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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차동(車洞)마을 학성(鶴城)과 백마타고 동학농민군을 지휘한 여성 이소사

장흥문화원 2017. 9. 12. 11:15

 

 

 

차동(車洞)마을 학성(鶴城)과 백마타고 동학농민군을 지휘한 여성 이소사
▶ 여성 이소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백마를 타고 농민군을 지휘하며 장흥석대들전투에 참여했다. 차동마을 뒷산에는 학성(鶴城)이 있는데 이곳은 말을 사육하고 조련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말타기를 어려서부터 배워 능수능란하게 탈 수 있는 환경이었다. 추정이지만 아마 이소사는 차동마을 출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이제 역사적인 사료를 가지고 추정한 이야긴데요. 근현대사의 여성운동이랄까. 아주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인물이 장흥에는 이소사라는 동학군을 지휘했던 흰백마를 타고, 그런 역사적인 인물이 나타나는데. 저희도 인제 저희 마을이 차동(車洞)이라는 이유가 마을 지명이 왜 차동일까를 생각해보면, 이 뒤에 보면 마을 뒤에 가보면 쪼고만 성이 있거든요. 근데 그 성이 학성(鶴城)이라고 하는데, 학이 날개짓을 하고 가는 것처럼. 남포지역에서 보면 그런 식으로 보여요. 그래서 아마 학성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 성의 역사적인 용도가 보며는 제주도에 말을, 몽골에서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서 갖다놨다가. 다시 육지로 말들이 들어오면서 제주도에서 인제 말이 마량으로 들어와서 강진 지명이 마량이 됐던 것이고. 또 마량항 본 동네에 있는 숙마(宿馬) 자체도 잘 숙(宿)자를 써서 말이 아마 제주도에서 들어와서 하루 쉬고 이렇게 이동했지 않았냐, 이런 추정이 가능하거든요. 근데 우리 마을의 성의 용도가 바로 마량에서 들어온 말들이 이 성에서 인제 사육되고 또 조련되고 하는 그런 기능을 가진 성이었거든요. 이런 성들이 한양까지 진행하면서 엄청 많은 그런 이름 없는 성들이 많은데, 저희 마을도 인제 그런 역할을 했던 아마 성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명자체도 차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말들을 마역으로 운반해주고, 또 수송마라든가 이런 걸 이쪽에서 길러내고. 이래서 아마 차동이라고 지명을 정하지 않엤냐, 이런 게 이제 추정이 가능하고. 또 이소사와 연결을 시켜 본다고 하면 역사적인 사료에는, 저희들이 장흥에 거리를 환산하는 기본이 되는 게 지금 교도소자리인, 그때 당시엔 인제 마역자리였고. 그때 당시 원도리라는 마을 자체가 도로의 지명, 아 도로를 거리로 환산하는 기점이 됐던, 기준점이 됐던 게 원도리거든요. 그래서 원도리에서, 제가 정확히는 기억이 어려운데 아마 이소사라는 인물은 30리 밖인가 이렇게 아마 살았다 해요. 그런 것만 있는데. 그래서 그때 당시에 1894년 쯔음엔 여자들이 말을 타고, 또 젊은 처자가 그러기는 상댕히 그 환경적으로도 어려운건데. 그렇다 하며는 말을 능수능란하게 탈 정도라고 하면 어려서부터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 뭐 저희 마을처럼 말을 사육하는 성에 있는 무슨 거기에 백성 중에 딸이었다든가, 이런 정도 되야마니 말을 타고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타지 않았겠느냐, 이렇게 판단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장흥에서 그 거리 정도에 있는, 말을 사용하고 말을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탈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 머 제 추정에는 저희 마을정도 있지 않겠냐. 그래서 역사적인 사료를 근거로 해서 본다 하면 그런 환경과 또 지역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저희 마을이지 않냐. 그래서 저는 이제 동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서, 이소사라는 인물을 알게 되면서 이소사에 대한 지역에 대해서, 출생지가 어딜 것인가 관심을 가져봤는데. 특히나 저희 마을이 그런 환경적인 그런 걸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우리 마을 출신인, 동학군 지도자인 이소사라는 인물이 우리 마을 사람일 수 있겠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봅니다. 이소사라는 인물은 저기 석대뜰전투에서, 일본메이신문에 보면 흰 백마를 타고 동학군을 지휘했다, 머 기녀니 이렇게 아주 나쁘게 표현이 돼있는데. 동학군을 지휘하다 잡혀서 나주로 압송돼서 나주에서 아주 엄청난 고문을 받고 해서. 그전에는 머 산부인과나 머 그런 게 없었겠죠. 그래서 자기 남편을 올라오라 해서 이렇게 간호를 하게끔 한다든가. 이런 그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아주 여성으로서, 남성들이 참여하고 사회적인 기반이 그렇게 여성분들이 그렇게 나타나고 또 어뜨게 사회에 내놓고 먼 일을 하고.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도 아니었는데 이소사라는 인물은 동학군들을 독려하고 또 동학군을 지휘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래서 우리지역에, 저희 마을사람이라고 추정도 하지마는, 장흥에 한 여성인물로서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이 정도에 어떤 그 일본과의 관계라든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여성분들이 머 유관순 열사 이전에, 그런 역사적으로나 또는 우리 민족적으로도 조명해 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여성 지도자라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료번호 / 06_12_04_FOT_20160704_KJK_0001
제보자(구술자) / 고재국(남, 53세, 용산면 차동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