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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독립운동가 신출귀몰 임학현

장흥문화원 2017. 9. 12. 11:57

 

 

 

독립운동가 신출귀몰 임학현
▶ 임학현은 일제강점기 의병(독립운동가)으로 활동하면서 축지법을 쓰는 등 신출귀몰한 것으로 이름을 알렸다. 행방 후 고향마을에 거주하다 한국전이 반발하면서 반란군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훈련을 시키는 등 지원을 했다. 그로 인해 목포교도서에 갇혔으나 연로해 석방되었다 귀향길에 돌아가셨다. 후손이 없고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보상이나 조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조상 중 2형제분이 의병(독립운동)이었는데 하나는 귀자 현자 왜적을 많이 무찌른 양반이여. 이 양반 자손(나로서는 아버님)이 형제간이 4남맨데 아버지가 제일 장남이고 지금으로 계신다고 하면 군수직도 더 했던 양반이제. 그런데 한 양반은 일제 해방 직후에 백오형무소에서 옥사를 하셨고 거가 공동묘지에 모셨다고 하대. 차두를 큰놈을 갖다가 명년에 와서 찾아야겠다 하니까 나중에 없어. 그 우게 형님이 학자 현자 인데 그 냥반이 내가 볼 때는 가담을 많이 하셨제. 순전히 의병해서 옥사했어. 목포형무소 계셨는데 6·25 때 총 쏠 줄을 알아. 이북 반란군이제. 할려고 해서 한 게 아니고 지방 폭도 반란군에게 총 쏘는 방법을 갈쳐줬다 이거여. 그래가지고 이 양반이 목포형무소에서 2년 6개월 구속되고 옥살이를 못 할 거 같은 게 내놨어. 나로 해서 작은 아버진데 이 양반이 목포형무소에서 나와가지고 짐꾼 하나 없제. 그때 열차가 송정리로 해서 돌아서 이리 왔어. 그란게 이양반이 (짐꾼을 부리려) 허풍을 쳤던 모양이여. 큰집에 가믄 돈이 많다고. 해서 같이 송정리로 가서 보성역에서 내려가지고 짐꾼이 같이 왔는데, (짐꾼이 옆에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이 양반이) 별 볼 일 없으니까, 옆에서 그 사람이 어디까지 왔냐고 물으니 길마재까지 왔다고 했다고 해. 짐꾼이 가족에게 알려줬어. 두 양반이 가가지고 길마재 거기서 오다가 돌아가셔서 묻어버렸어. 이양반이 왜적을 많이 무찌른 양반이고 나는 보지는 못했지만 무술가라고 하더라고.
- (의병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임학현.
- (일제강점기 때 활동 하셨네요. 따로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없어요?)
없고, 혜택도 못 받고 있어.
- (목포형무소에서 옥사 하신 거는 기록에 있겠네요)
감옥에서 내 놔부렀어. 그래서 길마재서 돌아가셨어.
- (그분 자손들은요?)
이 양반 자손은 없고 그 밑에 동생 백오형무소 사신 분 자손은 6남매가 있어.
- (두 분이 독립운동을 했는데 주로 어디서 활동하셨어요?)
왜적들이 보성으로 많이 와서 길마재에서 길목을 막고 총을 맞았어. 하루는 발뒤꿈치에 총상을 입었는데 주막에서 소금으로 치료했다고 해.
- (그 양반이 임학현이고 그 형님은 해방 후에 귀향을 하신 거네요.)
내동으로 귀향을 하셨는데 이분이 귀향을 하시다가 6·25 한국전을 겪으시면서….
- (이분이 6·25 때 총 쏘는 방법을 반란군한테 가르치셨어요? 군사훈련을 가르친 거네요. 그걸 빌미로 해서 목포형무소에 잡혀 들어간 거구요. 그래서 2년 6개월을 받았어요. 연세가 많고 몸이 좋지 않아서 석방을 시켰는데 돌아오시는 길에 돌아가신거네요.)
응, 그래.
- (그분이 평생 싸워왔던 길마재에서 돌아가셨네요.)
내가 볼 때는 그래.
- (그분이 신출귀몰하셨다면서요?)
내가 보지는 안했는데 옛날 의병 때 기술이 있더라고 그래. 축지법을 사용했다고 해.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그 냥반이 엽총을 가지고 지방에 반란군 양반들을 갈쳐줬지. 안죽을라니까 갈쳐주지. 그랬다는 걸로 해서 잡혀 들어갔어. 좌익계열이 아니고 재주가 있고 기술이 있기 때문에 협조했다고 해서 그리 몰려버린 것이지.

- [문장호(남, 79세, 임리마을)] 의병활동하다 방죽에서 포위를 당했는데 임 의병이 저수지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생포를 위해 좇았는데 포위 뚫고 마을로 진입 했다. 또 마을에 불을 지르자 연기에 몸을 숨기고 탈출했다. 또 의병활동을 할 당시에 무기(칼, 보이기에는 지팡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장도)를 직접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깊은 산골 고향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이 벌어지자 주변의 반란군들이 찾아와 의병 활동 때와 마찬가지로 무기(엽총)를 만들어 달라 부탁해서 협조했다. 돌아가신 이후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자손도 없다.]

 

 

 

 

 

 


자료번호 / 06_12_07_FOT_20160719_HTJ_0001
제보자(구술자) / 임태주(남, 79세, 부산면 내동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