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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동학농민혁명 때 수성군으로 참여하여 장녕성에서 돌아가신 조부님과 증조부님

장흥문화원 2017. 9. 12. 13:20

 

 

 

동학농민혁명 때 수성군으로 참여하여 장녕성에서 돌아가신 조부님과 증조부님
▶ 증조부님은 장흥동학농민혁명 석대들 전투에서 박헌양 부사와 함께 장녕성을 수성하다 돌아가셨다. 그때 조부님도 수성군으로 함께 돌아가셨다. 그 뒤로 집안이 어려워 할머니가 삯바느질을 해서 겨우 연명했다.

 

 

섣달로 해서 12월 5일날 돌아가셨어, 5일날. 그란께 인자 제사를 4일날 모시고 있는데. 아까 얘기 하다시피 동문하고 남문을 인자 방어를 하고 계신디 이 북문으로 요리(마을 옆 산을 가리키며) 북문으로 해서 그냥 성을 점령을 해부러가지고. 그 인자 한 2만 몇 명이 오셔갖고 하니 숫자로 해보들 못하제. 그날 한 날 한 시에 96인이, 박헌양 이하 96인이 싸악 돌아가셔부렀지.
- (증조부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어요.)
그란께 오위장이라고, 거그 보믄 쩌그 비에도 오위장이라고 해가지고 학인 씨라고 적어졌든마. 인자 그것 보고 내가 오이장이라고 알고 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잘 모르제. 아부님도 그때 네 살 자셨고 할머니는 안에 양반이라 그때 별로 알았겠어요. 잘 모르고 그냥 얼떨떨 하니 그냥 상황에 도달했지. 그래가지고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몰라요. 그 영회당이라고 제사를 지금도 음력으로 3월 보름날 제사를 모시고 있는디 그 당시에는 요것 저 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농민혁명이라고 부르기 전에는) 전부 저 군수, 서장님 오셔갖고 제사를 모셨어. 모도 아흔관, 초흔관 다 하시고. 그 뒤로 요새는 통 빗깜(비침, 나타남)도 안 해부러. 직계손 몇 분만 인자 나와갖고 제사 모시고 간단하니.

- (그 당시에 어떻게 아들 조부님까지 참여를 하셨나요.)
그란디 군에 같이 계셨든갑서 그때. 아들하고 같이. 그라다가 그런 사건을 당하겠제.
- (그라면 그 당시에 돌아가셔가지고 어떻게 시신을 수습 하셨어요.)
그란께 그런 것도 확실히 몰르죠. 조부님은 지금 성불리에가 모셔갖고 있어. 그라고 증조부님은 쩌그 장평가 모셔갖고 있고.

- (그 당시에 조선이 부패도 하고….)
그때 어르신들 얘기하믄 장흥은 그런 부패 별로 없었다 해요. 전라북도 정읍이라는데 지금 거그서 그 군수 조병갑이, 거그서 그 부정부패 해가지고 발단이 일어나가지고 했는디, 장흥은 그 당시도 감찰사 쩌 원도리 지금 원도리 백세등이라고 거가 있었고 평온했다 그래요. 그란디 그 이방언이란 분. 그 분이 용산 분인디 그 분이 아마 주동이 되아갖고 장흥을 아마 그란 것 같에요. 장흥은 별로 그 당시에는 베슬(벼슬)도 돈 주고 사고 막 벨 부정부패가 있었잖아요. 장흥은 그런 것 같지는 안 하고. 그래가지고 밑에 박헌양 부사 밑에 있으신 분들이 피신을 가자고 그랬다고 그래. 인자 농민들이 오닌까 피신 가자 그란께 그 냥반이 고집이 쎄가지고, 어째 우리 체제를 수호하는 사람들이 이라고 도망을 가야, 비겁하지 않냐, 그래가지고 도망 안 가시고 한 날 한 시에 돌아가신 것 같에. 그렇게 얘기를 들었어.
- (영회당은 정부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잖아요. 언제 지었나요.)
그거이 진 제가 솔찬히 오래 되었어요. 전부 모금을 했어, 모금을. 그때 정부가 머 빈한해서 세금으로 할 처지가 안 되닌까 후손들이 내가지고. 그래서 영회당 짓고 비석도 세우고. 전부 있어. 누구 얼마, 1원 2원 그렇게 되 있던디, 그 당시에 돈이.
- (그때 조부님까지 돌아가시고 아버님은 4살이고, 생활이 많이 어려웠겠네요.)
그랬제라, 말할 수 없어. 그란께 우리 할머니 바느질, 삯바느질을 잘 하셨든 모냥이여. 그놈으로 연명을 하고 그라고….

- (그 당시 농민군들이 장녕성을 점령하면서 다 불탔는데 동동리 집도 불탔겠네요.)
아 그 집은 안 탔닸답 합디다, 우리 집은. 아부님은 어떠케 살았냐 그라믄 농이 있었는데 농에다 그그다 가닸던(가두다) 모냥입디다. 인자 피신했든 모냥이여. 그란께 아부님이 거그서 살라고 그랬든가 주무셔 부렀다고 그래. 그래가지고 다행히 아부님은 안 돌아가셨어. 그렇게 얘기를 들었어.

 

 

 

 

 

 


자료번호 / 06_12_01_FOT_20170310_OCG_0001
제보자(구술자) / 오춘기(남, 82세, 장흥읍 연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