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때 박헌양 부사 죽음에 조시(弔詩)를 쓴 증조부님
▶ 증조부님은 한학에 깊이가 있고 큰 서재를 가지신 유림이셨다. 동학농민혁명 때 박헌양 부사의 소집으로 유생들이 모인 대책회의에도 참여했다. 교류가 많았다 부산면 출신 김한섭은 강진에서 동학농민군과의 전투 가운데 사망하였으니 증조부님은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아서 1912년에 돌아가셨다.
큰고모님 말씀만 들었는데 그 조부님이, 고모님한테는 조부님인데. 내 조부님은 서른일곱에 돌아가셨거든요. 일찍 돌아가셔서 그 맥을 잇지를 못했어, 우리 집안에서. 그라고 아버지는 육유재(六有齋 백영직) 돌아가신 백일 후에 태어났고. 그란께 큰고모님만 유일하니 알어, 그 육유재란 분을. 그란디 그 분이 얘기 하실 때 에~ 그 인정을 안 한데 그 부사가 관산 가면서 서재를 들려서 봤다, 그란데 그 증조부님이 풍채가 상댕히 좋으셨던 것 같에요. 그런 얘기를 하고. 그때 동학군이, 진압군, 검정 옷 입고, 진압군들이 마을에 왔는데 그 동학군들 진압군들이, 그 분이 골목에 나가닌까 전부 예를 표시하고 조용하니 물러가드라, 인자 그런 얘기. 진압군, 그러닌까 관군하고 굉장히 가깝게 지내. 그 분이 오남 김한섭 씨, 부산 오남. 한섭 씨하고 세 살이 더 우엔디, 그분은. 그분은 강진서 돌아가셨고, 동학군한테 만나가지고. 그라고 그때 당시에 민란이 일어나닌까, 민란이여 지금은 동학혁명이라고 그러는데. 그때 대책회의를 했데요, 그 부사님이 소집해가지고 유생들이. 거기에 참여하신 분들이 여러시 있으신 거 같에. 그래서 그 분이, 저는 잘 모르는데 조부님에 대한 그 한학의 깊이를 전북대학 교수가 얘기하데요. 굉장히 정학을 하신 분이고 굉장히 훌륭하신 분이다, 그런데. 서재가 있었느냐, 그래서 있었다, 그랬드니. 제 아버지가 모르닌까 뜯어부렀어, 저 부산에 있을 때 뜯어부렀다고, 천오백 평이나 되는데. 인자 그것이 관리도 못하고 유지 못하것으니 뜯은 것 같데요. 그것이 굉장히 아쉬운 점이여.
- (그러면 그 당시에 증조부님이 박헌양 부사랑 교류가 깊었나요.)
교류가 깊었어요. 그라고 그 냥반이 평화서(장흥읍 평화리) 돌아가셨다든가, 요 도망가시다가, 부사님이. 그란디 그때 그 문집에 보면 그 조시(弔詩)를 했어, 시를. 그란께 상댕히 훌륭하신데, 그냥반이 경기도 포천에 귀향 오셨던 팽묵 김00 선생님의 문하생이었고 육유재란 호도 그 분이 지어 주었어요. 그것이 영회당 사료집에 나와요. 거기가 한 15페이지가 수록이 됐되요, 그 부분에 대해서.(박후의적 朴侯義蹟)
- (그럼 증조부님은 그 당시에 싸움에 참여하시진 않았나요.)
안 하고 오남 선생님만 참여 하셨데요. 강진으로 병영으로 가셔갔고 거그서 돌아가셨어. 동학군 만나가지고. 그란께 증조부님은 1912년에 일흔둘에 돌아가셨어.
영회당은 장녕성 전투에서 희생당한 장졸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자료번호 / 06_12_01_FOT_20170310_BIS_0001
제보자(구술자) / 백일선(남, 82세, 장흥읍 건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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