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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의향편] 석대들전투에서 돌아가신 수성군 조부님

장흥문화원 2017. 9. 12. 13:13

 

 

 

석대들전투에서 돌아가신 수성군 조부님
▶ 조부님은 장녕성을 지키다가 박헌양 부사와 함께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일본군의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나쁜 짓은 일본군이 다 저질렀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들어섰는데 수성군을 모시는 영회당도 관리를 해주면 좋겠다.

 

 

그란께 인자 우리 어려서부터 저기 해놔서 그 어르신들은 우리가 뵙지를 못 했지요. 그러고 지금 동학혁명이 난 제가 란이 난 제가 지금 백 년이 넘제 안 했읍닌까요. 그래나서 우리는 말만 들었지 머 현장을 목격 못하고. 그 당시 마지막 장식을 장흥서 했다는, 란, 혁명. 마지막 장식을 장흥서 하기땜에 이 3·1절 만세를 못 불렀 덴가 장흥입니다. 왜 그분 후손들이, 마지막의 석대, 비참하게 아흔여섯 분이서 순직이라고 봐야죠. 저는 순직이다 고 봅니다. 순직하신 분들의 그 흘린 피를 볼 적에 도저히 만세 불르러 가서는 안 되겠다고 부모님들이 막었답니다, 그 당시.

- (조부님이 돌아가시고, 누구한테 들으셨나요.)
아버님한테 들었지요. 아버님도 딴 이약(이야기)을 안 해요. 왜 너무나도 억울하니 세상을 떴기 때문에. 지금 오늘 탄핵(박근혜 대통령 탄핵 파면)을 했습니다마는 이 장흥군청을 어느 동학란과 같이 쳐들어온다 했을 때 군수 이하 직원들이 사수 하겄습니까요. 박헌양 부사 이하, 지금 같으먼 군청에 청소하시는 분까지 아흔 여섯 분이었어요. 그래서 이 저 저쪽 석대뜰에 그 비를 세울 때 상당히 이야기가 됐습니다, 군청에서 오고 가고. 양쪽 측 오락해가지고. 명칭을 어떻게 해야 서로 갈등이 없겄냐, 그래갖고 여러 이야기가 있다가 결국은 인자 그 비를 세우고 했습니다마는. 동학기념탑으로. 음 그거는 시대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왜 그 전에는 동학란이었는디 어느 날 전두환이가 대통령 되면서, 전봉준 알죠. 거가 동학란을 일으킨 사람의 아조 주동잡니다. 역사가 바뀌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더 이상 할 이약도 없고. 단 내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 쩌어 동학기념관 지는 액수가 아마 억 단위가 넘을 겁니다. 그러면은 수성군, 지키다가 아흔여섯 분이 돌아가셨던 그 제각이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모시는 제사가 있어요, 아흔여섯 분의 제사가. 옛날에는 그 제사를 군에서 지냈어요. 인자 세상이 바뀌고 나닌까 군에서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해서 참여도 안 해요, 지금은. 그러고 하고 있는 건물을 보면은 머 기념관에 비하면은 화장실에 불과하지 않느냐,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이거입니다. 그러면 관리라도 해줘야 쓸 거 아니냐, 그래가지고 금년 가을에 가 보닌까 풀이 엉망이에요. 심지어는 그 설움을 받고 있습니다.

- (조부님이 수성군으로 참여해서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 시신을 어떻게 수습하셨을까요.)
묘소만 지금 오춘기 씨 마을(장흥읍 연산리) 그 마을에가 있어요. 그래서 항시 내가 벌초 하고. 그 당시 가족이 없었어요. 그 당시는 젊은 나이에 다들 저기 하지 않엤습니까. 그러고 수성군으로 근무한 직원들이 지금 같으먼 군청직원들 아닙니까요, 축소해서 이약 하자먼. 그때는 부사 하게 되면은 장흥군수가 아닙니다. 몇 개 군의 부사지. 나는 그렇게 이약을 들었습니다, 옛날 분들한테.
- (그 당시 아버님은 몇 세였을까요.)
아버님은, 내가 젤로 막내닌까, 그렇게 많지를 안했습니다.
- (수성군들로 참여한 분들이 다들 여러 성 씨 장흥 분들이요. 옛날에는 많이 모였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는 각 기관장님들이 오시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이, 우리 어려서만 해도 그렇게 많이 모였어요. 그란디 지금은 머 뭐락 할까요,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은 반대로 되아가지고, 동학혁명이다 해가지고 반대로 되아가지고 인자 수성군들이 역적이 안 돼부렀지 않습니까. 그러고 이 란이 죽은 사람들이 사실 억울하게 죽었어요. 그 수성군들이 다 나쁜 짓거리 하다가 죽었느냐면, 다 공직생활 아닙니까요. 그 일본사람들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고 나쁜 짓거리는 일본사람들이 다 했는디 거기에 죽는 사람은 우리나라 한국사람.

 

 

 

 

 

 

                                                   영회당 - 후손들은 매년 음력 3월 15일에 96인의 수성장졸들의 영령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는 제례를 올리고 있다.

 

 

 

 

 


자료번호 / 06_12_01_FOT_20170310_KOD_0001
제보자(구술자) / 김옥두(남, 80세, 장흥읍 건산리)