리고 천 냥을 받치면 벼슬 하나씩 줬어요. 그래도 부족하니까 백성들한테 세금을 엄청나게 물려 가지고, 그때 당시 논 한마지기에 나락 한 섬 나오던 그 세상인데, 나락 한 섬씩을 물려 묵었어요. 세금이 못 나와. 세금을 못 내면 자기 가족들을 데려다 두들겨 패고 못 살게 하니까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정부를 원망한 사람이 수 100명이에요. 그라자 전봉준이 전라북도에서 동학을 일으키니까 가담이 된 거에요. 백성들이 자기 가족 살리고 처 빼오려고, 남자는 도망하니까 여자를 잡아오면 여자가 갇혀 있으면 빼낼 때 어쨌겠어요? 도끼나 소수랑 갖고 와서 관청 때려 부수고 마누라 빼오고 아들 빼오고 형제간 빼오고 아버지 빼오고 그런 것이에요. 그것이 백성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관에서 잘못한 거예요. 그것이 전국적으로 퍼져 가지고 우리 장흥서 제일로 피해를 많이 봤는데, 그 얘길 하려면 한정이 없다. (장흥은) 흉년이 없이 해년마다 곡식이 잘되고 하니까 세금을 제일 받아가기 쉬운 곳이 장흥이었습니다. 장흥 사람들이 그 피해를 그때 봐분 거예요. 그리고 어른신들 말 들어보면 각 마을에서 날마다 나와. 깃털에 크게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써서 행군하고 가면 군청 이방 호방 모두 몇 사람도 되지도 않아 피해 부리고 또 맞아 죽고 하니까 피해 부리고. 군청을 점령하듯이 해부렀어. 중앙 정부에서 하는 짓거리가 ‘관군이 없으니까 동학들을 어채께 막아내나’하고 연구한 것이 일본서 군인을 빌려오자 이 문제가 나오고 또 청국서 빌려오자 이렇게 두 파가 나온 것이 결국은 청나라 군과 일본군이 와 동학을 제압하긴 했으나 결국 우리 한국에서 천극이 벌어져 오늘날 망하게 되었어.
- (동학군 중에 박갑수씨라고 대장장이가 큰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것도 우리 고숙한테 들어 봤는데, 그분이 부산면 효자리에서 대장장이를 하신 분이에요. 그 분이 대장장이를 할 때 자기가 총을 만들어 갖고 날아가는 새를 맞추고 해서 백발백중 잘 잡았어요. 그분이 전봉준에게 가서 고부 점령할 때 관군을 보고 쏘면 한방도 허실 없이 따딱 죽어가지고 그분 공으로 해서 고부를 점렴했다 그랬어요. 그분이 나중에 패해 가지고 도망을 와 가지고 있는데 오다가 보니까 ‘박갑수는 자수를 하면 산다’고 광고가 붙었어요. 그랬는데도 자살해 죽어 부렀어요. 유치 건단리라고 처갓집에 가서 방아쇠를 당겨 죽어 부렀다고 그래. 발로 걸어서. 왜 죽냐? 정부가 살려 준다고 해 봐야 하나도 믿을 수가
없어. 거짓말만 해 쌓고 백성만 두들겨 패고 죽이고 하니까. 그분도 억울하게 죽어분거여. 그 만큼 정부하고 백성하고 신의가 없어져분 거여. 그라고 나중에 일본군이 한국에 와서 다스릴 때도 한국 사람이 일본놈 앞잽이여. 전부다.

 

 

 

 

 

자료번호 / 06_12_09_FOT_20160727_KIG_0001
제보자(구술자) / 김일근(남, 79세, 부산면 춘정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