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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관산항일사건

장흥문화원 2017. 9. 12. 11:45

 

 

 

관산항일사건
▶ 3·1만세운동 한 달 뒤인 4월 7~8일 이틀간에 걸쳐 관산에서 항일사건이 일어났는데, 일본헌병들이 용산으로 후퇴를 했다가 지원병이 오자 다시 들어와 총으로 진압하고는 주모자들을 검거해서 관련자들이 감옥에 투옥됐다는 이야기다. 그때 항일사건이 일어난 주요 계기는 일인들이 천관산에 밤나무를 심으려고 유독 강제 동원을 심하게 했던 것에 대한 반일감정이 깊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얘긴데, 1910년 한일합방 전후해서 일본 사람들이 그때 우리 면까지 들어와 가지고, 강제동원을 시키는데 뭘 하기로 동원을 시키느냐 그러면 밤 종자를, 밤을 갖고 와 갖고 천관산 좋은 기름진 곳, 밤나무가 잘 될 수 있는 곳에 밤을 심어. 그런데 지금까지도 그 밤나무가 존재하는 곳이 있어. 가마솥 뒤에 지금 10여 그루 지금도 있어, 밤나무가 그런데 그때 당시에 하루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동원을 시켜갖고 밤 종자 갔다가 막 심을 동원을 하니까, 글 안 해도 반일감정이 심하고 그런 판에 강제동원을 시키니까 이제 부글부글 끓고 그런 시긴데, 마치 인자 1919년 3월 1일날 만세삼창 사건이 일어나. 그런데, 장흥군은, 장흥읍에서는 만세삼창이 없어. 못했어. 왜 못했냐? 석대들에서 동학군들이 최후항쟁지역인데, 거기서 너무 많은 군민들이 죽었단 말이여. 그라믄 동학농민군만 죽은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관군도 많이 죽었어. 그래갖고 장흥에서는 관군하고 농민군들하고 도시 피해를 장흥에서 너무 많이 당했기 때문에 3·1운동 만세를 안 불러분 것이여. 그래서 이웃 군에서는 혹자들은 비아냥거려. 3·1운동 때 만세삼창 한나도 못부른 놈들이라고. 그런데, 그런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안 한 것이여. 그런데 관산에서는 어쨌냐? 인자 너무 반일감정이 있는데다가 강제동원을 해갖고 맨 울력이나 시키고 이렇게 하니까 극도로 부글부글 한 차에 3·1운동 만세사건이 터지거든? 그런데 그때는 뭔 소식이 빨리 접하들 안해. 그러니까 쭈욱 이렇게 접어갖고 오는 시간이 일주일이라는 세월이 흘렀지. 그래갖고 한 달 후에 4월 7일날, 8일날 양일 동안에 여기서 만세사건이라기보다는 항일운동이 얼어난거여. 여기서 일본 헌병들을 막 때려죽일라고 데모가 일어난 거여 말하자면. 유림들이 앞장서가지고 한 거여. 그러니까 그때 일본군 헌병이 몇 명이 있었냐 그러면 네 명이 있고, 헌병보조원이 2명 있고, 해서 6명이 근무를 하는데, 면민이 총동원해갖고 궐기하니까 이제 이 사람들이 무서워서, 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무서워서 후퇴를 해부러. 용산으로. 그래갖고 지원을 받어, 지원군하고 와 갖고 다시 여기를 진압을 하는데, 총으로 진압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농민들 순한 농민들이 해산이 되고, 주모자만 잡어갈려고 색출을 하는데, 주모자들이 잡히는데, 그때에 용전마을에 김효진씨라는 유학자가 계셨는데, 그분이 필두로 해서 유학자들이 위계장, 위계련, 이도유, 정한수 이런 분들은 가서 3개월 복역을 해 잡혀가가지고. 그러고 위석일 외에 15명은 일주일간 구류를 당하고. 또 정형수, 백우일, 전평삼 이런 등등은 심한 문초를 받고 석방을 하고. 그래서 그때에 천관산항일사건이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인해서 정한수 같은 사람은 고문후유증을 받아가지고 석방된 뒤로 45일만에 사망하는 이런 사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천관산항일사건은 3·1운동 한 달 후에 4월 7일날, 8일날 양일간에 걸쳐서 천관산 밤나무, 밤 종자를 너무 강제 동원 해가지고 하니까 거기에 불만을 가지고, 글 안 해도 반일감정이 있는데다가 불만을 가지고 일어난 사건이 천관산 항일사건이다….

 

 

 

 

 

 


자료번호 / 06_12_02_MPN_20160822_WCR_0002
제보자(구술자) / 위철량(남, 71세, 관산읍 와룡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