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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장흥동학의 최후 석대·월정 전투

장흥문화원 2017. 9. 12. 11:24

 

 

 

장흥동학의 최후 석대·월정 전투
장흥 동학의 최후 전투인 석대전투와 월정전투에 대한 기록 그리고 여성 동학도 이소사와 청년 동학도 최동린의 이야기.

 

 

 

장흥 동학의 얘기를 하는데, 특별히 저는 장평 사창장터하고 흑석사거리 얘기에 집중하겠습니다. 우선 흑석사거리는 나주와 화순 쪽의 동학군들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흑석사거리에 모여 가지고 유치 피재를 넘어 오는 세력도 있고 사창장터에 보성 웅치 접주였던 구교철 접주하고 대덕의 이인환 접주가 사창장터로 동학군들을 이끌고 거그서 모이죠. 그때 인원이 1만여 명이 됐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장흥의 벽사역과 장흥부를 함락하기 위해서 항차 그게 인제 병영성과 나주목까지 치러 가는 흐름이 되겠습니다. 흑석사거리는 현재 봉림마을 앞에 있는 봉림주유소가 있고 봉림진료소가 있는데 그 뒤편에 농협창고들이 있어요. 거기가 공간이 상당히 넓습니다. 그 곳을 흑석사거리라고 얘기합니다. 사창장터는 장편면 소재지에 양촌리 재래시장이 있는데, 그곳을 의미합니다. 흑석사거리에 모이는 분들은 나주나 화순에서, 아니면 저 위에서 조일연합군에 전투에서 계속 패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밀려 내려온, 소위 동학의 패잔병들이라 할 수 있죠. 내일을 도모할려고 하는 의분에 차 있는 동학 패잔병들이고 하면… 좀 너무 가혹한… 표현하기가 적절한 어의가 생각이 안 나는데… 동학 패잔병입니다. 사창에 집결한 동학도들은, 보성 웅치 구교철 접주가 있고 대흥면이라면 대덕읍을 이야기 하는데 대덕읍에 이이완 접주가 나주와 화순에 밀려온 동학 패잔병들과 합류해서 장흥의 벽사역과 장흥부 그리고 강진, 병영성까지 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그렇게 그쪽에서 모입니다. 그게 1894년 11월 말에서 12월 초가 되지요. 그리고 12월 3일 경에 장흥읍으로 그분들이 밀려옵니다. 벽사역부터 먼저 치고 그 다음에 장흥부를 치게 되는데, 벽사역은 당시 교통수단의 하나로 요소요소에 역졸들의 말이 있어요. 파발마를 띄운다든지 그런 것이 벽사인데, 장흥의 벽사역 인원이 많게는 배 이상 규모가 큽니다. 그래서 동학의 최후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전북 고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장흥의 벽사역졸들이 가게 되지요. 장흥의 벽사가 왜 유명하냐면, 당시 부사가 이규태인데, 고부에 이규태 부사를 조정에서는 고부를 가서 좀 정리를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인자 이규태 부사를 발령을 보내죠. 그런데 이규태 부사가 빨리 안가요. 신변을 이유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부하고 장흥하고 거리가 상당히 먼데, 고부와 장흥 사이에 있는 완주부도 있고 장흥, 광주, 나주목 등 중요한 행정기관들이 있는데, 왜 굳이 장흥의 이규태 부사를 고부에 보낼까? 장흥의 벽사역이 광주역, 장성역 보다는 규모가 크기 때문에 상당한 인원을 빼더라고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구요. 그런데 장흥부사가 고부에 갔을 때 한 600여 명의 역졸들을 데리고 간다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갔을 때 이미 고부의 동학 문제는 거의 정리가 된 상태에요. 그런데 이 역졸들이 못된 짓을 하지요. 부녀자를 농락한다든가 재물을 빼앗는다든가. 그런 상황이 연출이 되니까 장흥의 역사 장흥의 부사에 대해서 동학군들은 무척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또 이규태 부사가 과거에 급제하고, 전주 이씨가 왕족이잖아요. 전주 이씨이고 해서 그 일을 잘 해결해 가지고 빨리 높은 벼슬에 다을 수 있었다는 이유도 있고. 딱히 이것이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얘기가 있지요. 그런데 이규태 부사가 조정의 영을 받고도 바로 움직이질 않아요. 한 달 이상인가 병을 이유로 머뭇거리죠.
- (동학군들이 벽사역을 먼저 치게 되고 그 후에는?)
그때부터 인제 장흥성, 그리고 강진부 그 다음에 병영성, 병영성의 당시 규모는 지금 장성에 있는 상무대 규모로 생각하면 됩니다. 소위 남도에서 병영성은 보병 육군으로서의 규모가 상당히 큰 규모입니다. 병영성을 함락을 하고. 그런데 병영성이나 강진부 이런 곳은 거의 다 그냥 관원들이 도망가고 마는데, 장흥부는 좀 다른 것이 있었어요. 장흥부사 박헌양이 위험을 피하지 않고 동학도들하고 대항하면서 아들과 같이 죽습니다. 그때 장흥부에서 죽은 사람이 16명인가 될 것입니다.

- (병영성까지 차례로 함락하면서 동학군의 피해는?)
병영성까지는 큰 피해가 없었어요. 12월 초부터 그렇게 동학혁명군들이 승전에 승전을 이뤄 나가다가 일본군이 내려오게 되죠. 조일연합군이라고. 12월 10여일 경에 조일연합군이 나주에서 유치쪽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1894년 음력으로 12월 14~15일 조일연합군과 석제전투가 벌이게 되죠. 한참 추운 겨울이었는데, 석제전투에 집결했던 동학군이 3만여 명 된다고 합니다. 근데 동학군이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동학군이 패퇴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신식무기의 위력을 못 느꼈지만, 전투를 하다보니까 그 위력이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 되니까 동학군들이 석대 주변에 있는 산 속으로 숨어들어 갑니다. 그래서 동학군들을 석대들로 유인하기 위해서 관군들이 동원돼서 전쟁을 부추기죠. 그래서 나오면 일본군은 신식무기로 섬멸하고. 그러다가 자울재라고 용산으로 넘어가는 그 자울재를 넘어가면서 일본군들의 추격을 당하는데, 지금도 대밭이 흔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대밭이 울창했나 봐요. 일본군의 참전기를 보면 해가 떨어졌는데 대밭 속에서 동학군이 혹시 출몰할지 모르니 일단 퇴각하자 그런 기록이 있어요. 그래서 퇴각을 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12월 14~15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15일 오후에 완전히 퇴각을 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그 동학군들이 용산, 관산, 관산읍(과거 고읍면)에 인제 옥상전투라는 전투가 있습니다. 관산 솔치재라고 그 재를 넘어가면 우측으로 들어가는 곳 거기 들판에서 12월 16일 옥산전투가 벌어집니다. 거기에 무연고 묘들이 있는데 아마 무연고 동학도들의 공동묘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더 나아가서, 대덕면 월정리가 강진 대구면으로 넘어가는 지역인데, 그쪽에서 월정전투라고 마지막 전투가 벌어져요. 월정전투가 마지막 전투인데, 12월 17일이에요. 고읍면에서 좀 더 내려가면 현 삼산리이라고 있는데, 대덕과 경계지역이지요. 간척지를 막기 전에는 회진은 완전 섬이었어요. 회진을 가는 길이 인제 간만의 차 때문에 하루에 두 번 정도 노들길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회진으로 간 동학군들도 있었고 월정전투가 벌어진 대덕읍 쪽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어요. 회진으로 간 분들은 다시 배를 타고 금일, 약산, 금당, 고금, 생일 더 나아가 청산도, 신지까지 피신을 갔어요. 거기에 젊은 20세 미만의 젊은 사공이 돛배로 그 섬으로 피신을 시킵니다. 윤성도라는 젊은 청년이. 그래가지고 일본군들이 동학 잔류병들을 색출하기 위해 회진으로 대덕으로 가지만 하나도 색출하질 못합니다. 결국 일본군들이 빈손으로 나가는 모습입니다. 윤성도뿐만 아니라 회진의 주민들이 그런 일을 많이 도왔죠. 배로 실어 날랐죠. 동학에 관련된 소설이 5편정도 되는데, 그 중에 석대 최후전투를 서술한 소설이 송기숙의 ‘녹두장군’, 한승원의 ‘동학제’ 이 두 편에서 석대전을 다룹니다. 그러면서 장흥의 석대전을 국가사적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한승원 선생은 동학제에서 월정전투까지 서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이소사’라는 여자 동학도가 있어요. 최근 ‘산매’라는 영화의 기초가 됐다고 할 수 있죠. 이소사는 동학 최후 전투 때 이인환 접주의 휘하에서 맹활약을 한 여성인데, 장흥부사의 최후 처단을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소사가 잡혀서 장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는데 그런 내용을 나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뇌부가 이소사 목숨을 살려서 나주로 빨리 압송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나주로 가서 결국 죽게 되는데, 일본군의 기록을 보면 이소사가 미치광이처럼 기록되는 부분도 있는데, 동학도들이 모진 고문을 당하다보면 아픔을 견디기 위해서 동학의 경전을 읊조리면서 그 고통을 견뎌냈던 것 아닌가. 일본군은 특히 한국말을 모르니까 경전을 중얼거리는 모습을 미치광이로 치부한 게 아닌가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소사는 관산 출신이라고 보고 있죠. 이인환 접주가 이방언 접주에 가려졌다고 그럴까요 그래서 기록이 많질 않은데, 이인환 접주도 이 지역 전투에서 세운 혁혁한 전공은 상당히 전략가 전술가로 평가해 줄 수 있겠다 싶어요. 이인환 접주는 장흥 동학군의 야전 사령관이라고 표현할 정도에요. 이인환 접주 밑에 이소사라는 여성 전사가 있었고 최동린이라는 대덕 연지 쪽의 젊은 동학도도 있어요. 이소사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지 않아 아쉬운데, 옛날에 소사라 하면 결혼한 여자를 칭했어요. 나중에 이소사의 시체를 남편이 찾아 갔다는 얘기도 있어요. 미모가 뛰어 났다고 그래요. 최동린은 이름이 최동, 최신동, 최동자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순봉 일기에는 기록이 없는데 관군의 기록에는 유일하게 나와 있다고 그래요. 거기에 보면, 이규태 휘하의 부대가 최동린을 체포해 일본군에 넘겼는데, 일본군은 다시 현지 일본군 진영에서 나주의 일본군 대대본부로 호송시켰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나주에 호송했다는 것은 최동린이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지요.

 

 

 

 

 


자료번호 / 06_12_07_FOT_20161208_KCHN_0001
제보자(구술자) / 김창남(남, 66세, 장평면 봉림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